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50여년 여정 끝에 통일하다
이탈리아, 50여년 여정 끝에 통일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1.11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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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적 통일운동 성숙…국제적 역학관계 변화를 잘 활용하며 단계적 통일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은 대체로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하고 빈 체제가 시작된 1815년부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끝난 1871년까지로 보고 있다. 이탈리아 통일운동은 이탈리어어로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복귀(Resurgence)라는 의미로, 고대로마제국 시절의 이탈리아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은 비토리아 에마뉴엘 2(Vittorio Emanuele II), 카밀로 카보우르(Camillo Benso, Count of Cavour),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 주세페 마치니(Giuseppe Mazzini) 등 네명을 꼽을수 있다.

에마뉴엘 2세는 이탈리아 북서부의 사르데냐-피에몬테(Sardegna-Piemonte) 국왕으로, 성격과 이념이 다른 카보우르, 가리발디를 고루 등용하는 용병술을 지녔고,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주변 강국을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응한 현실주의자였다.

카보우르는 귀족출신으로 사르데냐의 재상을 맡아 국제적 역학관계를 냉철하게 파악해 움직이는 외교전략가였다. 그는 합스부르크가의 종가인 오스트리아와 앙숙관계였던 프랑스를 끌어들여 롬바르디아를 차지해 북부 이탈리아를 손아귀에 넣었다.

가리발디는 자발적으로 민병대를 조직해 남부 이탈리아를 정복해 사르데냐 국왕에게 바쳤다. 그는 공화주의자였지만 현실적으로 사르데냐의 통일을 인정했다.

이에 비해 마치니는 철저한 공화주의자로 사르데냐의 통일에 불복하면서 이탈리아 통일 이념을 불어넣은 운동가였다.

 

주세페 가리발디, 카밀로 카보우르, 주세페 마치니 /위키피디아
주세페 가리발디, 카밀로 카보우르, 주세페 마치니 /위키피디아

 

이탈리아는 서기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에 동고트족, 롬바르드족, 동로마제국, 프랑크왕국, 신성로마제국의 연이은 침략을 받으며 북부엔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공국, 제노바 공국, 남쪽엔 나폴리-시칠리아 왕국, 중부엔 교황령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특히 주변강국인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스페인이 고대로마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 이탈리아를 수시로 침공해왔다. 통일직전 이탈리아는 북부엔 합스부르크 종가인 오스트리아의 수중에 있었고, 남부는 부르봉왕가가 지배했다.

초기의 혁명운동은 프랑스 혁명과 스페인 입헌군주파 혁명의 영향으로 1815년에 카르보나리(Carboneria)이라는 단체가 조직되었다. 조직원들은 당시 유행하던 프리메이슨주의의 영향을 받아 비밀조직으로 운영되었고,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외세를 배격해야 한다는 이념을 만들어 냈다. 이 조직에 의해 1820년 시칠리아 반란, 피에몬테 반란이 일어났지만 곧바로 제압당했고, 1830년에도 혁명운동이 일어났으나 실패했다. 대부분의 반란자들은 해외로 망명하거나 지하로 잠복했다.

 

통일전쟁 전의 이탈리아 /위키피디아
통일전쟁 전의 이탈리아 /위키피디아

 

이탈리아 통일전쟁은 3단계로 구분된다.

1차 통일전쟁은 1848년 유럽에 불어닥친 동시적 혁명 시기였다. 그해 1월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역에서 오스트리아에 대해 세금거부 운동이 일어나 반란으로 확산되었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일어난 이 반란에서 주세페 마치니가 1849년초 로마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총리에 취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군대가 투입되는 바람에 모든 독립운동이 실패로 돌아갔다.

여기서 지도자들은 실패를 통해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아직 통일세력의 물리적인 군사력이 충분치 않았고, 또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가 동시에 개입할 경우 이탈리아 민족세력이 이길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군소국가 가운데 가장 강한 나라는 사르데냐 왕국이었다. 사르데냐에서도 카를로 알베르토(Carlo Alberto) 국왕이 오스트리아에 대항했다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 퇴위하고 맏아들 에마뉴엘 2세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부왕을 뒤이은 에마뉴엘 2세는 1852년 카보우르 백작을 선택해 총리로 임명했다. 카보우르는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를 몰아내려면 프랑스를 끌어들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프랑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영국-프랑스가 주도하는 크림 전쟁(18531856)에 군대를 파견했다. 사르데냐가 크림전쟁에 참전하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후 카보우르는 프랑스 나폴레옹 3세를 만나 비밀 협상을 체결했다. 사르데냐가 오스트리아 속령인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공격할 때에 프랑스가 지원하는 조건으로 니스(Nice)와 사보이(Savoy)를 양도한다는 조건이었다.

 

사르데냐 왕국의 에마뉴엘 2세 /위키피디아
사르데냐 왕국의 에마뉴엘 2세 /위키피디아

 

이제 2차 독립전쟁이 시작된다. 사르데냐는 군대를 동원해 롬바르디아를 공격했고, 프랑스 지원군이 뒤따랐다. 사르데냐-프랑스 연합군은 롬바르디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고 에마뉴엘 2세와 나폴레옹 3세는 밀라노에 입성했다. 이제 베네치아로 공격할 시점에 나폴레옹 3세는 배신을 때렸다. 프랑스 국왕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협정을 맺어 휴전협정을 맺는다.

사르데냐 왕국은 프랑스의 배신에 격분했고, 카보우르는 총리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프랑스에 이양하기로 한 니스와 사보이를 넘겨주지 않았다. 사르데냐는 토스카나, 파르마, 모데나, 볼로냐, 페라라 등을 합쳐 중앙이탈리아 연방을 구성하고, 곧이어 합병해 버렸다. 18601월 카보우르는 다시 총리직에 올랐다.

 

가리발디의 나폴리 입성 /위키피디아
가리발디의 나폴리 입성 /위키피디아

 

이때 주세페 가리발디의 활약이 나타난다.

가리발디는 어려서 마치니가 이끄는 비밀조직 청년이탈리아당(Young Italy)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오스트리아의 수배를 피해 남미로 건너갔다. 남미에서 리오그란데. 우르과이 독립운동 참가하다가 18481차 독립전쟁이 벌어지자 귀국했다. 1차 독립전쟁이 참전했지만 실패로 끝나자 그는 다시 미국, 남미, 중국, 필리핀을 전전하다가 1854년 다시 귀국했다.

가리발디는 사르데냐 왕국이 주도하는 2차 독립전쟁에 알프스의 사냥꾼’(Hunters of the Alps)이라는 민병대를 조직해 참전했다. 그는 이때 공화파 지도자인 마치니와 결별하고 사르데냐 왕국이 이탈라이 독립운동을 주도할 유일한 세력임을 인정하게 된다.

18601천명으로 원정대(Expedition of the Thousand)를 구성해 나폴리-시칠리아 왕국을 공격했다. 그의 민병대는 붉은 옷을 입었기 때문에 붉은 셔츠단( Redshirts)이라 불렸는데, 붉은 셔츠단은 강철 같은 군기 아래 행군 도중 길가의 오렌지 나무에 열린 오렌지 한 알조차 따먹지 않을 만큼 민간인 피해 방지에 철저했다고 한다.

가리발디가 이끄는 1쳔명의 붉은셔츠 부대는 연전연승했다. 당시 나폴리-시칠리아 연합왕국의 병력은 15만명이었는데, 가리발디는 영웅적인 전투력과 천재적 전략으로 이탈리아 반도의 절반에 해당하는 두 왕국을 손에 넣는데 성공했다. 그는 에마뉴엘 2세의 이름으로 시칠리아의 독재자’(dictator of Sicily)임을 선언했다.

그는 사심이 없었다. 이탈리아 남부에서 그의 인기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시실리-나폴리를 직접 통치할수도 있었지만, 그는 점령지를 에마뉴엘 2세에게 넘겨주었다. 18601026일 에마뉴엘 국왕이 이탈리아 중부 테아노(Teano)를 찾아왔을 때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국왕이라는 호칭을 부르며 깍듯하게 모셨다.

이제 가리발디는 교황령 공격에 나섰다. 그가 교황령을 진입하자 에마뉴엘 2세와 카보우르가 말리고 나섰다. 아직 교황령에는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사르데냐는 프랑스와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르데냐는 군대를 파견해 가리발디 군의 이동을 막았다. 사르데냐군이 발포해 일부 사상자가 나고 가리발디가 부상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아군끼리의 교전을 중단시키고 스스로 체포되었다. 그는 잠시 수감되었다가 풀려나 사르데냐의 카프레라 섬에 들어가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1861317일 교황령과 베네치아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한채 이탈리아 의회를 소집하고, 이탈리아 국왕에 등극한다.

이때 미국에서 남북전쟁(1861~1865)이 일어났다. 미국에서도 가리발디가 인기였고, 북군의 39 민병대 이름을 가리발디 연대로 명명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가리발디에게 북군 총사령관을 제의했지만, 가리발디가 거절했다고 한다.

 

가리발디는 1866년 다시 무기에 손을 댔다. 이른바 이탈리아 3차 독립전쟁이 벌어졌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벌어지자 이탈리아 왕국은 프로이센 편에 서서 오스트리아령 베네치아를 공격했다. 이때 가리발디는 왕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를 격퇴하고 베네치아와 북서부의 땅을 차지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벌어지자 이번에도 이탈리아는 프로이센 편에 섰다. 드디어 프랑스의 후원을 받던 교황령을 점령할 때가 온 것이다. 이때 가리발디가 나서지 않았다. 이탈리아 왕국의 군대는 18709월 로마로 향해 진격했다. 곧이어 로마 성문이 열리고 에마뉴엘의 군대는 로마시를 접수했다. 이탈리아 반도는 변병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하나의 군주 아래로 통일되었다.

 

1870년 이탈리아왕국의 로마 함락 /위키피디아
1870년 이탈리아왕국의 로마 함락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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