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 왕비가 된 女해적 사이이다
모로코 왕비가 된 女해적 사이이다
  • 김현민기자
  • 승인 2019.05.21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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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 귀족의 딸로 태어나 지중해 서쪽에서 기독교국에 해적질

 

여성이 해적이 되었다는 얘기는 드믈다. 동양에서는 청나라 시대에 정일수(鄭一嫂)라는 여걸이 남지나해를 휘어잡았다는 전설적인 스토리가 전해진다. 서양에서는 사이이다 알 후라(Sayyida al-Hurra)라는 여자 해적이 기록에 남아 있다.

동서양의 두 여성 해적왕은 신분이 다르다. 정일수는 밑바닥 출신이지만, 사이이다는 귀족 출신이었다. 게다가 사이이다는 영지를 가지고 있어 굳이 해적이라고 분류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유럽인들의 입장에서는 사이이다가 이끄는 이슬람 해적들에게 습격당하고 약탈당했으니, 해적과 다름 없었다.

 

사이이다 알 후라 초상화 /위키피디아
사이이다 알 후라 초상화 /위키피디아

 

사이이다 알 후라라는 이름에서 알 후라(al-Hurra)는 아랍어로 여왕(qeen)이라는 의미다. 여왕 사이이다인 셈이다.

그녀가 태어난 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1485년으로 알려져 있다. 태어난 곳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Andalusia)를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국가 그라나다(Granada)였다.

때는 바야흐로 유럽에서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이 대회전을 벌일 때였다. 유럽의 동쪽에서는 1453년 오스만투르크가 동로마의 마지막 거점인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을 함락한 이후 발칸반도를 잠식해 가고 있었다. 그 반대편 스페인에서는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국왕이 결혼을 통해 나라를 합치고, 1492년 남쪽에 남아있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레콩키스타(Reconquista)에 성공했다. 앞서 1487년 포르투갈은 해협 건너편의 모로코를 공격해 식민화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1492년 그라나다 함락을 그린 그림(Francisco Pradilla Ortiz 작) /위키피디아
1492년 그라나다 함락을 그린 그림(Francisco Pradilla Ortiz 작) /위키피디아

 

사이이다는 스페인 안달루시아에서 그라나다의 이슬람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태어난지 얼마후 그라나다의 마지막 거점이 스페인 연합왕국에 의해 함락되자, 그녀의 가족은 무어인들과 함께 모로코 북쪽 해안도시 테투안(Tétouan)으로 도주해 그곳을 거점으로 삼았다.

그녀는 어려서 행복하고 평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로코로 도주하는 변란의 과정을 지켜보았고, 부모의 교육 영향으로 기독교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 왔다. 사이이다는 16살의 나이에 테투안의 태수(太守)와 결혼했다. 태수는 아버지의 친구로, 그녀보다 30살이 더 많았다. (혹자는 태수의 아들과 결혼했다고 한다.)

사이이다는 남면을 도와 테투안의 각종 사업에 간여하면서 사실상 부태수의 역할을 했다. 1515년 남편이 죽자 그녀는 태수가 되었다. 테투안의 사람들은 그에게 알 후라(qeen)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며, 통치자로 받아들였다.

이슬람의 세계에서 여성이 국가나 영지를 계승 또는 상속받는 일이 흔치 않은데, 사이이다가 남편의 영지를 물려받은 것은 무어인들이 스페인을 지배할 때 남자의 혈통이 끊어질 때 여성에세 계승권을 주는 유럽의 풍습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해설이 있다. 사이이다는 테우안을 잘 통치했다고 한다.

그녀의 해적활동 기간은 테투안 태수가 된 1515년부터 권력에서 물러난 1542년까지다.

사이이다는 테투안 태수로서 그라나다를 빼앗긴데 대한 복수전을 펼쳤다. 그녀는 기독교를 적으로 간주하고 함대를 파견해 해적활동을 벌였다.

그녀는 오스만투르크의 알제 총독인 하이르 앗딘(바바로사)과 연대를 했다. 지중해 동쪽바다는 하이르 앗딘에게 맡기고, 서쪽은 자신이 맡았다.

해적질은 테투안에 많은 소득을 가져왔다. 약탈품이 넘쳐났고, 기독교 포로들에 대한 석방금을 받아냈다. 그녀는 이렇게 모은 돈으로 안달루시아를 공격해 옛 그라나다를 회복하겠다는 꿈을 꾸었다.

기독교도들 가운데에서도 지중해 패권을 장악한 그녀를 존경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사이이다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포로를 석방하는 협상에 참여했다. 스페인 역사서에도 스페인과 사이이다 알 후라와의 협상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사이이다와 관련지 /구글지도
사이이다와 관련지 /구글지도

 

1541, 모로코의 술탄 아메드 알 와타시(Ahmed al-Wattasi)가 테투안을 방문해 사이이다에게 청혼을 했다. 그러면서 결혼식은 지기 왕국의 수도인 페즈(Fez)에서 갖자고 했다. 사이이다는 결혼식을 테투안에서 하는 조건으로 청혼을 받아들에겠다고 했다. 술탄도 양보했다. 둘은 테투안에서 결혼했다. 사람들은 사이이다가 테투안에서 결혼을 고집한 것은 영지의 지배권을 놓치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고, 시민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보이려는 의도였다고 해석했다. 모로코 역사상 국왕(술탄)의 결혼식이 수도가 아닌 곳에서 열리기는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그녀는 왕비로서 자신의 친척과 측근들을 모로코 고위관료로 임명해 나라의 통합에 힘썼다.

그녀는 테투앙을 30년간 지배하다가 1542년 조카 알 만드리(Muhammad al-Hassan al-Mandri)에 의해 전복당했다. 예멘타임스에 따르면, 그후 그녀의 재산과 권력은 모두 빼앗겼다. 사이이다는 권력을 놓은 후에 셰프사우엔(Chefchaouen)이란 도시로 가서 20년을 더 살있다. 1561714일 그는 자연사했다.

 

테투안과 항구 /위키피디아
테투안과 항구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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