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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추적
고구려 유민출신 왕국 진압 위해…장보고 해상권 장악에 밑거름 되었을듯
장보고에 앞서 신라, 산동반도에 출병했다
2019. 05. 23 by 아틀라스

 

신라 42대 흥덕왕 3(828), ()나라 군벌세력의 장수로 있던 장보고(張保皐)가 임금에게 아뢰어 청해진(淸海鎭)을 세우고 군사 1만명으로 1년만에 해적을 완전하게 소탕한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나온다.

남의 나라 군대에 복무하던 한 뜨내기 장수에게 군사 1만을 주었다는 얘기나, 1년만에 제해권을 쥐었다는 대목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 미스터리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청해진 설치 9년전에 신라가 3만의 대병력을 징발해 산동반도를 원정갔다는 기사에서 찾을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11(819)에 이런 기록이 있다.

가을 7, 당나라 운주절도사(鄆州節度使) 이사도(李師道)가 반란을 일으켰다. 당나라 헌종(憲宗)이 그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양주절도사(楊州節度使) 조공(趙恭)을 보내 우리 병마의 출동을 요구하였다. 임금은 이에 따라 순천군장군(順天軍將軍) 김웅원(金雄元)에게 명하여 정예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돕게 하였다.”

 

운주(鄆州)는 지금 산동반도 제령(濟寧)이다. 삼한을 통일한지 150년이 되는 시기에, 신라가 왜 3만명이라는 엄청난 군사를 산동반도로 출병시켰을까.

3만이란 군사는 당대로는 엄청난 군대다. 660년 신라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백제를 멸하러 황산벌로 달려갔을 때 동원한 군사는 5만명, 그후 일본이 백제를 도우러 파병했다가 백강(白江) 전투에서 전멸한 군사가 4만명이었다. 전시도 아닌 평화기에 3만의 병사는 신라로선 최대로 동원할수 있는 병력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파병은 우리역사에서 최초의 해외원정으로 기록된다.

주목할 인물은 산동반도 파병 대장인 김응원이다. 김유신계 후손으로 파악되는 그는 앞서 811년에 완산주(完山州) 도독에 임명되었다. 이어 헌덕왕 말기인 822년에 김헌창(金憲昌)의 반란 때 김균정(金均貞), 김우징(金祐徵)과 함께 반란군 토벌에 공을 세웠다. 그때 김응원과 함께 한 김우징이 후에 청해진을 찾아와 의지하고, 장보고의 지원으로 신무왕이 된다.

여기서 신라 말기의 군벌 인맥도가 그려진다. 흥덕왕이 죽고 왕위 다툼이 벌어졌을 때 패한 균정파의 일원에 김응원, 김우징이 있고, 여기에 장보고가 가담한다.

장보고는 김응원이 완산주(전주) 도독으로 있을 때, 그의 수하로 들어갔고, 산동반도 출병때 그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지 않았을까.

이 가설이 맞다면 장보고의 일대기는 순조롭게 풀린다.

장보고는 김씨 왕족인 균정, 우징, 김유신계인 김응원과 한 패였고, 김응원이 산동반도로 출병할 때 따라가서 중국에 잔류한다. 귀국해 균정 일파에게 청해진 건설을 주창하고, 흥덕왕의 허락을 받아낸다. 청해진 건설후 수도 경주에서 왕권다툼이 벌어지자 김우징을 지원해 보위에 오르게 한다. 그후 왕족과 혼인관계를 맺으려 하다가 계급이 천하다는 이유로 거절되었고, 이에 반감을 갖는데 수하에게 칼을 맞아 최후를 맞는다.

 

그래픽=김현민
그래픽=김현민

 

그러면 여기서 신라가 819년 왜 3만의 병력을 산동반도에 출병했는지를 살펴보자.

당시 산동반도에는 4대에 걸쳐 55년간 지배한 고구려 후예들의 왕국이 있었다. 이른바 치청(淄靑)왕국이다. 창업자는 고구려 유민의 후손인 이정기(李正己)이고, 신라가 출병할 때는 4대째 이사도(李師道)가 그곳을 지배하고 있었다.

스토리는 이정기(李正己, 732~781)라는 인물로 시작한다.

이정기의 본명은 이회옥(李懷玉)이었다. 고구려 유민의 후손으로, 지금의 요령성 요하 서쪽에 있는 영주(營州)에서 태어나 군인으로 성장했다. 고구려 유민들 가운데 당나라에서 출세한 고선지(高仙芝), 왕모중(王毛仲)이 모두 군인 출신이었다. 영주는 옛 고구려와 가까워 당나라에 끌려온 유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회옥은 처음에 영주부장(營州部將)의 직책에 있었다. 소속은 평로군(平盧軍)이었다.

그가 23살이던 755년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발생한다. 전쟁은 군인에게 출세의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이회옥은 고모의 아들인 후희일(侯希逸)과 함께 토벌군으로 참전한다.

758년 평로군 절도사 왕현지가 병사하자, 이회옥은 왕현지의 아들을 죽이고 후희일을 평로군사(平盧軍帥)로 추대했다. 당 조정은 어쩔수 없이 후희일을 인정했다.

중국 북동부에 주둔하던 평로군은 고구려 유민들을 주력부대로 구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족의 공격을 받아 평로군 2만명은 배를 타고 산동반도로 건너갔다.

당 조정은 후희일에게 산동반도의 치주(淄州), 청주(靑州) 6개주를 관장하게 하고, 평로치청절도사의 관직을 주었다. 이회옥은 후희일을 돕는 부장(副將)이 되었다.

후희일은 당 조정의 신임에 만족해 정치에 태만하게 되고, 불교사원 건축 등에 힘써 통치구역의 경제가 흔들리게 되었다. 후희일은 인기가 높은 이정기를 두려워하고 시기하여 부장 자리에서 해임한다.

기회가 왔다. 765년 이희옥은 부하들의 지지를 얻어 후희일을 쫓아내고 스스로 절도사 자리에 올랐다. 하극상에 하극상이 이어진 것이다.

 

이정기 통치범위 /동북아역사재단
이정기 통치범위 /동북아역사재단

 

당 조정은 산동반도의 지방정권을 장악한 이희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 황제는 이희옥에게 정기(正己)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하 이정기)

이정기는 후희일과 달리 당 조정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서서히 세력을 키워 황제의 나라 당과 한판 대결을 꿈꾼 것이다.

마침내 이정기의 치청왕국은 당과 전쟁에 돌입했다. 이정기는 절도사 연합군에 가담해 당군과 강회(江淮)에서 대치했다. 결과는 절도사 연합군의 대승이었다. 이정기는 10만 대군을 투입해 대운하가 지나가는 길목을 점령했다. 대운하 장악은 중앙정부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정기는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 나가던 중, 불치의 암에 걸렸다. 그는 아들 이납(李納)에게 지위를 물려 주고 죽었다.

절도사 자리는 황제가 임명하는 것이다. 당 조정이 이납의 절도사 지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납은 당나라와 전투를 벌였다. 78211월 이납은 국호를 제()라 칭하고 왕위에 올랐다. 사실상 독립을 선언한 셈이다. 하지만 이납의 재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도 아버지처럼 지병으로 792년에 죽었다.

그의 아들 이사고(李師古)가 뒤를 이었다. 806년 이사고가 죽자, 이복동생 이사도(李師道)가 계승했다.

 

당나라 11대 황제 헌종(憲宗)은 지방의 군벌(절도사) 세력에 대한 토벌에 나섰다. 807년부터 817년까지 당 헌종은 독립적인 절도사를 공격해 대부분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제 남은 것은 고구려 유민 후손인 치청(淄淸) 절도사 이사도였다.

818년 헌종은 신라에 지원요청을 한다. 신라는 이에 응한다. 819년 나·(羅唐) 연합군이 공격하자 치청 왕국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사도는 배신자에 의해 죽었다. 그리고 이정기와 그위 후손이 지켜온 치청왕국은 멸망하고 당에게 넘어갔다.

헌종은 지방 군벌을 제압한후 곧바로 세상을 떠났다. 환관 왕수징(王守澄)과 진홍지(陳弘志)에게 시해당한 것이다. 향년 43세로, 재위 15년 만이었다. 헌종이 죽자 셋째아들 이항(李恒)이 목종(穆宗)으로 등극한다.

그해(819) 11월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낸다. <삼국사기>엔 이렇게 기록했다.

 

“11,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당나라 목종(穆宗)이 인덕전(麟德殿)에서 사신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풀고 사은품에 차등을 두어 내려주었다.”

 

그래픽=김현민
그래픽=김현민

 

당 황제로선 신라의 3만 병력 파견을 반겼을 것이다. 황제가 직접 나와 사신들을 접대하고 푸짐하게 선물을 내렸다.

하지만 당과 신라의 연합 공격으로, 고구려의 후예가 건설한 치청 왕국은 종말을 고했다. 고구려인들이 건설한 이 왕국은 1대 이정기(765~781) 2대 이납(781~792) 3대 이사고(792~806) 4대 이사도(806~819)4대를 이어갔다. 고구려 멸망 100년후 고구려인 이정기와 그의 후손들은 55년간에 걸쳐 산동반도에서 독립된 국가를 세우고 장안의 당 황제와 대립했다. 고구려 유민의 왕국을 진압하는데 신라가 또 참전한 것이다.

신라가 산동반도에 출병한 사실이 9년후에 장보고가 청해진을 건설해 서해 해상을 장악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파악된다. 당시 만주는 발해가 차지했기 때문에 신라의 3만 군대는 서해 해로를 거쳤을 것이 분명하다. 이미 서해바다는 신라에 의해 장악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신라의 출병이 장보고의 중국내 활동과 후에 해상권 장악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정기 상 /중국 국립박물관 사이트
이정기 상 /중국 국립박물관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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