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시마 번의 국서위조사건
쓰시마 번의 국서위조사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6.10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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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측이 쇼군 호칭 위조, 막부가 현상유지…메이지유신 이후 혼선

 

임진왜란이 끝난지 11년째 되는 1609, 조선과 일본은 기유약조(己酉約條)를 맺고 무역을 재개했다.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무역 및 통교 권한을 쓰시마 번에 위임했다. 쓰시마 번은 정치적으로는 일본에 속해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조선의 영향 하에 있었다. 쓰시마는 경지가 부족해 조선과의 중계무역으로 생계를 잇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자 하루라도 빨리 조선과의 무역회복을 바라고 있었다.

조선은 국가 대 국가의 국서 교환에 국왕의 상대도 국왕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천황은 허수아비였고, 실권자는 쇼군(將軍)이었다. 일본은 쇼군을 국왕이라고 표현하면 천황에 대해서는 불경스럽고, 중국 황제에 대해서는 비굴하게 보인다는 이유로 그냥 쇼군으로 표기하겠다고 했다.

쓰시마 번주가 잔꾀를 냈다. 쓰시마 번주는 양국 사이에 오가는 국서를 위조했다. 한번 위조한 것이 버릇이 되어 다음 번에도 또 위조하고, 그렇게 계속되었다. 쓰시마 번주와 관련자들만 입을 다물면 영원히 묻힐 사안이었다.

그런데 일이 터지고 말았다. 쓰시마 번주 소 요시나리(宗義成)의 가로(家老, 가신)였던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가 독립해 쓰시마 번주와 대등한 위치에 올라섰다. 야나가와는 막부의 하타모토로 승격하기 위해 옛 번주의 비밀을 폭로했다. 이로써 쓰시마 번의 국서 위조사건을 막부가 알게 되었다. 이 사건을 야나가와 잇켄(柳川一件), 즉 야나가와 사건이라고 부른다.

 

막부는 고민을 했다. 쓰시마 번주가 국서를 위조한 것은 반역 행위였다. 하지만 가신이 주인을 무는 것을 인정한다면 하극상이 만연하게 되고 세상이 혼란해지게 된다. 막부의 선택은 현상유지였다.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徳川家光)는 소 요시나리에게 무죄를 선언하고, 고발한 야나가와 시게오키를 오히려 쓰가루로 유배를 보냈다. 야나가와의 의도와 달리 막부는 조선과의 관계를 쓰시마 번에 위임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이후 일상적인 한일 무역은 쓰시마 번이 담당하고, 조선통신사와 같은 국가 단위의 업무는 막부가 직접 담당하는 것으로 조율이 되었다.

야나가와 사건 후, 막부는 국서에 기재된 쇼군의 칭호를 일본국왕에서 일본국 대군(大君으로 바꾸었다. 대군이란 표현은 양국을 만족시켰다. 조선에서 대군은 국왕의 신하를 의미하는데 비해 일본에서 대군은 제후의 장이란 의미를 가졌다. 서로 의미를 달리하며 통상이 이뤄졌다.

 

소 요시나리 /위키피디아
소 요시나리 /위키피디아

 

조선과 일본의 현상유지는 200년 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두 나라의 위계질서가 바뀌는 날 혼란이 올 것임을 예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에도 막부의 주자학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국서에서 양국 통치자의 호칭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일본에서는 천황과 막부라는 이원적 정치체제가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일본의 쇼군을 일본국왕으로 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실학파 대부 이원익(李元翼)만약 이인(夷人)이 천황을 옹립하여 제후에 호령시킨다면 상대쪽의 원수는 황()이 되고 이쪽은 왕()이 되니, 이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원익이 우려하던 상황이 벌어졌다.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도쿠가와 쇼군이 타도되고 천황이 주권자가 되었다. 조선은 국왕 체제를 유지하는데 비해 일본은 황제급 국가가 되었다. 군주의 급이 달라졌다. 대원군이 국경을 봉쇄하고 양이와 수교를 거부할 때엔 문제가 되지 않았다. 1873년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한일 양국간에 서계(書契) 문제가 외교문제로 부상했다.

서계는 국서를 말한다. 일본은 정치 체제를 새로이 하고 대외관계를 재편하려고 했고, 조선은 예전의 관계를 지키려 했다. 일본이 서계에 갑자기 천황을 지칭하며 들이밀자, 조선은 중국 황제 이와에 다른 황제를 인정할수 없다며 일본의 서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이 군함으로 밀어붙이자 조선은 1876년 일본과 협상을 벌이게 되었다. 강화도에서 벌어진 협상에서 마지막까지 두 나라를 괴롭힌 것은 양국 군주의 호칭 문제였다. 일본에서 마련한 조약문 초안의 전문에는 대일본제국 황제폐하와 조선국왕 전하께서는이라고 되어 있었다. 조선은 이 대목을 완강히 거부했다. 결국 양국은 군주의 호칭을 빼고 대일본국과 대조선국은이라는 표현으로 조약의 주체를 표시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柳川一件

오카모토 다카시,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 소와당, 강진아 번역,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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