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6공 실명제①…폭풍전야
실패한 6공 실명제①…폭풍전야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2.15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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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일 재무 “곧 실시”, 메가톤 충격파…노태우, 5공 때 반대론 편

 

6공화국 초기 2년 동안 경제에 메가톤급 충격을 던진 금융실명제 파동은 노태우 정권 출발서부터 시작됐다. 6공화국 출범 직후인 198835일 사공일 재무장관은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새해 업무보고를 하면서 금융실명제 얘기를 꺼냈다.

경제 정의를 실현하려면 금융실명제를 실시해야 합니다. 비실명 금융에 대해서는 세금을 무겁게 매겨 계층 격차를 해소하겠습니다. 토지 및 금융 전산화가 이뤄진 뒤인 1991~92년에 실시할 계획입니다.”

노 대통령은 실명제에 대해 신중론을 펴면서 사공일 장관에게 그 추진을 일임했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의 막판 열기가 뜨거운 198712월 실명제 실시를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5공초 내무장관 시절에 실명제 실시의 반대편에 선 경험이 있었다. 실명제 실시의 필요성과 그 부작용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6공화국 들어와 토지공개념과 함께 경제 개혁의 양대 축을 형성한 금융실명제는 이렇게 해서 거론되었다.

“6공화국의 첫 재무장관으로서 선거 공약을 수행하는 차원에서 실명제 실시를 대통령에게 건의한 것입니다. 경제 규모도 커졌고, 무역 흑자가 쌓이는 등 경제 여건이 좋았습니다. 경제 민주화를 위해서도 5공화국 때 하지 못한 실명제 실시가 필요했는데, 다만 2~3년의 준비 기간을 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사공일 재무장관의 이같은 생각은 당시 정치·경제·사회 여건의 종합판단에 따른 결과였지만, 청와대의 전폭적인 지원을 얻어내지 못했다. 따라서 6공화국의 실명제는 사공 장관이 거론 차원에서 머물렀다면, 그해 12월 등장한 문희갑 경제수석이 총대를 잡고 적극 추진하면서 그 파장이 증폭된다.

6공의 첫 청와대 경제수석을 역임한 박승씨의 설명이다.

실명제는 사공 재무장관이 적극 추진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대통령과 청와대 경제비서실은 신중론을 폈지요. 청와대는 토지보유 과세를 부과하고 부동산 투기를 잡고 부동산 및 금융전산화를 갖추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조건이 모두 미흡하니 보강될 때가지 유보하자는 분위기였습니다.”

안공혁 당시 재무부 제2차관보는 이렇게 말했다.

“88년의 실명제 거론은 대통령 선거공약이기 때문에 야당의 공세에 말려든 것입니다. 여소야대의 국회였지 않습니까. 사공 장관은 국회에서 실명제는 언제 실시하느냐는 야당 의원들의 질의에 밀려 조만간 실시하겠다고 답변했습니다. 이에 사공 장관은 노 대통령에게 실명제 추진 계획을 세우겠다고 보고한 것입니다.”

다시 경제정책 입안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6공화국 첫해의 실명제는 추진 의지보다는 당위론의 차원에서 제기됐다. 그러면 제13대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금융실명제는 어떻게 불거져 나왔는지 살펴보자.

 

전두환 대통령의 5공화국에서 실명제 추진이 보류된 후 5년이 지난 198710월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금융거래 실명제가 실시되어야 한다는 연구결과를 냈다. 연구도 연구였지만, 당시 13김이 뛰어든 대통령 선거에서 3김의 후보들은 공히 5공화국에서 실패한 금융실명제의 실시를 공약으로 들고 나왔다. 6·29 선언과 민주화의 기치를 내건 노태우 후보도 선거 막바지인 12, 금융실명제 실시와 토지공개념 도입을 선거공약으로 발표했다.

“88 올림픽이 끝나면 제1차 세제 개편을 단행하고, 1990년에 토지공개념, 1091년에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겠습니다.”

6공화국의 실명제 추진 과정을 추적하기 앞서 1982년 내무장관 시절 실명제에 대한 노 대통령의 시각을 짚어보자. 추진한지 2년만에 실명제 실시에 대한 노 대통령의 의지가 약해지고, 19904월 이승윤 부총리, 김종인 경제수석 팀이 입각하자마자 실명제가 실종되는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전두환 정권 때의 실명제는 당시 김재익 경제수석의 개혁의지에서 출발했다. 19821월 나웅배 재무장관은 당시 국장급인 안공혁, 박원구씨를 따로 불러 실명제 실시반을 검토하라고 지시, 실명제안이 구체회되던 중 이철희-장영자 거액어음 사기사건이 터졌다. 나 장관은 사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强硬式이라는 별명의 강경식(姜慶植) 재무장관이 부임 9일만에 실명제 실시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7·3 조치를 전격 발표했다. 강 장관은 언론 퉁제 하에서 밀어 붙이기 식으로 실명제를 추진했으나, 민정당과 전두환 대통령의 측근으로부터 반발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당에서는 김종인 의원이, 청와대에서는 허화평 정무수석, 허삼수 사정수석등 이른바 허씨가 앞장 섰고, 권익현 사무총장, 이종찬 사무총장, 진의종 정책위 의장, 이원조 석유개발공사 사장이 반대 편에 섰다.

전두환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받은 김재익 경제수석, 강경식 장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자, 허씨들은 노태우 내무장관을 찾아갔다. 노 장관은 자칫 실명제를 실천에 옮기려다가는 목숨 걸고 잡은 정권마저 위태롭다는 허씨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반대파로 돌아선다. 전 대통령은 서울 연희동의 노 장관 자택으로 찾아가 술잔을 기울이면서 그럴수 있느냐며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막판에는 김준성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반대의사를 표명했고, 노태우 장관은 이에 가세하자 전두환 대통령도 고집을 꺽지 않을수 없었다. 5공의 실명제는 금융자산 실명 거래에 관한 법률만 남긴채 ‘198611일 이후에 대통령이 정하는 날에 시행한다는 치명적인 단서를 달고 유실되고 말았다.

 

1994년 전격 실시된 금융실명제와 관련한 신한은행 창구 안내판 /한국금융사박물관
1994년 전격 실시된 금융실명제와 관련한 신한은행 창구 안내판 /한국금융사박물관

 

1988225일에 집권한 노 대통령은 실명제 실시를 공약했지만, 신중론을 펴지 않을수 없었던 것도 내무 장관 시절에 실명제 유산 과정을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편을 가르자면 나웅배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자도 신중론자였다. 그러나 나 부총리는 문희갑 경게기획원 차관의 실명제 조기실시론에 밀리기 시작했다. 당시 재무부 고위 당국자의 설명이다.

사공일 장관이 실명제 실시 시기를 개략적으로 91~92년으로 잡았으나, 기획원에서 조기실시론을 들고 나왔지요. 문희갑 차관이 어차피 실시할 바에야 91년으로 실시 시기를 명시하자고 주장했고, 나 부총리는 이를 청와대에 보고, 91년 실시가 결정됐습니다.”

그해 729일 이현재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경제사회발전심의회는 제6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87~91)을 수정하면서 91년까지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는 방침을 확정하기에 이른다.

93일 경제기획원 확대간부회의에서 문희갑 차관은 재무부의 미지근한 태도를 강하게 성토했다.

재무부가 제시한 세제 개편안은 소득재분배 정책과 세수 확보 면에서 많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실명제를 빨리 실시해서 세제 상의 결함을 보완하고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 강화로 조세의 역진성을 개선해야 합니다.”

없는 사람, 핍박 받는 사람을 위한 경제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한 투사형 문 차관은 장관급으로 승진해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으로 자리잡으면서 6공의 실명제는 전면적으로 무대 위에 오르게 된다.

6공화국 첫 해의 실명제 추진은 문제 제기의 차원이지, 집행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주무부처인 재무부는 해결해야 할 경제구조적 문제가 산적해 뭔가 손을 대야 하는데도 손을 쓸 여유가 없었다. 국정감사니, 부실기업 정리니 하는 일에 매달리면서 경제관료들은 민주화의 코스트를 지불하기에 바빴다.

1988년의 실명제 거론은 추진의 원동력이 부족했지만, 다음해 조순 부총리, 문희갑 수석 팀이 실명제 강행의 초석을 마련했다.

박승 경제수석의 평가다.

당시 행정 전산망을 맡고 있던 이춘구 내무장관과 함께 노 대통령을 면담하면서 전산화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자고 건의, 추진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전산화를 통해 토지보유과세를 강화하고, 상속·증여세 강화, 공시지가제도 실시후 실명제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989412일 노 대통령은 경제사회균형발전 확대회의를 열어 1991년 실명제 실시를 천명했고, 그해 711일 상의·전경련등 경제 6단체는 금융실명제·토지공개념 등 제도 개혁에 앞장설 것을 결의했다.

누구도 반대의견을 개진할 수 없을 정도로 여론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실명제는 순항하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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