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 한풍루,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 보물 되다
무주 한풍루,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 보물 되다
  • 이인호 기자
  • 승인 2021.06.22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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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관아 건물, 조선 석조미술의 극치 평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무주 한풍루와 경기도 유형문화재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 등 2건의 문화재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었다.

문화재청은 두 건의 보물에 대해 해당 지방자치단체와 협조, 체계적인 보존·관리·활용하도록 할 방침이다.

 

무주 한풍루

조선 시대 관아 건물이다. 선조 때 문신 백호(白湖) 임제가 호남의 삼한(三寒)인 무주 한풍루(寒風樓), 남원 광한루(廣寒樓), 전주 한벽당(寒碧堂)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문화재다. 현판은 한석봉이 썼다고 전해지며, 수많은 묵객이 글과 그림으로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당시 시대상과 문화상을 알 수 있는 건물이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5세기 조선전기 문신 성임과 유순 등이 한풍루를 보고 쓴 시와 신증동국여지승람등 여러 기록을 통해 조선 초기부터 존재해 왔음을 알 수 있고, 임진왜란(1592) 당시 전소된 이후 다시 건립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무주 한풍루는 정면 3, 옆면 2칸의 중층 누각 팔작지붕 건물로 이익공 양식 등의 특성을 보이고 있어 조선 후기 관아누정 격식에 충실하게 건축되었다. 누하층에 평주 설치, 누하주와 누상주의 비례와 흘림 수법, 대량의 항아리보 치목, 추녀에 강다리 설치 등의 건축적 요소에서 구조적 안정감과 미적가치를 고려한 무주 한풍루만의 건축적 특이성을 볼 수 있다.

최근에 목재 연륜 연대 분석에서 16~17세기 중수 당시 기둥과 창방 등 주요 목부재가 확인되어 진정성 있는 복원이 이루어졌다는 점과 임진왜란 전후의 중수와 복설, 일제강점기 훼철될 위기에 있던 건물을 원래의 모습과 자리로 되찾으려 한 무주군민의 애환이 담긴 점, 우리나라 몇 안 되는 중층 관영 누각으로 17세기 시기적 특성이 잘 나타나 있는 점이 보물지정에 고려되었다.

 

무주 한풍루 /문화재청
무주 한풍루 /문화재청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

조선 전기 왕실에서 발원해 건립한 진신사리탑으로 규모가 장대할 뿐만 아니라 보존상태도 양호하며, 사리탑의 형식과 불교미술의 도상, 장식문양 등 왕실불교미술의 여러 요소를 알 수 있는 귀중한 탑이다.

사적 양주 회암사지(檜岩寺址) 내에 위치해 있으며, 발굴조사와 탑의 입지, 기록 등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었던 불탑임을 알 수 있다. 또 탑에 새겨진 다양한 조각은 조선 시대 왕실발원 석조물과 양식적인 부분이 비슷하며, 회암사 구역에 위치한 삼화상 탑과의 영향관계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사리탑은 팔각을 기본으로 구축된 다층의 기단부와 원구형 탑신,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팔각을 평면으로 지대석 윗면에 2층으로 조성된 기단을 구축하고 다른 승탑에 비해 기단 면석은 높게, 갑석은 두텁게 치석하여 현존하는 사리탑 중 가장 높은 기단을 구비하고 있다. 또한, 기단의 각 면에 다양한 장엄이 새겨져 있는데 용과 기린, 초화문(草花紋), 당초문(唐草紋), 팔부신중이 하층기단 대석으로부터 상층기단 갑석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조식되어 있다.

탑신부는 원구형의 탑신을 지닌 또 하나의 승탑을 올려놓은 형상이다. 이와 같이 지대석을 포함해 전체 4단으로 구축된 기단 상면에 다시 낮은 팔각형의 기단을 놓고 위에 원구형의 탑신과 옥개석, 보륜으로 이루어진 상륜부를 구비한 승탑을 구축한 형상이다.

전체적인 양식과 조영기법, 세부 문양들이 조선 전기의 왕릉을 비롯한 왕실 관련 석조물과 비슷하며, 사리탑의 규모, 치석 상태, 결구 수법 등을 고려할 때 당대 최고의 석공이 설계시공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 석조미술의 정수이자 대표작으로 간주된다.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 /문화재청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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