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전과 창대에 필이 꽂힌 영화 ‘자산어보’
정약전과 창대에 필이 꽂힌 영화 ‘자산어보’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04.11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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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와 현실과의 괴리, 사실과 허구의 조화, 이상세계의 추구

 

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는 정약전과 그의 수제자 창대를 줄거리로 잡고 있다. 실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서 상상력을 가미했는데, 창대의 전개에 가공의 기법이 동원했다. 제작진들이 창대보다는 차라리 문순득의 실화를 부각시켰더라면 당대 실학자들이 모자랐던 세계화에 대한 견문을 넓힐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사실(fact)와 가공(fiction)을 두루 섞은 팩션(faction) 성격의 작품이다. 이준익은 가공의 부분에서 자신의 지향점을 제시하려 했다. 감독은 정약전을 통해 실용의 세계를 추구하고, 창대를 통해 현실의 적용을 시도했다. 정약전과 창대는 유배자와 어부, 사대부와 서얼, 배운자와 배우려는 자의 관계로 충돌과 화해를 반복한다.

 

정약전의 초상화 /문화재청
정약전의 초상화 /문화재청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은 정약용의 둘째 형으로, 어려서부터 실학자 이익의 학설을 배웠고, 과거에 급제해 병좌좌랑을 역임했다. 그는 천주교도 이벽과 이승훈 등과 교류했으나 천주교가 조상의 제사를 기피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멀리했다. 서양의 학문과 종교에는 관심을 가졌지만 독실한 신자가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그는 권력을 잡은 노론이 남인 세력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한때 천주교에 입문한 것이 빌미가 되어 멀리 흑산도로 유배를 갔다. 당시 유배생활은 생활의 어려움도 있었지만 언제 사약을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다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막막함 속에서 세월을 보내는 게 일상사였다. 이런 답답한 세월을 정약전은 물고기를 연구하는데 활용했다. 고립된 세계에서 공자왈 맹자왈 하는 것보다 물고기의 내장을 꺼내 관찰하는 게 그의 재미였고, 그에겐 그게 실용의 학문이었다.

 

창대(昌大)의 본명은 장덕순(張德順)으로 알려져 있다. 김훈의 소설 黑山(2011, 학고재)에도 창대가 등장한다. 창대는 정약전이 자산어보에서도 물고기에 관한 경험적 지식을 전해준 흑산도 청년으로 소개한 인물이다. 장약전이 어보의 이름을 흑산어보로 하려 했으나, 창대가 흑산의 흑()은 어둡고 부정적인 의미가 있으니, 검은 뜻의 또다른 한자 자()를 사용해 자산어보(玆山魚譜)로 하자고 권해 정약전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정약전이 물고기에 대한 열정에 넘쳤지만 물고기의 생태를 알기는 어려웠고, 뱃일과 물일을 하는 창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상어의 번식에 관한 자산어보의 내용은 창대의 도움이 없었으면 정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준익은 창대란 인물에 포커스를 맞췄다. 감독은 창대를 양반 가문의 서자로 설정하고, 주자를 공부해 출세를 바라는 인물, 계급적 한계를 벗어나려는 인물로 그렸다. 창대가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얻었다는 기록은 없다. 이준익의 상상력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이준익은 조선말기 삼정문란의 폐해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하려다 실패한 인물로 창대를 비약시켰다.

창대의 비약적 전개가 영화 자산어보의 핵심이자 주제다. 이준익의 비약은 다소 과장으로 치닫는다. 정약전이 임금 없는 세상을 읊조리는데, 그 세상은 공화정이다. 당시 실학자들 사고에는 공화정이란 개념이 없었다. 작가 또는 감독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영화 장면 /네이버영화
영화 장면 /네이버영화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가거댁(이정은)과의 사이에 아이를 낳은 것은 사실이다. 가거댁은 김훈의 소설 黑山에서 순매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가거댁은 흑산도 호장(이장)의 딸인데, 낳은 아들의 이름은 정학소다. 정약전은 본부인에게서 정학초란 외아들이 있었는데 유배중에 본처 소생 아들이 죽었다. 정약전은 서자 학소로 대를 이으려고 했지만 당시 양반가의 전통이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약용과 의논 끝에 학소가 아들을 낳으면 학초의 양자로 들어가게 해서 대를 잇기로 했다고 한다. 정약전은 시대를 앞서나간 실학자였지만 현실을 거스르지 못한 사대부에 불과했던 것이다.

 

영화 장면 /네이버영화
영화 장면 /네이버영화

 

영화에 잠깐 소개되는 문순득은 정약전의 소개로 세상에 알려진 인물이다. 오히려 창대보다는 문슨득의 역사적 의미가 크다.

문순득(文淳得, 1777~1847)은 우이도에 살던 홍어장수였다. 1801(순조 1) 12월 출항해, 흑산도 인근 태사도에서 홍어를 사 돌아오던 중에 흑산도 근처에서 풍랑을 만났다.

일행은 18021월 일본 오키나와의 류큐국(琉球國)에 표착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류큐국은 독립국이었다. 류큐 사람들은 문순득 등 표류자들을 잘 보살펴 주었고, 일행은 그곳에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 8개월 동안 류큐에 체류하면서 일행은 현지 언어를 배우고, 현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조선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냈다. 방법은 중국으로 가는 류큐국의 조공선을 타고 중국에 간 다음 조선으로 건너가는 것이었다.

180210, 일행은 조공선에 몸을 싣는다. 그들은 고향집으로 돌아가는줄 알고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중국으로 가는 길에 또 풍랑을 만났다. 2차 표류였다. 이번에는 류큐 남쪽으로 떠내려가 여송국(呂宋國, 필리핀)에 표착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일행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문순득만 여송에서 9개월을 지내면서 현지 언어를 습득했다.

18038월 문순득은 여송에서 상선을 얻어타고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마카오에 도착해 난징과 베이징을 거쳐 180412월 조선 한양에 도착하고, 마침내 집을 떠난지 32개월만인 18051월 고향인 우이도로 돌아오게 된다.

 

문순득의 표류 여정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문순득의 표류 여정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고향에 돌아온 문순득은 홍어 장사를 하기 위해 흑산도에 들렀다가 그곳에 유배온 정약전을 만나게 된다. 문순득은 정약전에게 풍랑을 만나 표류하며 보고 들은 바를 전해주었고, 정약전은 문순득의 체험담을 날짜별로 기록했다.

문순득의 표류기는 정약전의 동생 정약용에게도 전해졌다. 정약용은 여송국에서 사용하는 화폐의 유용함을 전해듣고, ‘경세유표에서 조선의 화폐개혁안을 제안하게 된다. 당시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로, 남미 칠레 광산에서 생산한 대량의 은()을 아시아에 유통하고 있었고, 아시아, 특히 중국의 통화는 은본위제였다.

문순득은 정약전에게 지난 4년간의 표류하며 여행한 내용을 구술하고, 정약전이 받아 적었다. 얼마후 정약전이 대흑산도로 유배지를 옮기는 바람에 표류기를 완성하지 못했다.

이를 안타까워 하던 동생 정약용이 제자 이강회(李綱會)를 우이도로 보내 문순득을 만나게 하고, 완성을 보지 못한 표류기록을 마무리해 표해시말’(漂海始末)을 엮어 냈다. 표해시말은 이강회의 유암총서’(柳菴叢書)에 실려 있다. 문순득의 후손들은 그 책을 대대손손 보관하고 있다가 후세에 공개함으로써 그 사실이 알려졌다.

 

흑산도 정약전의 유배지 모형 /문화재청
흑산도 정약전의 유배지 모형 /문화재청

 

정약용 형제들은 후대에 많은 관심을 받았다. 김훈은 소설 흑산에서 잘 알려진 정약용 대신에 그의 둘째 형인 정약전을 주인공으로 써 내려갔다. 김훈이 집필 후기에서 확실한 세계를 향해 피흘리고 나아간 사람으로 정약용보다 정약전을 선택한 것이다.

역사학자 이덕일이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2012, 다산초당)에서 정약용을 중심으로 형제들을 조명했다.

 

자산어보 복제본 /문화재청
자산어보 복제본 /문화재청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의 네 형제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가까운 곳, 남양주시 마재에서 살았다. 첫째 정약현은 딸 명련의 남편으로 황사영을 맞는다.

시대는 정조가 죽은 후 순조가 11세로 즉위하고, 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실시하던 때였다. 외척이 준동하고, 노론 벽파가 권력을 다시 잡았다. 그들은 남인들을 숙청하기 위해 천주교를 끌어들였다. 정약전의 형제들은 당쟁의 피해자였다.

네 명의 정씨 형제는 소용돌이 치는 조선후기 역사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천주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정약종과 황사영은 죽음으로 맞서면서 끝까지 천주교를 버리지 않았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순교하고자 스스로 결심한 셋째 정약종으로 인해 목숨을 건졌다.

 

영화의 주무대는 흑산도다. 정약전은 절해고도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서당을 세우고 흑산 바다에서 눈앞의 물고기를 들여다보며 실증적인 어류생태학 서적인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썼다. 정약전은 유배 16년째 되던 해에 우이도에서 숨졌다.

이준익은 영화 자산어보를 흑백으로 처리했다. 이준익은 화려한 색채를 배제해 인물이 가진 본질적인 행태에 더욱 집중할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영화 장면 /네이버영화
영화 장면 /네이버영화
영화 장면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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