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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의 시대
1757년부터 1857년까지 인도 대부분 지역 영토화…본업보다 세금 징수에 주력
동인도회사 군대의 진격…100년간 인도 정복
2019. 08. 23 by 김현민 기자

 

인도를 식민화한 무력은 영국의 정규군이 아니라, 동인도회사의 군대였다. 주식회사가 군대를 보유하는 것을 현대적 개념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땐 그랬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군대를 보유하기 시작한 것은 1600년 창립 초기부터였다. 이때만 해도 수백명 정도 병력을 보유하며 인도내 무역 거점에 경비를 서는 수준이었다. 동인도회사 군대가 급증한 계기는 1757년 플라시 전투 전후였다. 175026,000, 177867,000명으로 늘어났고, 1857년 세포이 항쟁 때에는 무려 28만명으로 늘어났다.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1857년 세포이 항쟁까지 정확하게 100년 동안 동인도회사는 군대를 동원해 인도 각지를 점령해 들어갔다. 회사는 이 기간에 무역업이라는 본업보다는 영토 확장에 주력했다. 장사를 해서 이윤을 남기는 것보다 영토를 늘려 세금을 더 걷어내는 것이 더 큰 이익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되었다.

1700년 이후 인도의 무굴제국은 급격히 약화하며 각지의 제후들이 왕국을 건설했다. 회사는 인도의 분열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서로를 이간질시키고, 왕위 계승전에 참여해 왕국을 집어삼켰다. 대항하는 왕국은 점령해 직영하고, 미리 항복하는 왕국은 보호국으로 삼았다. 1947815일 인도와 파키스탄이 독립할 때 영국령 인도에는 직할령과 보호령, 위성국등 500개 이상의 나라로 분리되어 있었다. 철저하게 분할 통치(divide and rule)를 한 것이다.

 

동인도회사의 영토(1765, 1805년). 붉은 색 부분. /위키피디아
동인도회사의 영토(1765, 1805년). 붉은 색 부분. /위키피디아

 

동인도회사는 인도인 용병을 고용했다. 이를 세포이(sepoy)라 불렀다. 세포이 고용은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가 플라시 전투를 치르면서 채용한 것이 최초였다. 그후 세포이는 동인도회사군의 주력이 되었다.

동인도회사 군대는 벵골, 마드라스, 봄베이에 세 개의 부대를 두고 별도로 운영되었으며, 보병, 기병, 포병으로 구성되었다. 해군을 별도로 두어 함대를 운영했다.

세포이는 동인도회사가 고용한 병사였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영국정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들은 힌두교와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에서 채용되었고, 봉급 받는 조건으로 동족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 전투에서 실적을 올린 세포이는 계급이 상승되었고, 봉급도 많이 주었다.

세포이를 지휘하는 장교는 영국인이었다. 동인도회사 군대의 장교수는 1763114명에서 1769500, 1784년에는 1,069명으로 불어났다. 장교 수가 늘어나면서 회사는 사관학교(Addiscombe Military Seminary)도 세웠다. 영국인 장교들은 세포이 하사관, 병사들을 이끌고 인도 전역으로 정복전쟁에 나서게 된다.

 

동인도회사의 영토(1837, 1857년). 붉은 색 부분. /위키피디아
동인도회사의 영토(1837, 1857년). 붉은 색 부분. /위키피디아

 

돈 벌이 하는 회사가 정복 전쟁을 벌인 이유는 세금을 이익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플라시, 북사르 전투 이후 벵골, 비하르, 오리사 세 지역의 징세권을 얻어 걷은 연간 세수가 회사 한해 매출액이 나온 것을 보고, 동인도회사는 인도 자체가 돈이 된다고 파악하게 되었다. 회사는 군대가 돈을 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 영토를 얻어 세금을 걷고, 또다른 영토를 늘리면서 동인도회사는 본업을 잊은 채 정복전쟁에 매진하게 된다. 약탈만큼 손쉬운 벌이도 없다. 힘들게 노동하지 않고 남이 일해 생산한 것을 빼앗으면 된다. 동인도회사는 1757년부터 1857년까지 100년간 약탈자로 둔갑하게 된다.

동인도회사가 벌인 전쟁은 나열하기도 힘들다. 소소한 약탈행위는 전쟁이라 이름하기도 힘들고, 굵직한 전쟁으로 마이소르 전쟁, 로힐라 전쟁, 마라타 전쟁, 구르카 전쟁 등을 들수 있다.

 

마이소르 왕국 영토 /위키피디아
마이소르 왕국 영토 /위키피디아

 

18세기 중엽, 인도 남부는 무굴 제국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동인도회사의 입장에서는 왕국을 하나씩 먹어 치우기에 좋은 여건히 형성된 것이다.

첫 번째 타깃이 마이소르(Mysore)였다. 데칸 고원에 있는 이 왕국은 하이데르 알리(Hyder Ali, 재위 1761~1782)와 그의 아들 티푸(Tipu, 재위 1782~1799)가 술탄이었을 때 전성기를 구가했다.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인도의 여러 왕국들 가운데 경제력이 가장 높았고, 농업과 섬유산업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알리와 티푸는 영국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었고, 여러 왕국에 연락을 취해 연합을 모색하고, 해군력도 증강시켜 동인도회사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동인도회사는 마이소르에 대해 1767~69, 1780~84, 1790~92, 1798~99년 사이에 네차례나 전쟁을 벌였다. 마이소르군은 한때 영국 무역기지인 마드라스를 함락하기 직전까지 갔고, 로켓까지 개발해 동인도회사 군대를 위협했다.

 

마이소르의 로켓이 동인도회사군에 딸어진 그림 /위키피디아
마이소르의 로켓이 동인도회사군에 딸어진 그림 /위키피디아

 

마이소르 로켓은 철제 포신에서 발사되었는데, 사거리 2km에 화력도 뛰어났다. 당시 유럽에도 로켓이 있었으나, 사거리나 성능 면에서 마이소르의 것에 미치지 못했다. 마이소르는 1,200명의 로켓 부대까지 운영했고, 이 로켓 부대로 영국군에 굴욕적인 패배를 안기기도 했다. 후에 영국군이 이 로켓을 가져가 1805년 콩그레브 로켓(Congreve rocket)을 개발해 나폴레옹 전쟁에 활용했다.

하지만 마이소르는 협력을 기대한 왕국들이 동인도회사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소극적으로 대응한데다 급격하게 불어난 동인도회사 군대에 의해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다. 마이소르 영토의 일부는 영국에 협조한 하이데라바드와 마라타에 병합되고, 나머지 부분은 옛 힌두 왕가 일족에게 주어졌다. 마이소르에는 영국군이 주둔하고, 외교권이 박탈되는 등 왕국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위성국으로 전락했다.

 

제2차 마라타 전쟁(그림) /위키피디아
제2차 마라타 전쟁(그림) /위키피디아

 

마라타는 제국(Maratha Empire)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인도 중앙부를 차지한 거대한 왕국이었다. 동인도회사와의 전쟁은 왕권 다툼에서 시작되었다.

1772년 국왕 마드하브라오(Madhavrao Peshwa)가 사망하자 그의 동생인 나라얀라오( Narayanrao)가 왕위를 이어벋았다. 그런데 그의 삼촌 라그후나스라오(Raghunathrao)가 나라얀라오를 암살하고 자신이 왕으로 등극했다. 그런데 죽은 나라얀라오의 왕비가 아기를 출산했는데, 12명의 지방 제후들이 이 아기가 왕실의 혈통이라고 주장하면서 라그후나스라오가 폐위되었다. 왕위에서 물러난 그는 봄베이 소재 동인도 회사와 1777년에 협정을 체결했는데, 이 협정에는 동인도회사가 라그후나스라오에게 2,500명의 군대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수랏(Surat)락과 바루흐(Bharuch)지역의 징세권을 양도하고 살세트(Salsette)와 버세인(Bassein) 지역을 할양하는 내용이 담겼다. 캘커타에 있는 동인도회사 위원회는 폐위된 국왕과의 협정이 무효라고 주장했지만, 봄베이 측은 협정을 근거로 군사행동을 취했다.

1777년부터 동인도회사는 군대를 투입했는데, 초기 전투에서 숫적으로 우세한 마라타군에 패배하는 굴욕을 당했다. 하지만 동인도회사는 군대를 보강해 1781년 승리했다. 동인도회사는 마라타 왕국의 서쪽 영토를 빼앗는 것으로 1차 전쟁은 막을 내렸다.

동인도회사와 마라타 왕국은 그후에도 1803~1805년에 2차 전쟁, 1817~1818년에 3차 전쟁을 치렀다. 세차례의 마라타 전쟁을 거치면서 동인도회사는 인도 중부의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다. 국왕(페사와)은 추방되었고, 나라는 작은 제후국으로 쪼개져 동인도회사 봄베이 관구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마라타 제국 영토 /위키피디아
마라타 제국과 마이소르 왕국의 영토 /위키피디아

 

로힐라 전쟁(Rohilla War)은 동인도회사가 자신에게 우호적인 왕국을 지원한 전쟁이다. 히말라야 기슭, 갠지스강 상류의 비옥한 지역에 로힐칸드(Rohilkhand)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이 나라는 마라타 왕국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로힐칸드는 북인도의 아우드(Oudh)의 나와브와 협정을 맺어 마라타족을 격퇴하는 보상으로 400만 루피를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로힐캍드는 마라타를 격퇴한 후에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우드는 동인도회사의 지원을 얻어 로힐라를 침공해 병합시켰다.

구르카 전쟁은 네팔 전쟁이라고도 한다. 구르카(Gurkha)는 네팔의 또다른 이름인데, 네팔이 인도북부를 공격하자 동인도회사군이 네팔을 공격해 히말라야산맥 쪽으로 밀어붙여 경계선을 그었다. 동인도회사는 네팔군의 전투력을 인정해 후에 구르카 병사를 비정규군을 활용했다.

 

1857년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기 이전까지 동인도회사는 영국에 우호적인 아우드(Oudh), 라지푸타나(Rajputana), 펀잡(Punjab)을 제외하고, 인도 대부분을 점령하게 된다. 무굴제국 황제는 동인도회사로부터 조그마한 땅을 얻어 연금생활자로 축소되었다. 19세기 중엽,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아시아에서 지정학적으로 강력한 패권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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