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선바위에 올라 매동초등학교로 걷다
인왕산 선바위에 올라 매동초등학교로 걷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0.17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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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소설에서 설명된 곳 탐방…선바위는 그대론데 현저동엔 고층아파트

 

인왕산 자락에 있는 바위산을 올라간 계기는 소설가 박완서가 그많던 싱아는 누가 더 먹었을까(1992, 웅진출판)에서 개풍군 박적골에서 상경해 낯선 서울생활을 그렸던 대목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박완서는 소설 그많던 싱아는…」에서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가 엄마를 따라 서울에 처음 살던 집으로 가는 길을 이렇게 기억했다.

줄기차게 우리를 따라오던 네줄의 전찻길이 끊긴 지점에서 엄마는 골목으로 접어들었고 골목은 곧 깎아지른 듯한 층층다리로 변했다. 집들도 층층다리처럼 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곧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이상한 동네였다. 층층다리 양쪽도 다 그런 집들이었다. 집집마다 널빤지로 된 일각대문은 있으나마나 하게 살림살이를 거리로 발랑 드러내고 있었다. 오줌과 밥풀과 우거지가 한테 썩은 시궁창물까지 층층다리 양쪽 가장자리의 파인 데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허위단심 꼭대기까지 올랐는데도 동네는 계속됐다. 사람들이 겨우 비비고 지낼 만한 실 같은 골목을 한참이나 지나 더 꼬불대며 오르다가 다시 첫 번째 층층다리보다 더 불규칙하고 가파른 오르막 길을 만나고 그 중간에 비켜선 층층대 위의 초가집 앞에서 엄마는 비로서 걸음을 멈추었다.“

 

무악동의 가파른 계단 /김현민
무악동의 가파른 계단 /김현민

 

1930년대 현저동은 그후 여러차례 행정동 개편을 통해 지금은 독립문쪽 현저동과 인왕산쪽 무악동으로 바뀌었다. 박완서의 어렸을 때 집은 행정개편으로 현재 무악동이다.

무악동은 지금 달동네가 없고 고층아파트가 빼곡이 서 있다. 그 어딘가에 박완서가 살던 집이 있을 것이다. tbs 교통방송이 ‘TV책방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현지 취재한 바에 따르면, 현재 무악동 옥바라지 골목 어디쯤이 작가의 집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지금은 재가발로 철거되었다.

무악동에서 선바위로 올라가는 길은 다리가 팍팍할 정도로 가팔랐다. 계단이 설명했듯이 깎아지른 듯한 층층다리가 아직도 있었다. 마침 어느 노인 부부가 그 계단을 올라오는데 무척 힘들어 했다.

 

무악동의 아파트촌 /김현민
무악동의 아파트촌 /김현민

 

작가는 현저동 집에 관해 또렷하게 기억했다.

엄마가 마음에 드는 학교 중에서 다시 나의 통학거리를 감안해서 골라잡은 학교가 매동국민학교였다. 현저동에서 그 학교엘 가려면 산을 하나 넘어야 했다. 인왕산 자락이었다. 현저동 중턱에 성터가 남아 있는 길이 나 있었다. 길이 험하진 않았지만 거의 사람의 왕래가 없는 휑한 길이고, 길에는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숲 속에 문둥이들이 득시글댄다고 알려져 있었다.

다 잘 했지만 내가 제일 싫은 건 주소를 두 개 외는 거였다. …… 사직동 주소는 물론이고 서울에서 그 후에 거친 수많은 집의 주소를 거의 다 잊어 버렸지만 현저동 46번지 418호란 내 최초의 주소는 여태껏 안 잊어버리고 있다.“

 

인왕사의 호랑이그림 /김현민
인왕사의 호랑이그림 /김현민

 

어린 박완서는 매동국민학교를 가기 위해 산을 하나 넘어야 했는데, 그 산이 인왕산 자락이다. 친구 하나 없이 외톨이로 학교로 하다가 선바위에 가서 굿당에 무당춤을 즐겨 보았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매동학교로 넘어가는 방향 말고, 우리 동네가 뻗어 올라가는 쪽으로 비탈을 더 올라가면 인가가 끝나고 바위산이 나온다. 사람들은 거기를 선바위라고 했고 선바위에서 물 없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계곡 오른쪽에 굿당이 나오고 건너쪽엔 사람들이 신령한 바위라고 믿는 형제바위가 보였다. 형제바위는 누가 보기에도 신령해 보였다. 뒤에 있는 절벽과는 따로 두 사람이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는 형상의 거대한 바위였다.”

 

선바위 /김현민
선바위 /김현민

 

선바위는 인왕사 위쪽으로 더 가면 약수터가 나오고, 그 왼쪽에 있다. 선바위는 아이를 갖기를 원하는 부인들이 와서 기도를 하는 곳으로 기자암(祈子岩)이라고 불렸다. 바위 모습은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여 참선한다는 ’() 자를 따서 선바위라고 했다. 형제가 사이 좋게 서 있는 모습이 다정해 보였다.

이 바위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이라는 설화와 태조 부부의 상이라는 설화가 전한다. 일제가 남산에 있던 국사당이 이 바위 곁으로 옮긴 뒤부터는 무속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가 갔을 때에도 나이든 할머니와 아들쯤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가 바위를 향해 수없이 절을 하고 있었다.

옛 문헌에는 한양도성을 지을 때 무학대사가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둘수 있게 설계하려 했는데, 정도전이 성 밖에 두도록 설계하려 했다고 한다. 정도전은 선바위를 도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성하고, 도성 밖에 두면 유교가 흥할 것이라고 태조를 설득해 결국 도성 밖에 두었다는 것이다. 무학대사가 탄식하며 이제부터 승도들은 선비들의 책 보따리나 지고 따라다닐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국사당 /김현민
국사당 /김현민

 

선바위 아래에 국사당(國師堂)이 있다. 박완서가 굿당이라고 표현한 곳이다.

이 사당은 원래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었다. 조선시대에 남산을 신격화한 목멱대왕(木覓大王)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목멱신사라고도 불렸다.

일본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조선신궁을 남산에 지으면서 1925년 지금 위치로 옮겨 자연 암반 위에 아담한 맞배집을 세웠다. 사당 안에는 무신도가 걸려있는데, 그 솜씨가 다른 무신도에 비해 뛰어나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 국사당에서는 내림굿, 치병굿, 재수굿 같은 굿판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인왕산 자락의 아카시아 /김현민
인왕산 자락의 아카시아 /김현민

 

선바위와 국사당에서 내려와 한양도성을 따라가다가 사직동으로 넘어 갔다. 산책코스가 잘 다듬어져 있다. 산자락에는 온갖 풀들이 자랐다. 아카시아가 곳곳에 심어져 있다. 어린 박완서는 서울에서 처음으로 아카시아 꽃을 보고 그것을 먹었다. 메시꺼워 박적골에서 뜯어 먹던 싱아가 생각났다.

아카시아꽃도 처음 보는 꽃이려니와 서울 아이들도 자연에서 곧장 먹을 걸 취한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 꽃을 통해서였다. 잘 먹는 아이는 송이째 들고 포도송이에서 포도를 따 먹듯이 차례차례 밋있게 먹어 들어갔다. 나도 누가 볼세라 몰래 그 꽃을 한 송이 먹어 보았더니 비릿하고 들적지근했다. 그리고 헛구역질이 났다. 무언가 입가심을 해야 들뜬 비위가 가라안증것 같았다. 나는 불현 듯 싱아가 생각났다. 우리 시골에선 싱아도 달개빔만큼 흔한 풀이었다.”

 

매동초등학교 /김현민
매동초등학교 /김현민

 

산자락을 내려오면 단군성전이 나오고 사직단이 나타난다. 조금 더 가면 매동초등학교가 나온다. 박완서의 어린시절에는 매동국민학교였다.

 

이동로 /김현민
이동로 /김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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