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6공 실명제③…역풍이 불다
실패한 6공 실명제③…역풍이 불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12.17 10: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기침체 보완책” 들먹이며 반대론 기지개…주가폭락…자금 대거 지하 은신

 

조순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과 문희갑 청와대 경제수석의 관현악단이 금융실명제와 토지공개념을 연주할 때 무대 조명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3저 호황을 구가하던 우리 경제가 1989년 들어 서서히 하강국면을 맞기 시작한 것이다. 무대 조명이 어두워지면 지휘자와 연주자의 호흡, 관악과 현악의 화음이 틀려지고 불협화음이 나게 마련이다. 성미 급한 방척객은 처음엔 조명을 탓하다가 나중엔 지휘자와 그의 악단을 나무라기 십상이다.

실명제 추진이 본격화되던 1989년 초 조순 경제팀의 실정에 대한 공격이 여당인 민정당에서 시작됐다. 198933, 서울 상공회의소 식당. 이 날은 아침식사를 겸해 경제현안을 비롯해 정치·사회의 제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고위당정회의가 열렸다. 이승윤 민정당 정책위 의장이 포문을 열었다. “최근 경제동향에 대한 정부측 설명을 들었습니다만, 정부가 밑바닥 흐름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급한 문제가 수두룩한 것 같은데도 형식적인 지적으로 그친 것 같습니다.”

이규성 재무, 박승 건설 장관이 정부측을 옹호하며 당의 협조를 구했다.

경제는 정치·사회와 연계된 만큼 무엇보다 노사안정에 중점을 두고 사회 각계에서 분출하는 요구를 자제시키는 데 당정이 힘을 합쳐야 합니다.”

현 상황은 수축조정기에 접어들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변화는 자연스런 변화로서 길게 보면 바람직한 현상이기도 합니다.”

정종택 정무장관이 이승윤 의장의 편을 들었다. “업계에서도 정부가 경제를 너무 낙관하고 있다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승윤 의장이 또다시 정부의 통화정책에 문제 제기하는 도중에 조 부총리가 화를 벌컥 냈다. “오늘 회의를 소집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회의를 갖는 게 아닙니까. 정부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바람에 일부 참석자들은 식사를 하는둥 마는둥 했고 회의는 어물쩍 끝나 버렸다.

 

경기 흐름에 대해 당정이 생각을 달리했고 이 시각차는 토지공개념과 금융실명제 추진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실명제는 경기침체라는 결정적 걸림돌에 받히기 시작했다. 19896월 들어 조순 경제팀은 경기 후퇴를 직시하고 그해 성장률을 당초 8.0%에서 7.5%, 경상수지 흑자폭을 95억 달러에서 80억 달러로 각각 하향조정했다. 그러면서도 실명제 추진에 대한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619일 청와대에서 열린 하반기 경제종합대책 보고회의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경제팀에게 경기 후퇴에 대한 질책을 가했다. “우리경제는 현재 매우 어려운 국면에 처해 있습니다. 특히 부총리를 비롯한 경제팀은 이 난국을 빠른 시일내에 수습하지 못할 경우 전원이 사임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난국타개에 임해주길 바라오. 토지공개념 도입과 실명제 등 제도개선도 확고한 의지와 결의를 가지고 차질없이 추진하시오.”

이 무렵까지만 해도 노 대통령은 경기활성화와 경제제도 개혁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한 것 같았다. 노 대통령은 한편으로 당측의 주장을 수용해 낙관론을 펴던 경제팀을 질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껏 추진해온 실명제등 개혁정책을 밀고 나가라고 격려했다. 그러나 개혁 추진을 외치던 노 대통령의 의지가 약해졌다. 연초까지만 해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관철하라고 지시했던 노 대통령이 89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시행상의 문제점을 고려하여 무리하게 추진하지 말라고 후퇴했다.

 

개혁에 대한 노 대통령의 결심이 흔들리는데도 문희갑 수석의 의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경제표류의 원인을 불로소득의 존재, 투기의 잠재, 지하경제의 만연 때문인 것으로 진단했다.

문 수석과 재무부의 실명제 준비단은 경기 문제에 구애받지 않고 예정 수순대로 준비절차를 밟아 나갔다.

그해 721일 증권업계를 시발로 실명제 시행의 여건조성과 은행돈의 음성화 등 부작용 방지를 위해 은행·투자금융·보험등 10개 금융권 별로 금융실명제 준비위원회가 일제히 발족했다. 1989825일 경제개혁의 한쪽 축인 토지공개념 법안 가운데 토지초과이득세법안이 입법예고됐고, 다른 한쪽 축인 실명제의 실시도 가시화됐다.

 

그래픽=김현민
그래픽=김현민

 

그동안 실명제 실시 여부를 관망해오던 비실명의 뭉칫돈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부 당국자들이 비실명 자금의 과거를 묻지 않고 비밀도 보장하겠다고 누누이 강조했지만 돈은 그 생리대로 은신처를 찾아 움직인 것이다. 비밀거래가 용이한 곳, 자금출처 조사나 세원 포착이 어려운 곳이면 어디서나 검은 돈이 꿈틀거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10~12조원으로 추산되던 검은 돈이 어디로 흘러갔는지를 그때의 통계와 자료를 통해 살펴보자. 실명제 실시가 가시화된 89년 돈의 흐름이 단적으로 달라진 곳은 해외송금 부문이다. 한은 통계에 따르면 198770만 달러에 불과했던 개인의 해외송금이 1988년에 11,700만 달러 늘어난데 이어 1989년엔 8200만 달러로 전년대비 무려 8배 가량 급증했다. 1989년의 해외송금 가운데 60% 이상은 실명제 실시가 구체화된 10월 이후에 빠져나갔다. 물론 이 수치에는 밀반출 규모가 잡혀 있지 않지만 실명제 실시에 대비한 재산의 해외도피가 상당 부분 반영되고 있다.

뭉칫돈의 또다른 도피처는 골동품, 고서화, 귀금속등이다. 혜원 신윤복이나 단원 김홍도의 그림값이 한해 동안 장당 1,000만원 이상씩 올랐고, 유명 화가의 작품은 나오자마자 동이 났다. 금과 다이아몬드등 귀금속, 보석도 연말에는 폭등 조짐을 보였고, 국제보석상인 드비어스사와 월드골드카운슬사가 국내 영업을 강화하고 나섰다.

부동산시장에도 돈이 몰리는 흔적이 나타났다. 토지개발공사가 매달 조사하는 지가동향에 따르면 902월에 경기북부·분당·대전둔산·대불단지등 개발예정지의 땅값이 연초부터 폭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뭉칫돈의 움직임에 대해 당시 금융공황론을 주장하던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의 민병균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정부가 실명제를 추진하면서 과거를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지만 뭉칫돈은 제도 금융권에서 빠져나가 투기성으로 변했어요. 자금 회전 속도를 감안할 경우, 당시 비실명 자금은 20조원 가량으로 추산되는데 이 돈이 몰려 다니면서 땅·아파트 투기, 물가폭등을 유발했습니다. 정부가 돈을 찍어내 빠져나간 돈을 메우려하면 결국 이런 부작용이 심화될 뿐이었습니다.”

증시도 고꾸라졌다. 1989411,000포인트를 넘어선 종합주가지수가 그후 하락세를 지속해 이른바 ‘12·12 증시부양책발표직전인 그해 1211828.98까지 내려갔다.

물론 실명제 추진 세력과 지지그룹들은 증시 붕괴와 실명제 추진이 서로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발족 당시 경실련 정책위원장을 맡은 이근식 교수의 견해다. “증시 붕괴와 실명제는 서로 상관이 없습니다. 증시 침체의 원인은 시장구조의 취약성에 있었습니다. 돈이 풀려도 큰 손에게 돌아가 주가 회복에 도움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실명제 유보 이후 이내 800선이 붕괴됐고, 19928월에 500선대로 떨어진 것도 실명제 때문이란 말인가요?”

그러나 실명제 반대론자들은 가시적인 증시붕괴를 실명제의 탓으로 돌리고 서서히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