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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오카모토 다카시의 근대기 한중일 관계사…속국과 자주의 모순 전개 서술
“중국의 속방 조선이 일본을 만났을 때”
2023. 06. 11 by 박차영 기자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이란 번역서(2009)의 제목은 출판사가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끌어낸 미끼성이고, 오히려 부제인 글로벌 시대 치열했던 한중일 관계사 400이 내용에 부합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어 원제는 世界のなかの日清韓関係史 交隣と属国、自主と独立”(2008)이다. 저자는 일본에서 인기 있는 동양사학자 오카모토 다카시(岡本隆司)이고, 번역은 강진아교수(한양대)가 했다.

오카모토 다카시 /일본사이트
오카모토 다카시 /일본사이트

 

오카모토 교수는 조선조의 사대와 교린 관계가 근대기에 어떤 격변을 거치며 변화했는지를 16세기에서 러일전쟁까지 400년의 기간에 걸쳐 서술했다. 특히 19세기말 근대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황제의 나라 중국에 사대하고, 이웃 일본에 교린하는 외교원칙을 유지했다. 임진왜란을 전후해 일본에 변화가 일어나고, 중국의 질서가 교체되면서 조선의 사대-교린은 은 왜란과 호란의 전쟁으로 치달았다. 이후 200년간의 평화기를 보낸 후, 서양세력이 아시아에 진출하고 일본이 근대화하며 중국이 흔들리는 가운데 중국의 속방이었던 조선은 격변을 맞게 된다.

국수주의 관점의 저술이 서점가를 점령한 국내에서 일본인의 근대기 해석은 독특하다. 저자는 스스로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했다고 서문에서 말했다. 한국 사학자들의 관점에 익숙해 있던 국내 독자들에게 이 책은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조선은 이렇게도 무기력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의 속방에 안주하려는 사대주의자들이 나라를 지키고 치안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방어력도 갖지 못한채 동북아에 흐르는 풍랑에 흔들리다 부력을 잃고 나라를 침몰하고 말았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외교관계는 안보를 전제로 한다. 작은 소요도 진압할 힘이 없던 조선이 수백명의 외국군에 의해 좌충우돌하는 모습이 우리의 근대사다.

오카모토는 청나라와 일본의 역학관계의 변화 사이에 무기력한 조선이 어떻게 속방에서 자주를 찾으려 했는지를 설명한다. 청은 조선의 속방을 유지하려 했고, 일본은 조선의 자주를 확대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일본이 말하는 자주는 조선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소거하는 것을 말한다. 그 빈공간을 자기들이 차지하려는 것이었다.

 

오카야마 교수는 속국자주라는 표현을 썼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1894~5년 청일전쟁까지 20년 남짓한 기간의 조선의 외교적 위치를 규정한 용어다. 청국이 조공국을 속국으로 확인하면서도 대외적으로 자주를 보장했다는 것이다. 이 모순적인 두 개념으로 저자는 20년간 굴곡의 조선말 역사를 설명해 나갔다.

저자는 1896211일 아관파천 직후 총리대신 김홍집이 경복궁 앞에서 군중에 에워싸여 타살되는 장면에서 화두를 이끌어냈다. 오카모토의 해석에 따르면 김홍집은 친일주의자가 아닌, 친청파임에도 일본이 요구한 개혁을 받아들여 왕권을 약화시켰다는 이유로 고종의 미움을 받았다. 김홍집의 죽음은 국왕과 총리의 개인관계에서 해답을 얻을 문제가 아니며, 중국과 일본, 나아가 동아시아의 역사적 동향에서 답을 구해야 한다고 저자는 지적했다. 책의 주요 대목을 정리한다.

 

책 표지 /출판사
책 표지 /출판사

 

신숙주는 1443년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저술한 해동제국기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습성은 굳세고 사나우며 칼과 창을 잘 쓰고 배의 조정에도 능숙하다. 우리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바라보고 있다. 그들을 달래는데 도를 얻으면 조빙(朝聘, 내조)을 갖추지만, 그 도를 잃어버리면 함부로 노략질 한다.”

신숙주는 일본을 잘 달래 위협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후세에 조언했다. 하지만 신숙주 이후 조선은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지 않고 일본의 정세에 어둡게 되었다. 그러다 16세기말에 도요토미의 침공을 당한 것이다.

병자호란은 청의 단순한 조선 출병이 아니다. 조선이 버리려고 하지 않았던 사대 관계, 나아가 명이 고집해온 질서체계를 바꾸려고 한 도전이었다. 홍타이지는 정묘호란 단계에서 조선을 복속시켰다고 생각했다. 정묘호란에서 맺어진 형제관계에 대해 조선은 과거의 교린관계라고 생각했다. 이 사고로 인해 조선은 청의 황제즉위식을 부정하게 되었고, 청은 조선의 사고를 바꾸기 위해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메이지 유신(1868)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서계(書契, 국서) 문제가 발생했다. 일본은 젇치체제를 새로이 하고 대외관계를 재편하려 했고, 조선은 예전의 관계를 계속 지키려 했다. 결국 일본이 군함으로 무력시위를 일으켜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를 체결했다.

1874년 일본의 대만 출병은 청나라 지도부에게 카다란 충격이었다. 청의 입장에선 일본이 양국 소속의 방토를 침범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청릴수호조규를 위반한 것이다. 청은 대만 출병 이후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이에 청은 조선에 일본의 동정을 알려주었고, 조선 조정이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일본과 교섭을 개시하게 되었다.

1879년 일본의 류큐 처분은 청국에겐 속방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었다. 청은 다른 나라와도 종번 관계가 소멸될 것을 우려하며 조선에게 서방 각국과 조약을 체결하도록 유도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관계가 속국자주. 조선은 실질적으로 청의 속방이지만, 겉으로는 자주국 행세를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황준헌의 조선책략도 청국의 이런 기조에서 나온 것이다.

청나라가 조선에 미국과의 수교를 주선해준 이후 속국임을 강조하기 위해 18825월에 마건충(馬建忠)을 조선에 파견했다. 청은 조미수호조약에 조선이 속방임을 명시하려 했으나, 미국 로버트 슈펠트 대사의 거부로 조약 1조에 조선은 자주국이라고 명시되었다. 마건충은 타협책으로 조선 국왕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조선이 청국의 속방임을 분명히 하는 친서를 보내도록 했다. 고종은 미국은 물론 그후 영국, 독일 등 서양국과의 수교에 청의 속방임을 확인하는 친서 형식의 조회(照會)를 보냈다.

임오군란(1882) 이후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속방 정책이 강화되었다. 청은 조선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했다. 청이 조약이라 표현하지 않고 장정이라고 한 것은 종주국과 속국의 행정적 결정사항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장정의 전문에 조선은 청의 속국이다고 명기되어 있다. 이후 청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조선에 대한 속방화를 강화했다.

갑신정변(1884)는 청의 속방화에 대한 개혁파의 도전이었다. 청군이 정변세력을 진압한 이후 위안스카이의 독주가 전개되었다.

청은 조선에 미국인 변호사 데니를 고문으로 파견했는데, 오웬 데니는 청의 의도와는 달리 조선의 자주성을 지지했다. 데니는 청한론에서 조공 관계는 주권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따라서 조선의 공납은 조선의 독립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조선이 청의 조공국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독립국이라는 것이다. 청국이 조선에 파견한 또다른 정치고문이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러시아와의 협상을 주선했다.

동학혁명(1894)이 일어나자 조선은 청에 병력지원을 요청했다. 갑신정변 이후 체결한 천진조약에서 청일 군대는 조선에서 철병하되, 중대한 변란이 일어나 청일의 출병이 필요할 때 사전에 이를 서로에게 통지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청은 일본에 통지했고, 일본은 이를 출병의 명분으로 삼았다. 결국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에서 청은 일본에 패했다. 이로써 조선에 대한 청의 속방관계가 끊어졌다.

 

오카모토는 조선의 주체성에 관해서는 거의 서술하지 않았다. 기실, 조선은 주체적 동력이 없었다. 군부 반란과 민란도 진압하지 못해 외국에 군대를 요청하는 나라였다. 국력이 없는 상태에서 조선은 사대와 교린이라는 외교관계로 동아시아의 격랑을 헤처나가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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