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아틀라스뉴스
뒤로가기
무역의 시대
포르투갈에서 영국으로 독점권 이전…1천2백만 아프리카인, 아메리카로 끌려가
노예무역에 나선 유럽인들…설탕에 녹은 피
2019. 07. 27 by 김현민 기자

 

노예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했다. 메소포타미아의 함무라비 법전에서 노예가 등장하고, 고대 로마제국은 노예제 국가였다. 동양에서도 전쟁 포로나 기아로 인해 굶주린 사람들이 노예로 전랙했다. 전쟁이 노예를 양산했고, 종교가 지배한 사회에선 이교도를 노예화했다.

16세기 유럽인에 의해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인간을 상품화하는 노예무역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16~19세기 사이 4세기에 걸쳐 유럽인에 의해 저질러진 노예무역은 그들에게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 주었지만,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에 극심한 인종문제를 낳았고, 아프리카에 민족주의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인에 앞서 아프리카인을 노예화한 것은 이슬람교도들이었다. 아라비아 반도의 이슬람들은 9세기부터 아프리카 동부 잔지바르(Zanzibar) 등을 점령해 1천년 동안 아프리카인들을 이슬람의 노예로 만들었다.

유럽인들 가운데 처음 노예무역에 나선 것은 포르투갈인이었다. 포르투갈인들은 1502년 아프리카 동부 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s)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부족장들의 협력을 얻어 노예 무역에 나섰다.

포르투갈인들이 노예를 아메리카 대륙으로 처음 보낸 것은 1526년이었다. 포르투갈은 브라질 식민지에서 파우브라질(Pau-Brasil)이란 나무에서 염색제를 발견했는데, 이를 채취할 인력을 찾지 못했다. 현지 투피족은 무계급 사회였고, 돈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식민자들이 현지에서 노예를 구했지만, 투피족은 목숨을 걸고 도망치는 바람에 아프리카에서 노동력을 수입키로 했다. 아프리카인들은 같은 열대지방 출신이어서 브라질의 기후에 적응하기 쉬웠고, 일을 잘했다. 이후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서 남아메리카로 싣고 갔고, 스페인도 경쟁적으로 노예무역에 참여했다.

 

포르투갈인들이 콩고 왕국에서 노예를 거래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포르투갈인들이 콩고 왕국에서 노예를 거래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공급한 자는 현지 부족장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콩고 왕국이다. 이 흑인왕국은 전쟁을 벌여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전쟁 포로와 피정복민들을 포르투갈에 팔아넘겼다.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노예구매를 독점하는 가운데 프랑스도 뛰어들었지만, 콩고왕국이 프랑스선박을 나포하는 일이 벌어졌다. 1580년 포르투갈이 스페인왕국에 합병되면서 노예 무역은 스페인이 주도하게 되었다.

하지만 1640년 교황이 노예무역을 금지하면서 카톨릭국가였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노예무역에서 손을 떼고, 신교국가였던 영국이 17세기에 본격적으로 노예무역에 뛰어든다.

노예 연구자들에 따르면, 16세기 이전에 거래된 노예 수는 전체의 3%에 불과했으나, 17세기에 16%로 급증했고, 18세기에 절반이 넘었으며, 19세기에 28.5%를 차지했다고 파악된다.

노예무역에 참여한 나라는 포르트갈, 스페인,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현재 인권이 가장 잘 보장되었다는 서유럽국가들이었다. 400년간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보내진 노예는 1,200만명~1,28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많이 보는 연구자는 2,000만명으로 보기도 한다.

영국의 지리학자 토머스 키친(Thomas Kitchin)에 따르면, 1778년 무렵에 영국이 카리브해에 보낸 노예가 매년 52,000명이 되었으며, 프랑스는 매년 13,000명의 노예를 팔았다고 한다. 아프리카 노예 무역은 18세기 마지막 20년 동안에 정점에 달했는데, 그 때가 콩고왕국에 내전이 벌어져 전쟁 포로들이 대량으로 아메리카로 이동했다고 한다.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끌고간 선박은 열악했다. 좁은 선실에 흑인들을 차곡차곡 재서 가득 싣고 항해하는 도중에 사망률도 높았다. 죽은 노예는 바다에 버렸다. 학자들에 따라 견해를 달리하는데, 120~240만명이 대서양을 건너는 과정에서 질병등으로 숨졌다고 한다.

 

1788년 영국의 노예무역선의 노예선적 /위키피디아
1788년 영국의 노예무역선의 노예선적 /위키피디아

 

이처럼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끌려간 것은 유럽인들의 탐욕과 고급화된 취향 때문이었다.

설탕은 인도에서 생산되어 육로로 유럽에 전해졌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를 공격하면서 설탕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대항해 시기에 유럽인들은 카리브해와 남아메리카 열대지역이 사탕수수 재배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탕수수는 키가 4m나 되는데, 이를 베어 공장에 운반하고 분쇄한 다음 롤러로 압측해 즙을 얻는다. 이것을 다시 큰 솥에 오랫동안 정제한다. 이 과정에 엄청난 연료가 필요하므로 주변에서 나무를 베어 와야 한다. 설탕을 제조하는 과정에 대량의 일손이 필요했는데, 그 노동력이 아프리카에서 공급된 것이다.

단맛을 알게 된 유럽에서 설탕의 수요는 크게 증가했다. 설탕산업은 자본주의 발전에 산파역을 함과 동시에 노예무역을 일으킨 장본이기도 했다. 아메리카에서 설탕이 대거 수입되면서 영국인의 1인당 설탕 소비량이 16세기초에 500g에서 17세기에는 2kg, 18세기에는 7kg으로 급증했다. 유럽인들은 설탕은 귀중품에서 사치품, 생활필수품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만큼 노예의 피와 땀이 유럽인들의 입맛을 돋우었던 것이다.

 

노예시장으로 끌려가는 아프리카인들 /위키피디아
노예시장으로 끌려가는 아프리카인들 /위키피디아

 

1713년 스페인왕위계승전 이후 체결된 유트레히트 조약에서 영국은 스페인이 갖고 있던 아시엔토(Asiento)라 불리던 노예무역독점권을 확보하게 된다. 에에 영국은 향후 30년 동안 114,000명의 노예를 스페인 식민지였던 포르트베로, 베라크루스 등의 노예시장에 공급하게 되었다. 영국 정부는 이 특권을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에 주는데, 이것이 후에 투기과열을 초래해 거품붕괴사건으로 이어진다.

영국인 무역상들은 대서양에서 삼각무역을 개발했다. 영국에서 만든 총기, , 유리제품, 직물을 아프리카 부족에게 팔고, 현지에서 노예를 샀다. 이 노예를 아메리카 대륙에 데리고 가 팔아 설탕과 면화, 담배, 커피등을 사서 영국으로 가져왔다.

 

노예들은 대부분 서아프리카에서 잡혔다. 유럽인들이 직접 노예사냥에 나서지는 않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의 풍토병을 이길 약품을 구하지 못해 대륙에 진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아프리카의 현지 부족들이 다른 종족의 흑인들을 잡아 유럽인들에게 팔았다. 아프리카의 왕국 또는 부족들은 노예들을 줄줄이 세워 나무 족쇄로 채워 해안가로 데려갔고, 해안에는 유럽의 노예무역상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안에 도착한 노예들은 나무 우리에 갇혔다. 노예들은 길게는 몇 달동안 배가 올때까지 우리에서 기다려야 했다. 건장한 남자가 대부분이었지만, 여자와 아이들도 있었다. 배가 도착하면 어느 해안출신인지를 표시하기 위해 노예의 몸에 낙인을 찍은 다음에 배에 몰아 넣었다. 그리고 노예들을 배에 가득채워 아메리카로 데려갔다. 이동하는 과정에서 많은 노예가 죽어 나갔다.

아메리카에 도착한 노예들에게 노예주들은 처음 며칠간 아무일도 시키지 않고 배가 터지도록 먹였다. 원기가 회복한 노예들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노예무역선 (by Auguste François Biard) /위키피디아
노예무역선 (by Auguste François Biard) /위키피디아

 

그들은 설탕농장에 대부분 끌려갔으며, 면화, 담배, 커피 농장에도 배치되었다. 노예주들은 초기에 1인당 2~5파운드에 노예를 사, 팔때는 25~35 파운드에 팔아 폭리를 취했다. 당시 노예 값이 말 가격의 30분의1이었다고 한다. 그후 노예 부족현상이 발생하면서 노예 가격이 상승했다.

노예들은 새벽 3시부터 일터에 나가 하루에 17시간 살인적 노동에 혹사당했다. 이들의 노역이 유럽인들 입에 맞는 설탕과 담배, 커피를 만들었다.

노예무역이 한창이던 1770년대에 영국의 노예무역선은 190척이 되었다고 한다. 영국인들은 노예를 검은 화물, 설탕을 흰 화물이라 부르며, 돈벌이를 했고, 그렇게 해서 번 돈이 영국 자본주의를 형성하는 밑거름이 된 것은 분명하다.

 

아프리카 노예들이 주로 끌려간 지역. /위키피디아
아프리카 노예들이 주로 끌려간 지역. /위키피디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