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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소국이 신라에 합병되자, 항복 선택…신라 3대 제사지
사라진 고대왕국…스스로 항복한 골벌국
2019. 05. 16 by 김현민기자

 

골벌국은 경북 영천에 있던 소국이다. 삼국사기에는 골벌국에 관해 간략하게 서술했다.

 

조분이사금 7(서기 236) 2, 골벌국(骨伐國)의 왕 아음부(阿音夫)가 무리를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집과 토지를 주어 편안히 살게 하고, 그 땅을 군으로 삼았다. (신라본기)

임고군(臨臯郡)은 원래 절야화군(切也火郡)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군에 속한 현은 다섯이다. …… 임천현(臨川縣)은 조분왕(助賁王) 때 정벌해 골화(骨火)라는 작은 나라를 정벌해 얻고(伐得骨火小國) 현을 설치했던 곳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은 영주(永州)에 병합되었다 (지리지 양주조)

대사(大祀)3산에서 지냈는데 첫째는 나력산(奈歷山)[습비부], 둘째는 골화산(骨火山)[절야화군], 셋째는 혈례산(穴禮山)[대성군]이다. (잡지 제사조)

 

()’부리(夫里)’, ‘과 함께 성()을 뜻하는 고대 한자표기인데, ‘()’로 표기해 골벌(骨伐)을 골화(骨火)라고 부르기도 한다. 삼국사기 또는 삼국유사에 골화골벌과 같은 표현이다.

따라서 골벌국은 골화국(骨火國)이라고도 한다. 역사학자들은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에 나오는 진한호로국(戶路國)을 골벌국에 비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골벌국의 마지막 왕 아음부가 신하들(무리)과 함께 나라를 신라에 들어바쳤고, 신라 왕(조분)이 너그럽게 대우해 집과 투지를 주어 편히 살게 했다고 쓰였다. 하지만, 지리지 양주조에는 골화라는 작은 나라를 정벌해 얻었다고 표현했다. 두 곳의 서로다른 표현을 정리하자면, 신라의 위협에 골벌국이 자발적으로 항복한 것으로 해석된다.

삼국사기 잡지 제사조에 골벌 자리에 있던 골화산은 신라 왕실이 큰 제사를 지내는 3곳의 신성한 곳임을 보여준다. 경주(습비부)의 나력산, 영일의 혀례산과 함께 영천 골화산이 대등한 위치였다는 사실은 신라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골벌국을 핵심세력의 하나로 편입했음을 보여준다.

 

그래픽=김현민
그래픽=김현민

 

그러면 골벌국은 왜 신라에게 나라를 바쳤을까.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골벌국을 병합하기 앞서 경주 안강의 음즙벌국(102), 경산의 압독국(102), 의성의 조문국(185), 김천의 감문국(231)을 차례로 정벌해 복속시켰다. 지도를 놓고 보면 골벌국은 신라 영토에 포위되어 있다. 골벌국은 신라에 저항하느냐, 항복하느냐의 갈림길에서 항복을 선택했다고 볼수 있다.

신라로서도 주변 소국을 모두 내지화했는데, 골벌국만 한가운데 독립국으로 남겨두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타협책이 나왔다. 왕과 귀족들에게 땅을 내어 주고 먹고 살게 할 터이니 항복하라고골벌국 지배층들은 신라에 저항하다가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가 되느니, 살자고 한 것이다.

 

영천시 화산면과 신녕면 등지에서는 세형동검(細形銅劍)과 동과(銅戈)가 발견되었는데, 그 유물들이 골벌국의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있다. 영천 지역에서 출토되는 청동기 유물의 수량과 형태로 미루어 골벌국이 상당기간 동안 경주의 신라와 대구의 작은 나라 등과 교역관계를 맺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신라는 그 지역에 임고군(臨皐郡) 임천현(臨川縣)을 두었다.

 

영천 완산동 고분군 출토 유물 (2012년) /문화재청
영천 완산동 고분군 출토 유물 (2012년) /문화재청

 

영천시 완산동에는 고분군이 있다.

문화재청이 발간한 문화유적분포지도에 따르면 완산동 고분군 ~으로 구분되어 있다. 현재 대부분이 도굴되었으며, 중앙선 철도로 인해 그 맥이 잘려나간 상태이다. 또 민가가 많이 들어와 살면서 많이 훼손되었다. 안완산마을 뒷산에 선돌 2기가 있는데 주민들은 득남을 위한 기도처로 미륵바위라고도 하며, 혹자는 골벌국의 대사(大祀)를 치른 곳으로 보기도 한다. 크기는 높이 1.1m이다.

2012년 계림문화재연구원이 영천시 완산동 고분군(구역)에 대해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고분군에는 6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적석목곽묘와 석곽묘, 3세기 말~5세기경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목관과 목곽묘가 확인되었다. 또 대부장경호(臺附長頸壺, 받침이 있는 목이 긴 항아리), 파배(把杯, 손잡이가 있는 잔), 단경호(短頸壺, 목이 짧은 항아리), 환두대도(環頭大刀, 손잡이 끝이 고리 모양의 칼), 철겸(鐵鎌, 쇠낫), 교구(鉸具, 허리띠 장식물)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삼국유사 기이편 김유신 조에 골화(골벌)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김유신이 나이 18세가 되던 임신년(서기 612)에 검술을 익혀 국선(國仙)이 되었다. 그 당시 백석(白石)이란 자가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화랑도의 무리에 속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유신랑은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밤낮으로 모의하고 있었는데, 백석이 그 모의를 알고 공에게 말하였다.

제가 공과 함께 몰래 저들을 정탐한 연후에 일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유신랑은 기뻐하며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길을 떠났다.

고개 위에서 쉬고 있는데, 어떤 두 여자가 유신랑을 따라 왔다. 골화천(骨火川)에 이르러서 잠을 자려는데 또 한 여자가 홀연히 왔다. 유신랑이 세 낭자와 즐거이 이야기하는데, 낭자들이 맛있는 과자를 주었다. 유신랑은 과자를 받아먹으면서 마음으로 서로 허락하고, 곧 그간의 사정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낭자들이 말하였다.

공께서 하신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원하옵건대 백석을 잠시 떼어놓고 저희들과 함께 숲 속으로 들어가시면, 다시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서 함께 숲 속으로 들어가자, 낭자들이 신의 모습으로 변하여 말하였다.

우리들은 내림(奈林)혈례(穴禮)골화(骨火) 등 세 곳의 호국신(護國之神)이다. 지금 적국의 사람이 그대를 유인해 가는데도 그대는 이를 모른 채 길을 떠났다. 그래서 그대가 떠나지 못하게 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말을 마치자 사라져버렸다. 공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엎드려 두 번 절을 하고 숲에서 나왔다. 그리고 골화관(骨火舘)에 유숙할 때 백석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다른 나라에 가면서 중요한 문서를 잊고 왔다. 함께 집에 돌아가서 가지고 왔으면 한다.”

마침내 집에 돌아와서는 백석을 묶어놓고 사실을 캐묻자, 백석이 말하였다.

저는 본래 고구려 사람입니다. …… 그래서 나를 보내어 이렇게 유신랑을 유인할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공은 곧 백석을 죽이고 온갖 제물을 갖추어서 세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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