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 모시는 사당이 왜 남산에 있을까?
제갈량 모시는 사당이 왜 남산에 있을까?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1.12.12 08: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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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후 와룡묘 확산…임진왜란 때 명군이 모시고 와 전파

 

남산 둘레길을 걷다가 자그마한 사당을 만나게 된다.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전략가 제갈량을 모시는 와룡묘(臥龍廟).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소설 삼국지를 통해 우리에게도 친숙한 중국 고대인물이다. 출사표(出師表), 삼고초려(三顧草廬) 등의 고사가 제갈량에게서 연유했다. 그렇다고 2천년 전에 살았던 중국의 고대인물을 이역 멀리 우리나라 수도의 한가운데에 모셔야 했을까.

 

와룡묘 외부 /박차영
와룡묘 외부 /박차영

 

제갈량은 명성이 높아 와룡(臥龍)선생이라 불렸다. 와룡묘는 제갈량의 별명에서 따온 것으로, 무덤()이 나이라 사당()이다.

삼국지의 주인공 관우(關羽)와 제갈량은 중국인에겐 신으로 모셔지는 인물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역사에 살을 붙인 소설로, ()나라가 멸망한 후 촉한을 정통계승국으로 설정했다. 따라서 제갈량과 관우는 중국 주류종족인 한족에게 나라가 어려울 때 우국충정으로 일어선 영웅호걸의 상징이다. 특히 관우는 중국인(한족)에게 재물의 신이요, 어려울 때 도와주는 귀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와룡묘 전경 /박차영
와룡묘 전경 /박차영

 

우리나라에 제갈량과 관우의 신이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1592~1598)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왜군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명군이 들어왔다. 명군은 한족이었고, 그들과 함께 제갈량과 관우의 신도 들어왔다.

조선왕조실록에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 38(1605)에 평안도 영유현에 공식으로 와룡묘를 짓게 했고, 그 후부터 여러 임금이 관원을 보내어 제를 올리고, 제문을 지어 보내거나 헌금(賜額)을 내는 경우가 있다고 전한다.

그 후 와룡묘는 전국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왜군을 물리치는 데 도와준 중국에 고마움을 표시했고,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울 남산 와룡묘가 처음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고종의 후궁인 엄귀비가 세웠다는 설이 있고, 사당 뒤 암벽에 제갈량의 영정이 새겨져 있었는데, 1862년에 제갈량을 흠모하는 이들이 와룡묘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와룡묘는 1924년 화재로 소실됐다가 1934년에 재건됐으며 1976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보수했다.

 

와룡묘 전경 /문화재청
와룡묘 전경 /문화재청

 

특이한 점은 와룡묘 경내에는 와룡묘, 단군성전, 삼성각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와룡묘는 정면 3,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를 얹은 건물이다. 그옆에 나란히 서 있는 단군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구조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인 맞배지붕 건물이다. 중국의 귀신과 우리역사의 시조, 우리토속신이 함께 모셔져 있는 것이다. 중국 도교의 신앙과 한국 토속신앙이 합쳐진, 혼합적 종교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곳이라 할수 잇다.

와룡묘 내부로 들어가면 2m가 넘는 제갈량과 관우의 석고상이 있다. 더불어 제사 의식을 위한 대북·소북·종 등 악기들도 갖추고 있다.

 

와룡묘 삼성각 /문화재청
와룡묘 삼성각 /문화재청

 

재미있는 사살은 남산 와룡묘의 소재지가 중구 예장동(藝場洞)이라는 점이다. 예정동은 일제시기에 일봄인들이 많이 거주해 일본식 지명인 왜성대정(倭城臺町)이라 했는데, 해방이후 일제 잔재청산의 차원에서 예장동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일본인들이 왜군을 물리친 명군의 흔적을 좋아했을리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사당은 살아 남았다.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조선인에게 외국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의식을 은근히 심어주고 싶었을까.

 

와룡묘 비각 /문화재청
와룡묘 비각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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