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아틀라스뉴스
뒤로가기
독서
한 세기전 ‘산호섬’과 대조…허상에 사로잡힌 랠프, 현실주의자 잭
표류소설 ‘파리대왕’에 반영된 대영제국 몰락
2022. 09. 08 by 박차영 기자

 

영국작가 윌리엄 골딩의 장편소설 파리대왕’(1954)과 그에 앞서 출간한 로버트 밸런타인의 산호섬’(1857)을 대조하면 흥미로운 분석을 이끌어 낼수 있다. 파리대왕은 산호섬의 아류작이라 할수 있다. 작가 골딩이 밸런타인의 산호섬을 읽고 아내 앤에게 무인도에 표착한 어린아이들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할지를 써보는게 어떨까하고 의논했다고 한다. 따라서 파리대왕에는 산호섬의 세 주인공 가운데 랠프와 잭이 다시 등장한다. 파리대왕에는 돼지(Piggy)란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켜 세 주인공으로 스토리를 엮어나가는 방식에서도 산호섬을 닯았다는 평가다.

 

파리대왕과 산호섬의 두 표류소설 사이에는 100년에 가까운 시대적 간극이 존재한다.

산호섬이 나온 1850년대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에 승리하고 산업혁명이 불붙은 제국주의 절정의 시기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 캐나다, 호주, 아프리카, 중동의 군주였다. 대영제국은 1·2차 아편전쟁에서 동양의 패권국을 꺾어 만주적 황제의 호화정원이었던 원명원(圓明園)을 짓밟았다. 해가지지 않는 제국은 영원할 것 같았다.

100년후 파리대왕이 나온 시점은 대영제국이 수직으로 꺾여 쇠퇴가 가시화되던 때였다. 인도, 파키스탄, 스리랑카가 독립하고 이집트를 비롯, 아프리카 식민지에선 무장폭동이 일어났고, 유럽에선 소련의 위성국들이 영국의 유럽 주도권을 잠식했다. 이미 대영제국의 세계 패권은 사라졌다. 1·2차 대전을 거치면서 한때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이 서방의 패자로 부상했다. 국내에선 윈스턴 처칠이 물러나고 사회당이 정권을 잡았다. 대영제국이 몰락하는 위기감이 영국인을 사로잡았다.

영국 초판 표지 /위키피디아
영국 초판 표지 /위키피디아

 

산호섬(The Coral Island)은 빅토리아 여왕(재위, 1837~1901) 시절의 대영제국 전성기를 반영한다.

15세 소년 랠프 로버, 18세의 잭 마틴, 14세 피터킨 게이가 태평양의 절해고도 산호섬에 표류해 서로 도우며 즐겁게 지낸다. 어느 날, 원주민 두 부족이 이 섬을 찾아 싸움을 벌인다. 세 소년은 약한 부족을 지원하다가 원주민 여인의 목숨을 구하고, 이를 계기로 원주민 추장과 우호관계를 맺는다. 이번엔 해적선이 나타나 랠프가 잡혀간다. 해적선은 여기저기 원주민들의 섬을 찾아다니며 약탈했다. 랠프는 해적들의 비겁한 계획을 알아내고 원주민을 돕는다. 그 과정에서 소년들은 원주민들에게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소년들은 인육을 먹고 우상을 섬기는 야만인들을 기독교도로 교화시키고,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스토리다.

빅토리아여왕 시절에 영국인은 개인적으로 사략선을 운영하며 독립국을 만들기도 했다. 1842년 보르네오섬 사라와크의 왕좌에 오른 영국인 제임스 브룩(James Brooke)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소설에서처럼 소년 3명이 태평양의 한 섬에서 야만인을 교화시키는 것도 있을법한 얘기다. 산호섬은 아직도 대영제국 시절을 잊지 못하는 영국에서 고등학교의 필독서로 꼽히고 있다고 한다.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기(1952) 영국의 쇠퇴를 반영한다. 책이 출간된 1954년 무렵, 영국은 제국이 몰락하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뭔가 보이지 않은 괴물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식민지의 야만인은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영국인들은 2차대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데 핵전쟁으로 상징되는 3차 대전이 발발할 것이란 공포에 짖눌렸다.

파리대왕은 핵전쟁이 일어나 영국 소년들이 비행기로 후송되던 중에 태평양의 어느 무인도에 불시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산호섬의 여운을 이어가 랠프와 잭이 처음엔 연대한다. 하지만 곧이어 두 주인공 랠프와 잭은 동지에서 적으로 변한다.

흔히 평론가들은 랠프와 잭을 대조하며,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이성주의와 감성주의, 도덕성과 비도덕성의 대결을 비유했다고 지적한다. ‘파리대왕만을 놓고 보면 이런 평론이 옳을수도 있다. 폭을 넓혀 작품이 나올 시기 영국의 상황을 대입하고 다른 작품과 비교한다면 등장인물들을 시대상황에 맞춰 대조해볼수 있다.

랠프는 표류한 소년들의 선거에서 대장으로 선출된다. 랠프와 잭은 서서히 견해 차이를 드러내며 갈등한다. 봉화를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랠프와 산돼지를 잡는게 우선이라는 잭의 대립은 소설이 진행되면서 서서히 격화되어 간다.

 

여기서 랠프는 껍데기만 남은 영국 지도자를 상징한다고 보면 무방하다. 소라는 허위의식을 반영한다. 랠프는 자기도취에 빠져 있는 영국 보수세력과 귀족이다. 민주주의니, 이성이니, 합리주의니 하며 피지배민족을 야만시하던 그들이다. 랠프는 조개껍질에 불과한 소라를 쥐고 권력을 휘두르려 한 무능한 지도자다. 봉화를 올리는 것이 절대선은 아닐 것이다. 잭이 주장하듯 먹고사는 것이 우선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고집했고, 돼지는 무조건 랠프를 지지했다. 돼지는 지성이란 자만에 사로잡혀 있는 무책임한 지식인, 언론인을 상징한다.

무능력한 지도자는 현실주의자의 벽에 부딛친다. 괴물에 대한 공포에 대해서도 아집에 사로잡혀 부정한다. 실제로 추락한 조종사의 시체를 보았을 때 벌벌 떨며 겁을 집어먹은 게 랠프였다. 그런 지도자는 빨리 현실주의자에게 권력을 내주어야 했는데, 돼지라는 겁쟁이 지성인의 부추김을 받는다.

 

소설에서 잭과 그의 무리들을 야만인 또는 오랑캐라고 표현했다. 현실의 세계에서 영국에 반기를 든 아프리카, 아시아 제국의 민족주의자가 오랑캐로 보였을수도 있다. 이집트의 파샤, 인도의 네루, 케냐의 지도자, 말레이시아의 술탄이 그들의 눈엔 오랑캐였을 것이다. 밤새 춤을 추며 축제를 벌이는, 몸에 색칠을 한 야만인이 영국인을 죽이려 몰려들었다.

해골만 남은 멧돼지 머리에 파리가 들꿇었다. 파리대왕으로 상징되는 멧돼지 머리는 사이먼에게 주술을 쏟아낸다. “나 같은 짐승을 너희들이 사냥을 해서 죽일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참 가소로운 일이야. 넌 그것을 일고 있었지? 내가 너희들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아주 가깝고 가까운 일부분이란 말이야. 왜 모든 것이 틀려 먹었는가. 왜 모든 것이 지금처럼 돼 버렸는가 하면 모두 내탓인 거야.”(민음사, 214p)

파리대왕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호하다. 멧돼지 해골은 말한다. “난 너희들에게 경고해 둔다. 나는 조금 화가 나 있어. 알겠니? 너희들은 이곳에 소용없는 인구들이야. 알겠니? 우리는 이 섬에서 재미있게 지내려고 해! 그러니 버릇없는 아이야, 속이려 덤벼들지마! 그렇지 않으면……파리대왕은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너희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을 거야. 알겠어? 잭도 로저도 모리스도 로버트도 빌도 돼지도 랠프도 너흐들 모두. 알겠어?” (215p)

 

윌리엄 골딩 /위키피디아
윌리엄 골딩 /위키피디아

 

사이먼도 죽고, 돼지도 죽고, 소라도 깨진다. 잭의 반란군은 랠프의 조직을 해체한다. 랠프가 멧돼지처럼 사냥의 대상이 된다.

작가는 잭을 비이성, 집단주의의 상징으로 묘사했다. 1950년대 아프리카·아시아의 독립운동지도자들은 무력에 호소했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있었다. 나치, 소련도 집단주의의 상징이었지만 작가가 얼굴에 색칠을 하고 야만인처럼 춤을 추어댄다고 설명한 점에서 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독립세력으로 볼수도 있다.

쌍둥이 샘과 에릭은 기회주의자, 사이먼은 선지자, 로저는 사형집행인을 비유했다. 랠프는 영국 우월주의, 소라는 사라지는 제국주의 허상을 상징하는 듯하다.

작가는 맨마지막을 극적으로 반전시켰다. 억지의 냄새가 짙다. 갑자기 영국 해군이 섬에 상륙해 아이들을 구제한다. 영국 해군을 이끈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잭이 랠프를 잡기 위해 태운 산불의 연기였다. 작가는 랠프의 주장이 옳았다고 주장하고 싶었지만, 끝내 잭의 행동이 구조를 유도했음을 부인하지 못했다.

 

작가 윌리엄 골딩(William Golding)은 쓰러져 가는 영국을 되살리려 안간힘을 다했다. 마지막 장면은 어색하리만치 작가의 의도를 노출했다.

장교는 말하였다. “영국의 소년들이라면…… 너희들은 모두 영국 사람이지?…… 그보다는 더 좋은 광경을 보여줄수가 있었을 텐데. 내 말은……

처음엔 그랬어요.”하고 랠프가 말하였다. “잘 돌아가다가……그는 얘기를 멈췄다. “처음에는합심이 되었어요. 그러다가……

장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뒷받침해 주었다. “알겠다. 처음엔 산호섬에서처럼 잘 지냈단 말이지?” (302p)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