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 삼남길 1코스를 걷다
경기옛길 삼남길 1코스를 걷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04.22 1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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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양 관문길로 9.7km…경기도가 2013년에 전코스 개발

 

조선시대에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삼남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려면 경기도를 지나야 한다. 그 길이 경기옛길 삼남길이다.

삼남길은 경기도 관내를 지난다. 서울과 과천의 경계인 남태령에서 시작해 과천, 안양, 의왕, 수원, 하성, 오산, 평택을 지나 충청남도와 접하는 안성천에 이른다. 경기도는 20135월 삼남길 전구간을 걷기 코스로 개발했다.

서울로 진입하는 마지막 길이 한양관문길이다.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인 남태령에서 안양시 인덕원까지 9.7km. 삼남길 1코스를 걸어보았다. 도시화가 많이 진척되어 있지만, 곳곳에 옛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남태령 /사진=박차영
남태령 /사진=박차영
남태령옛길 표지판 /사진=박차영
남태령옛길 표지판 /사진=박차영

 

<남태령(南泰嶺)>

원래 여우고개라 불렸다. 그런데 18세기말, 정조가 수원화성에 았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을 지나면서 잠시 쉬어가게 되었다. 정조는 과천관아의 이방에게 이 길의 이름을 물었다. 과천 이방이 여우고개라고 하지 못하고 둘러댄 것이 남태령이었다는 설이 내려온다. 우리말을 천하게 여기고 한자로 된 말을 높이 평가하는 당대인들의 사고방식을 엿보게 된다. 이름처럼 큰() 고개가 아니다. 과장법이다.

 

남태령옛길 /사진=박차영
남태령옛길 /사진=박차영

 

<남태령 옛길>

과천에서 사당 방면으로 가는 길에 우측 숲길이 남아 있다. 이 길은 오래전부터 서울과 수원을 연결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현재의 남태령은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과 경기도 과천시 관문동을 연결하는 큰 도로이지만 옛날에는 사람 한명이 지나기 어려운 아주 좁은 길이었다. 하지만 이 길은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삼남(충청 전라 경상)으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이 길을 넓히면서 서울의 반쪽은 없어지고, 지금은 과천의 일부만 남아 있다.

 

성황신목 /사진=박차영
성황신목 /사진=박차영

 

<성황신목(城隍神木)>

원래는 과천동 4거리 횡단보도 중간지점에 있었으나, 1988년 도로 확장으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성황신목은 고사 상태인데, 나무의 안쪽에 다른 나무를 이식해 마치 성황목 안에서 다른 나무가 자라는 느낌을 주고 있다.

매년 음력 101일에는 성황신목제가 행해지고 있다. 예로부터 동네의 큰할머니와 제()의 전과정을 의논해 진행했다고 한다. 제물로 쓰이는 시루떡은 항상 3시루씩 하는데, 각각 도당신, 도당할머니, 구릉대감에게 바친다고 한다.

성황신목제는 동네사람들이 참여해 대동제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시 중단되었다가 다시 부활되었다. 제시가 끝나면 마을사람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었고, 참석하지 못한 집에도 음식을 나누어 주어 마을의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는 행사였다.

 

온온사 /사진=박차영
온온사 /사진=박차영

 

<온온사(穩穩舍)>

원래는 절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왕이 쉬어가던 객사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조 27(1650)에 축조되었다. ‘과천현 신수읍지에 따르면 현감 여인홍이 동헌을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조가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묘를 수원화성으로 옮긴 후 이름을 현릉원으로 고치고 참배하러 갈 때 이곳에서 쉬었다.

관악산 자락에 있어 주위 경치가 쉬어 가기 편안하다 하여 온온사라는 현판을 내렸다 한다. 지금도 온온사(穩穩寺), 부림헌(富林軒)의 현판이 있다.

 

과천현감 비석군 /사진=박차영
과천현감 비석군 /사진=박차영

 

<역대 과천현감 비석군>

온온사 옆에 역대 과천현감 비석군이 보존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지방관들이 자신의 업적을 과시한 유물이다. 본래 시흥군 과천면 관문리 흥천말 2495번지 도로변에 있던 곳을 이 곳에 옮겼다. 조선 정조6(1782)에 건립된 현감 정동준의 비로부터 1927년에 세워진 변성환에 이르기까지 모두 15명의 비석이 보존되어 있다. 대부분의 비석은 장방형의 비좌에 비신을 갖춘 전형적인 조선시대 양식이다.

 

과천향교 /사진=박차영
과천향교 /사진=박차영

 

<과천향교>

태조 7(1398)에 처음 세워졌는데, 정종 2(1400)에 소실되어 태종 7(1407)에 중건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불에 타 다시 세웠다가 숙종 16(1690)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1983919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되었다

건물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이루며 홍살문과 외삼문을 지나면 교육 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이 있고, 내삼문에 들어서면 제사 공간인 대성전(大成殿)이 있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세운 조선시대의 지방 교육기관이다.

 

김영철기념비 /사진=박차영
김영철기념비 /사진=박차영

 

<김영철(金永哲) 기념비>

김영철(1920~1988)은 줄타기 명인이자 칠현금 산조의 명인이다.

. 과천시 갈현동에서 태어나 9세 때 스승 김관보에게 줄타기를 배워 전국적인 공연활동을 벌였다. 당대 최고의 명창 이동백 김창량 임방울 성우향 등 예인들과 함께 공연했다. 음악성이 뛰어나 칠현금이란 악기를 직접 제작해 연주했다.

1975년부터 1978년까지 한국민속촌에 정착하여 전속공연을 했고, 197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 줄타기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1988년 작고 후 그의 줄타기는 김대균에게 이어졌다.

과천은 전통 줄타기의 본향이다. 전통 줄놀음은 김관보를 통해 김영철 등 당대 최고의 광대들에게 이어졌다. 줄 광대들은 과천 갈현동 찬우물에서 학습을 했다.

 

가자우물 /사진=박차영
가자우물 /사진=박차영

 

<가자(加資)우물 또는 찬우물>

조선 22대 정조가 사도세자 능을 가면서 과천에 이르러 심한 갈증을 느끼자 한 신하가 근처의 우물물을 떠다 바쳤다. 정조가 그 물을 마시고 물맛이 좋다 하여 당상 품계의 벼슬을 내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가자우물은 임금이 가자(3품 이상의 품계)를 내린 우물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로부터 마을 사람들은 물맛이 좋고 차다고 해 찬우물이라고 불렀다.

 

김승철중위전사지 /사진=박차영
김승철중위전사지 /사진=박차영

 

<고 김승철(金承鐵) 중위 전사지>

고 김스얼 중위는 192712월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나 1950년 육군 소위로 임관해 복무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7사단에 배속되어 한강방어작전에 투입되었다가 과천시 갈현동 산13번지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인덕원터 /사진=박차영
인덕원터 /사진=박차영

 

<인덕원(仁德院)>

조선시대 환관들이 은퇴후 내려와 살면서 주민들에게 어진 덕을 베풀었다고 해서 인덕(仁德)이라고 했으며, 이 근처에 관리들이 숙식하도록 국가 여관인 원()을 만들어 인덕원이라는 지명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 15975월 인덕원에서 쉬어갔다고 적었다. 정조 임금이 사도세자 능에 참배할 때 여섯차례나 인덕원을 지나갔다고 한다.

 

삼남길1코스 /네이버지도
삼남길1코스 /네이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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