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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에서 출발…북극성과 태양 이용해 정남-정북 방향으로 항해
15세기 해양탐험가 김한경②…요도탐색대
2023. 01. 09 by 이효웅 해양탐험가

 

[에서 계속] 14769월의 4차 항해는, 김한경 등 12(김자주, 송영로, 김흥, 이오을망 등)이 관찰사의 명으로 5척의 배로 요도탐색대를 만들어 무릉도 북쪽에 소문난 요도나 삼봉도를 찾으러 떠났다. 탐색대의 항로는 916, 경성에서 북쪽으로 올라가서 경원 말응대진에서 정남항해를 하여 무릉도에 도착하였다. 이 항로는 동해에서 가장 긴 항로(울릉도 530km, 독도 620km)로 순풍항해만 할 수 없다. 4일간의 지친 항해로 피곤하였지만, 김자주의 공초에 울릉도 북동쪽의 삼선암과 관음도, 죽도, 강치 등의 모습을 처음 본 것처럼 기록하여 김한경은 전에 독도 삼봉도에 왔다 갔을 가능성이 있다.

 

[요도탐색대 항해 1]

14769, 영흥(永興)의 김자주(金自周)는 김한경과 같이 삼봉도(무릉도)를 가 보고 그 모양을 그려 와서 바치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경성(鏡城) 바닷가에서 배를 타고 4() 3()를 가니, 섬이 우뚝하게 보이고, 30여 명의 사람이 섬 입구에 벌려 섰는데 연기가 났습니다. 그 사람들은 흰옷을 입었는데, 얼굴은 멀리서 보았기 때문에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대개는 조선 사람이었는데, 붙잡힐까 두려워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주1)

 

이 기사는 [요도탐색대 항해 2]를 작성하기 전에 삼봉도 도형을 그려 와서 임금에게 직접 바치면서 멀리서 보니 30여 명이 섬 입구에 섰는데, 연기가 나고 흰옷을 입었다.”고 하였다. 요도탐색대는 <그림 3>과 같이 울릉도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서서히 항해하면서 관음도와 죽도를 지나 와달리 해변의 갯바위에 있는 강치들의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남쪽으로 항해하였으므로 역광 상태여서 강치들이 흰옷을 입은 사람처럼 보였고, 가을철(음력 925) 추운 날씨로 강치들의 입김이 연기로 보였다고 추정한다.

 

[요도탐색대 항해 2]

김자주는 김한경과 같이 14769, 삼봉도(무릉도)를 가 보고 그 모양을 그려 와서 바치고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김자주는 1476916일에 경성 땅 옹구미(甕仇未)에서 배를 출발하여, 섬으로 향해 같은 날 부령(富寧) 땅 청암(靑巖)에 도착하여 자고, 17일에 회령 땅 가린곶(加隣串)에 도착하여 잤으며, 18일에는 경원 땅 말응대(末應大)에 도착하여 잤고, 25일에 섬 서쪽 7, 8리 남짓한 거리에 정박하고 바라보니,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벌려 섰고, 다음은 작은 섬, 다음은 암석이 벌여 섰으며, 다음은 복판 섬이고, 복판 섬 서쪽에 또 작은 섬이 있는데, 다 바닷물이 통합니다. 또 바다 섬 사이에는 인형 같은 것이 별도로 선 것이 30개나 되므로 의심이 나고 두려워서 곧바로 갈 수가 없어 섬 모양을 그려 왔습니다.주2)

 

요도탐색대의 영안도 항로를 살펴보면, 경성(옹구미), 부령(청암), 회령(가린곶), 경원(말응대진)이다. 경성의 옹구미는 대동여지도에는 없는 지명이지만 경성에서 옹기를 닮은 항구는 오늘날의 경성 어대진이 가장 유사한 지형이다. 그리고 부령의 청암은 오늘날 청진항이며, 회령의 가린곶은 대동여지도에 가린단(加鱗端)이 있으며, 경원의 말응대진은 북쪽에서 가장 크고 좋은 항구인 오늘날의 라진항으로 추정된다.

항해거리를 살펴보면, 옹구미(어대진)에서 청암까지 약 45km, 청암에서 가린곶까지 약 45km, 가린곶에서 말응대진(나진항)까지 약 33km이므로 옹구미에서 말응대진까지는 약 123km정도 된다. 말응대진에서 울릉도까지 530km(286해리, 174.5°), 독도까지 570km(308해리, 166°)이다. 왕복 1,300km1,500km의 여정이다.

요도탐색대는 무릉도 북동쪽 7, 8리 도착하여 세 바위(삼선암)를 바라보고, 작은 섬(관음도)을 지나 암석이 벌려 섰으며(와달리 절벽), 다음은 복판 섬(죽도), 복판 섬 서쪽에 작은 섬(북저바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복판 섬(죽도)에서 와달리 절벽 아래 가까이 오니 갯바위에 있는 인형(강치)주3) 30개를 발견하였다. 지친 항해로 섬 가까이 오니 이상한 사람들이 보이므로 겁이 나서 상륙을 못하고 섬 모양을 그려서 왔다. 김자주와 김한경 일행은 인형(강치) 30개를 헤아릴 정도로 가까이 왔으나 강치를 처음 보아서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별하지 못하였다.주4)

 

당시의 항해 방법을 추측해 보면, 경성에서 더 북쪽으로 올라간 것은 동해상의 이정표인 울릉도(성인봉 986m)를 향하여 북극성과 태양을 이용한 정남 및 정북항해를 하기 위해서였다. 나침반이 없던 시절에는 천문항해가 기본으로 과거의 선두들은 천문 및 기상 등에 박식하였다. 태양의 고도는 매일 조금씩 바뀌지만 북극성은 변하지 않으므로 북극성항해를 하여 귀향하였다.

김자주 일행은 919일 경원에서 도착하여 말응대진에서 항해 준비와 바람을 기다렸다가 922일 출항하여 43주5)를 항해하여 925일에 무릉도(울릉도)에 도착하였으나 입도를 못하고 복판섬(죽도)를 돌아 귀향하였다.

 

(그림 2) 요도탐색대 영안도 항로 /그래픽=이효웅
(그림 2) 요도탐색대 영안도 항로 /그래픽=이효웅
(그림 3) 요도탐색대 울릉도 항로 /그래픽=이효웅
(그림 3) 요도탐색대 울릉도 항로 /그래픽=이효웅

 

1479, 영사(領事) 김국광(金國光)은 임금에게, “사적(史籍)을 찾아보건대, 비록 삼봉도라 하는 것은 있지 않았습니다만, 그러나 그 백성이 반드시 해상을 왕래하며, 섬에 세 봉우리[三峯]가 있는 것을 본 자가 따라서 이름 하였을 것입니다.”주6)라고 하여, 삼봉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내었고, 울릉도를 삼봉도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병조판서 이극증(李克增)이 김한경에게 삼봉도에 대하여 자세히 물어보고 삼봉도가 있다고 확신하고 임금께 아뢰었다.

 

()이 삼봉도에서 돌아온 김한경 등을 보고서 그 일을 대략 물어보니, 대답이 매우 자세하여 거짓이 아닌 듯하므로, 삼봉도가 있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명년 봄에 배를 만들어서 들여보낼 일을 서로 의논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삼봉도에 도망해 숨은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반드시 찾아내어 잡아야 할 것이다. 만약 부당하게 거역하는 자가 있으면 군사를 보내어 들어가서 공격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김한경 등이 전 일에 돌아왔는데, 지금까지 관청에서 보내려고 할 때마다 바람이 거슬러 분다고 핑계하고 있으니, 매우 옳지 못한 일이다. 병조로 하여금 이를 국문(鞫問)하도록 하라.”주7)

 

김한경을 앞세워 삼봉도를 수색하려 하였으나 임금은 김한경이 바람이 거슬려 분다.”고 핑계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항해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500km 넘는 원거리 항해를 할 때는 제일 먼저 바람을 살펴야 한다. 특히, 가는 것 보다 돌아올 수 있는 바람을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1479년에도 삼봉도를 찾으려고 탐색대를 보냈으나 바람 때문에 돌아왔다. 관에서는 조급하게 찾고자 하는 바람에 항해자들은 목숨을 내놓고 항해해야 하므로 원성이 클 것으로 생각된다.

 

좌승지(左承旨) 이경동(李瓊仝),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달 28일에 조위(曺偉)가 마상선(麻尙船)을 모아서 들여보냈으나, 바람이 순조롭지 못하여 돌아왔습니다. 30일에 다시 보냈는데 지금 거의 1개월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으니,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주8)

 

1479930일의 탐사대는 누가 항해하였는지 불분명하나, 이 시기에 동해바다를 나선다는 것은 무모한 항해였다. 삼봉도로 갈 수는 있으나 돌아올 수 있는 바람이 없기 때문에 한 달이 넘도록 귀향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나라에서 삼봉도 항해를 위하여 튼튼한 배를 만드는 노력은 없고 마상선주9)과 같이 작은 배를 모아서 보내어 항해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동해상의 큰바람은 태풍, 저기압이 지날 때의 북동풍, 봄철의 양간지풍, 늦가을의 북서풍 등이 있다. 동해 중부지방에서 기상이 가장 안정된 시기는 양력 5월 중순 아카시아 꽃이 필 무렵부터 6월 말까지다.(음력 45). 그런데 관에서는 아무 때나 빨리 가서 삼봉도를 찾으라고 하였으나 김한경은 바람이 거슬려 분다.”고 하였다. , 돌아올 수 있는 바람이 없기 때문이다. 울릉도에서 돌아올 수 있는 바람은 동풍과 남동풍이 있다. 그런데 이 바람은 봄·여름에 부는 바람이다. 이 시기를 놓치고 가을철에 울릉도를 가라고 하면 돌아올 수 있는 바람이 없기 때문에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

독도 삼봉도는 맑은 날에는 울릉도가 먼저 보이므로 갈 수 없지만, 황천(荒天)에서는 시야가 좋지 않거나 바람과 해류 또는 야간 항해로 울릉도를 지나갈 수 있다. 다행히 작은 섬을 발견하였으나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 섬에는 나무도 없고 포구도 없고 올라가기 힘든 돌섬이었다. 김한경 일행은 비록 삼봉도에는 상륙하지 못하였지만, 삼봉도를 한 바퀴 돌면서 귀향하였다. 그러나 예전의 다른 항해자들은 섬을 한 바퀴 둘러보면서 동굴 속에서 식수주10)를 발견하여 구사일생으로 귀향하여 요도나 삼봉도의 전설이 생겼다고 추정한다. [으로 계속]

 

(사진 2) 독도 가재바위 /그래픽=이효웅
(사진 2) 독도 가재바위 /그래픽=이효웅
(사진 3) 독도 물골동굴 /촬영=이효웅
(사진 3) 독도 물골동굴 /촬영=이효웅

 


주1) 『성종실록72, 성종 7(1476) 1022일 임진 3번째 기사.

주2) 『성종실록, 한국고전번역원DB, 성종 7(1476) 1027. 1022일 기사에는 경성에서 43야에 울릉도에 갔다.”고 하였다. ‘요도탐색대의 항해 2’를 연구자가 요약했다.

주3) 주강현, 독도강치 멸종사, 2016, 50. 일본인이 조사한 독도 강치의 모습은 새끼는 섬의 바위굴에서 해를 보낸다. 암수 비율은 일부다처다. 수컷 한 마리에 암컷 30마리 정도 비율이다. 수컷은 큰 것은 1, 몸무게는 150관 나가는 것도 있다. 암 컷은 큰 것은 6척 정도로 암수 모두 처음에는 회색이지만 성장하면서 회백색으로 변한다. 수컷은 검은색이 많다.’

주4) 이효웅은 2015년부터 울릉도 해식동굴을 탐사하면서 와달리에서 해식동굴 6개를 발견했다. 용굴에서 가재(강치)들의 서식지인 몽돌 광장을 확인하였다.

주5) 『성종실록72, 성종 71022일 임진 3번째 기사. 530km/84h= 평속 6.3km(3.4노트).

주6) 『성종실록106, 성종 10(1479) 713일 정묘 1번째 기사.

주7) 『성종실록112, 성종 10(1479) 1219일 경오 1번째 기사.

주8) 『성종실록110, 성종 10(1479) 1026.

주9) 마상선(麻尙船)- 나무를 파서 만든 작은 배.

주10) 물골 동굴: 독도 물골 동굴에는 하루 약 200리터의 샘물이 나온다. 이곳은 서도 뒤쪽에 있어서 풍랑이 있을 때는 찾기 어려우나 파도가 잔잔하면 찾기 쉽다. 신봉학(강원도 동해시, 201780)1975년 죽변에서 목선(돛대 3, 8, 7~8)을 타고 독도에서 해녀들과 함께 물골 동굴에서 숙식하면서 한 달 정도 미역, 전복, 문어 등을 어업하였다. 연구자는 2002, 2009, 2017년에 답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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