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 흑선에 놀란 일본…양이론서 개국론으로
페리 흑선에 놀란 일본…양이론서 개국론으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2.04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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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과 싸워 이길수 없다”…해외 유학, 실전 통해 개국으로 전환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최고조에 이른 19세기 후반기에 비서구지역에서 유일하게 산업화에 성공해 제국주의로 나선 나라가 일본이다. 유럽국가와 전투에서 승리해 아프리카에서 홀로 독립을 유지한 에티오피아는 산업화를 하지 못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천황과 막부(幕府)의 이중 정치체계에다 전국의 수십개 번()이 준독립 상태로 활개치는 봉건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하나의 정치 체계를 형성한다. 그들은 곧이어 제국주의 반열에 올라 동양의 패권자 중국을 제압하고 서구열강과 대회전을 벌인다. 세계 역사에서 예외적 존재로 등장한 일본은 어떻게 19세기말 무력의 시대에 어떻게 외세를 극복하고 서구세력과 맞설수 있었을까.

 

1850년대 일본도 서구의 무력 시위에 겁을 먹었고, 한국, 중국, 베트남에서처럼 외세에 대한 강한 증오와 배척운동이 벌어졌다. 가장 큰 충격은 185372일 에도만(동경만) 어귀에 도착한 미국 페리(Matthew C. Perry) 제독 휘하의 미국 함대였다.

우라가(浦賀) 해협에 도착한 미국 함대는 군함 4척에 60포문, 군사 967명이었다. 미국 군함은 당시 일본의 가장 큰 배보다 6배 이상 컸다. 일본인들은 검은 색의 미국 군함을 쿠로후네(黑船)이라 부르며 겁에 질렸다. 페리 함대는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받으라고 했다. 미국의 함포외교에 놀란 일본은 마지못해 친서를 받는다. 페리 제독은 1년 후에 올 터이니, 대답을 하라고 한다.

미국의 요구는 일본의 개항이었다. 자기네 배가 마음놓고 일본 항구를 이용할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미국은 이 무렵 산업화 성숙단계에 접어들었고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캘리포니아를 얻어 태평양을 넘보고 있었다.

미국이 일본에 항구를 열라고 요구한 것은 두가지 목적 때문이었다. 첫째는 중국 무역의 길목에 있었고, 둘째는 고래산업 때문이었다. 당시 석유가 등장하기 이전이어서 고래 기름은 타면서 연기를 내지 않고 밝은 불빛을 발했기 때문에 등대와 가로등, 공공건물, 부자집 가정용으로 많이 쓰였다. 포경선은 한번 출항하면 2년 정도 바다를 떠돌아 다녔기 때문에 중간에 석탄 연료와 식량을 보급받기 위해 항구를 필요로 했다.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소설 모비딕(Moby Dick)이 나온 것도 이 무렵(1851)이었다. 당시 미국은 최대 고래잡이 국가였다. 일본에서 포경선과 선원들의 피항지를 찾았던 것이다.

 

1854년 페리 제독의 미국 군함(쿠로후네)들이 일본 에도만에 두 번째로 방문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1854년 페리 제독의 미국 군함(쿠로후네)들이 일본 에도만에 두 번째로 방문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당시 일본은 쇄국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15876월 도쿠가와(徳川) 막부는 천주교를 사교로 판정하고 금교령을 내렸고, 외국인 신부의 입국을 막기 위해 쇄국을 단행했다. 이후 막부는 나가사키(長崎)의 데지마(出島) 한곳만 열어 놓고 외국배의 기항을 금지했다.

일본 내에서 개항 여부를 놓고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 쇄국 정책의 연장으로 서양오랑캐를 배척하는 양이론(攘夷論)과 미국과 싸워 이길수 없으니 항구를 열어야 한다는 개국론(開國論)이 맞섰다.

페리 제독은 18542월 일정을 앞당겨 에도만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1년전보다 더 많은 함대가 진을 쳤다. 막부는 미국의 검은 배에 머리를 숙여 가나자와(神奈川)조약(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한다. 이로써 일본은 에도만 입구 시모다(下田)항과 홋가이도의 하코다데(函館) 두 항구를 개방하게 된다.

250년간 일본을 통치한 에도 막부(江戶幕府)가 서양 포함에 굴복하자, 일본 내에는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을 복권시키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이 목소리를 높이게 되었다. 이때부터 기득권 세력을 유지하려는 막부와 이에 대항하는 각 번()의 치열한 내란이 15년 간 전개된다.

 

페리 선장과 미국 선원들을 그린 일본 목판화 /위키피디아
페리 선장과 미국 선원들을 그린 일본 목판화 /위키피디아

 

존왕양이의 본거지는 조슈(長州) 번이었다. 도쿠가와 막부 수립 초기에 도요토미(豊臣) 측에 섰던 두 번은 막부 말기(幕末)에 천황의 권력회복을 주장하며 반막(反幕) 진영에 앞장섰다. 막부는 두차례 조슈를 정벌한다. 첫 번째 전쟁(1864)에서 조슈 번이 굴복했지만, 두 번째 전쟁(1866)에서는 막부가 패했다. 막부의 쇠약이 눈에 두드러지면서 큐슈 남부 일대의 샤쓰마(薩摩) 번이 조슈 번과 삿초(薩長) 동맹을 맺고, 도사(土佐) 번이 중개에 나서면서 막부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존왕양이론의 근거지 /위키피디아
존왕양이론의 근거지 /위키피디아

 

이 내란기에 막부와 각 번은 젊은이들을 해외에 유학을 보냈다. 막부를 지지하든, 천황을 지지하든 일본 지식인들은 서양문물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막부나 번은 외세를 이기기 위해서는 서양문물을 배워야 하고, 이를 통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일치했다.

 

막부파 지도자 가쓰 가이슈(勝海舟, 1823~1899)의 젊을 때 일화는 서양 지식에 목마른 일본 식자층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서구문물을 습득하려면 네덜란드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쓰는 23세때 네덜란드어 사전을 사려고 했는데 가격이 60냥으로 엄두도 못냈다. 가쓰는 난학(蘭學, 네덜란드 학문)에 해박한 의사 아카기(赤城)라는 사람이 그 사전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그 의사는 사전을 1년간 빌려보는 값으로 10냥을 내라고 했다. 가쓰는 1년 동안 58권이나 되는 사전을 두 벌 베껴 한 벌은 10냥에 팔아 빌린 대금으로 지불하고 나머지 한권으로 공부를 했다. 이 필사본 사전이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다.

가쓰는 난학 가운데 특히 병학(兵學)에 관심이 많았다. 일본을 강력한 국가로 육성하려면 서양의 전쟁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관련 서적을 알아보았더니 이미 서점에서 팔려 나가고 없었다. 다행히 그 책자를 가진 사람을 알게 되어, 그 책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밤 10시 이후에 와서 보고 가라고 했다. 가쓰는 매일밤 10시에 그의 집에 가서 반년만에 그 책을 모두 필사했다.

가쓰는 서양책에서 배운 지식으로 소총을 만들고 대포를 제작했다. 그는 막부군대를 총지휘하는 자리로 올라갔으며, 반막부파와의 막후협상에서 유신 세력에 손을 들어주었다.

 

초기의 개회론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도 서양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페리 제독의 흑선(구로후네)을 보고 경악했다. 그는 저런 군함을 만드는 나라에 직접 가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개인적으로 외국에 나가는 것은 국법으로 금지되었다. 그는 밀항을 해서라도 미국에 가야한다는 일념으로 미군함 당국에 간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는 앞서 고향에서 쇼카손주쿠(松下村塾)이라는 학원을 내고 문하생들에게 그의 사상을 전수했다. 그의 문하생은 조슈번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가쓰라 다로(桂太郎) 등 조슈 번에서 메이지(明治) 유신을 주도한 중심인물들이다.

 

쿠로가네 사건 이후 일본에선 유학 붐이 일어났다.

막부는 유능한 청년들을 네덜란드로 유학보냈다. 이중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라는 인물은 유학 6년만에 네덜란드에서 준공한 최신예 군함을 타고 귀국했다. 그는 막부에 충성했지만, 메이지유신 이후에도 문부, 외무, 농상무 대신을 역임하며 일본의 기둥이 되었다. 막부는 법학 전공자도 네덜란드와 영국에 유학을 보냈다.

각 번에서도 별도의 유학생을 보냈다. 반막부파 조슈 번에서는 1863년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5명을 막부 몰래 영국에 보내 유학시켰다. 이들은 영국에서 철도와 광산등 공학을 배웠다 또다른 반막부파 사쓰마 번에서도 막부측 금지령을 어기고 19명을 프랑스로 유학시켰다.

당시 유학비는 엄청 비쌌다. 한 사람의 유학비가 여비까지 포함해 연간 1,000냥이었는데, 이는 저택 2채 가격이었다. 막부와 각 번주들은 서양기술 도입에 거액을 아낌없이 쓴 것이다. 이 유학생들은 막부의 지원을 받았든, 번주의 지원을 받았든 유신 이후에 일본의 인재로서 산업화에 기여하고 고위 관료로 성장했다.

 

1863년 미군 함정의 조슈 시모노세키 함포사격 /위키피디아
1863년 미군 함정의 조슈 시모노세키 함포사격 /위키피디아

 

비슷한 시기에 조선과 청나라, 일본의 동양 3국 지식인들은 모두 양이론을 외쳤다. 그런데 유독 일본의 양이론자들만 개국론으로 사상적 전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서양과 싸워 이길수 없다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적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양이파의 본거지였던 조슈 번의 이토 히로부미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영국의 모든 것, 특히 해군기술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가망이 없습니다.”고 썼다. 런던에 도착해 반년이 되던 시기에 이토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더 타임스에 조슈와 영국 함대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는 뉴스를 더 타임스를 통해 접하게 되었다. 그들은 영국과의 싸움이 무모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귀국했다.

조슈 번은 서양세력 축출을 실행에 옮겨 수도를 육지로 이전시킨후 1863년 미국과 프랑스 상선에 대해 포격을 가했다. 미국 함대는 조슈 포대를 포격하고 군함 두척을 격침시켰고, 이어 프랑스 군함도 조슈의 진지를 포격한 다음 병사를 상륙시켜 주택을 불지르고 무기를 노획해 돌아갔다. 막부는 조슈에 사신을 보내 외국 배를 공격하지 말라고 설득하지만, 조슈는 사신을 죽이며 막부의 명을 거부했다.

이듬해인 1864년 영국, 프랑스, 미국의 연합해군이 조슈를 공격했다. 이 때 영국 유학중에 돌아온 이토와 이노우에는 급거 귀국해 중재를 시도했다. 결국 조슈는 연합해군에 항복하고 평화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을 계기로 조슈번의 양이론은 막을 내리고, 양이론자들은 개국론으로 의식을 전환한다. 이들은 서양에 무력으로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개국을 통해 부국양병을 도모한 후 양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양이론을 버리고 막부를 토벌하는 토막론(討幕論)으로 새롭게 무장한 개혁론자들은 메이지 유신의 중추인물로 떠오른다.

 

양이(攘夷) 감정을 고양하기 위한 일본인의 그림(1861) /위키피디아
양이(攘夷) 감정을 고양하기 위한 일본인의 그림(1861)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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