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 청화매조죽문 항아리 등 3건 보물 예고
백자 청화매조죽문 항아리 등 3건 보물 예고
  • 이인호 기자
  • 승인 2019.10.29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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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풍수지리 교재 ‘지리전서동림조담] 등 서책 2건 포함

 

백자 청화매조죽문 항아리 등 조선 시대 도자기와 전적 3건이 보물로 지정될 것이 예고되었다. 문화재청은 30일간의 예고를 통해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 지정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백자 청화매조죽문 항아리 /문화재청
백자 청화매조죽문 항아리 /문화재청

 

백자 청화매조죽문(靑畵梅鳥竹文) 항아리

높이 약 27.8cm 크기의 아담한 청화백자 항아리로, 조선 전기인 15~16세기에 제작된 것이다. 뚜껑이 있는 입호(立壺) 형태로, 겉면에 매화(), (), 대나무()로 구성된 청화(靑畵)’ 물감으로 그린 도자기다. ‘청화물감은 청색의 코발트 안료로, 회회청(回回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는 중국에서 수입했으나 1463~1469년 사이에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안료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매화를 화면에 크게 배치해 전반적으로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양한 동작의 새를 표현해 생동감을 불어 넣었다. 마치 먹의 농담을 활용하듯 청화안료의 색조와 분위기를 잘 살려냈고, 발색(發色)이 좋아 작품의 품격을 높였다. 이렇듯 수준 높은 기법과 회화 표현을 볼 때 이 작품은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이 참여한 조선 시대 관요(官窯) 백자로 추정된다.

 

국보 제170호 백자 청화매조죽문 유개항아리 /문화재청
국보 제170호 백자 청화매조죽문 유개항아리 /문화재청

 

국보 제170백자 청화매조죽문 유개항아리(白磁 靑畵梅鳥竹文 有蓋壺)’와 비교해 볼 때 뚜껑이 없어 온전한 한 벌이 아닌 점을 제외하면 정제된 백자의 바탕흙(태토, 胎土)과 문양을 장식한 기량이 거의 흡사하다.

청화백자는 사용계층이 한정되었고 제작 또한 제한되었기 때문에 전래 수량이 많지 않아 희소성이 있다. 제작 당시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조선 고유의 청화백자를 제작하기 시작한 시대 변화를 잘 보여주는 우수한 작품이다.

 

지리전서동림조담(地理全書洞林照膽)

지리전서동림조담 /문화재청
지리전서동림조담 /문화재청

 

조선 시대 관상감(觀象監) 관원을 선발하는 음양과(陰陽科)의 시험 과목 중 하나로 널리 사용된 풍수지리서다. 중국 오대(五代) 사람인 범월봉(范越鳳)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지리전서동림조담에 일부 주술적 요소가 있어 주희(朱熹) 등 송대 유학자들의 비판을 받았지만, 조선에서는 과시(科試, 국가시험)의 과목으로 채택됐다. 이 사실은 이 책의 내용이 조선 고유의 풍수관(風水觀)을 성립시킨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에서 풍수지리가 역사문헌적으로 인정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상권과 하권 2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은 조선 건국 후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字)로 인쇄되었다. 서문이나 발문 그리고 간기(刊記, 펴낸 시기, 주체 등의 기록)가 없어 간행과 관련된 사항을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계미자 중자(癸未字 中字)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태종 연간(14001418)에는 인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에 문무과(武科)와 생원진사(生員進士) 선발 시험인 사마과(司馬科) 수험서인 유학서적은 상당수 간행된 데 비해, 잡과(雜果)의 풍수지리서는 수험생이 적어 많이 간행되지 않았으므로 전래본이 매우 희소하다.

따라서 지리전서동림조담은 간행본이 거의 없는 희귀본이라는 점, 고려 말조선 초기에 사용된 금속활자인 계미자로 인출되었다는 점, 조선 시대 국가 차원에서 중요한 풍수지리서로 인식되었다는 점에서 역사학술서지학적 의의를 높게 평가할 수 있다.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권12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 중요시하는 경전(經典)의 하나로, 우리나라 불교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진 대표적인 책이다. ‘대불정수능엄경또는 능엄경이라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10권으로 구성된 내용 중 권12에 해당한다. 이 경전은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승려 신총(信聰)에게 대자(大字; 큰 글씨)로 판하본(板下本)을 쓰게 한 뒤 1401(태종 1)에 판각하여 간행한 것이다.

나뭇결의 마모와 종이의 상태로 보아 처음 판각된 이후 조금 늦게 인쇄된 것으로 보이며, 15세기 말까지 사용된 반치음()과 옛이응() 등의 묵서 기록 또한 간행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특히, 교정 흔적은 간경도감(刊經都監) 언해본 간행을 위한 과정으로 판단되어 늦어도 15세기 무렵 인쇄된 것임을 추측하게 한다.

동일 판본인 보물 제759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의 일부 빠진 장수(張數)를 보완해 주고 본문 왼쪽에 일(), () 등 해석을 돕기 위한 석독구결(釋讀口訣)의 사례 등이 확인되어 조선시대 구결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석독구결(釋讀口訣)은 한문을 우리말로 풀어 읽을 수 있도록 문장 사이에 달아 놓은 구결을 말한다.

이 책은 조선의 독자적인 필체에 의한 판본으로서, 조선 초기 불경 간행의 양상을 살펴볼 수 있고 중세 국어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판단되어 보물로 지정하여 연구보존할 가치가 있다.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권1~2 /문화재청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권1~2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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