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년 간척의 땀방울로 형성된 신안 임자도
140년 간척의 땀방울로 형성된 신안 임자도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06.04 12: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말 1885년부터 시작, 섬의 30%가 매립지…그곳에 아름다운 튤립축제가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면의 임자도는 천혜의 비경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장 긴 모래사장을 간직한 섬이다. 모래 토양에서 자연산 들깨(荏子)가 많이 생산되어 임자도라고 했다. 곳곳의 큰 웅덩이들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아 한국 유일의 사막으로 불리는 곳이다. 임자도 면적은 46.6, 해안선 길이 108.32km인데, 전체 면적의 30% 가량이 네덜란드처럼 해수면 아래에 있었다. 조선말부터 140년 가까운 세월 동안에 섬 주민들이 바작에 돌을 지고 둑을 쌓아 바닷물을 밀어내고 섬으로 만들었다. 섬 주민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흩어져 있던 6개 섬이 하나로 합쳐져, 오늘날 봄이면 튤립축제가 벌어지는 풍요로운 임자도가 건설되었다.

 

임자도의 튤립축제 /신안군 홈페이지
임자도의 튤립축제 /신안군 홈페이지

 

목포대 문병채 교수와 광주교대 홍기대 교수가 GIS(지리정보시스템)에 의해 임자도의 2000년전 모습을 시뮬레이션 한 결과, 임자도의 원래 면적은 29.94으로, 현재의 46.6보다 17작은 섬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 농경지와 염전으로 활용되는 지역은 모두 바다였고, 현재 산으로 되어 있는 부분만이 육지였다. 2000년 전에 임자도는 지금의 임자도 면적의 3분의2에 불과했다. 따라서 임자도의 원지형은 현재보다 훨씬 많은 섬들이 분포하고, 물과 썰물 시에 바닷물이 들고 나는 끝없는 갯벌이 펼쳐진 모습이었을 것이다. 당시 해안선은 지금의 108.32km보다 긴 141.27km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조류와 파도에 의해 모래 언덕이 퇴적되면서 크고 작은 섬들이 서로 연결되어 갔다. 다만 남동쪽으로는 거의 퇴적이 일어나지 않아 내륙에 깊은 만()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모래가 퇴적되어 임자도의 면적은 7.61정도 늘어나 간척 이전의 면적은 37.55정도가 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임자도의 위치 /네이버 지도
임자도의 위치 /네이버 지도

 

문병채·홍기대에 따르면 임자도에 최초로 간척의 기록이 나타난 것은 고종 22(1885)이다.

임자도 방조제관리대장에 1885년에 수도2 방조제 1곳이 조성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는 수심이 현재와 같이 깊지 않고 습지를 이룬 지역이 광범위하게 펼쳐졌으로 추정된다.

문병채·홍기대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말 간척 면적은 0.1으로 추정되며, 이는 현재 임자도 면적 46.60.2%에 해당한다. 고종 시대에 개척된 면적은 소규모에 불과했고, 개척된 면적은 논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임자도 원지형 /문병채·홍기대 논문 캡쳐
임자도 원지형 /문병채·홍기대 논문 캡쳐

 

임자도 간척이 본격화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다. 토목공법이 발달한데다 일본자본의 상륙, 산미증산계획등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 간척사업은 수심이 상당히 깊은 범위까지 진행되었다. 방조제 길이도 이전보다 더

길어졌다. 도찬2(987m), 도찬5(1,106m), 삼두2(674m), 도찬3(601m) 등이 모두 이 시기에 축조된 것들이다. 이 시기에 약 13.80의 땅이 간척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현재 임자면 면적 46.60의 약 29.6%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간척으로 하나의 섬으로 합쳐진 지역이 구산리와 대기리 일대다. 그 이전까지 이 지역은 본섬과 분리된 독립된 하나의 섬 지형 이었으나, 간척사업으로 본섬과 이어지게 되었다.

당시 임자도 간척은 일본 자본에 의해 진행되었기 때문에 섬 주민의 경제 향상과는 동떨어진 일이었다.

 

1930년대 임자도 /문병채·홍기대 논문 캡쳐
1930년대 임자도 /문병채·홍기대 논문 캡쳐

 

1930년대 임자도에 관한 분석자료를 보면, 당시 면적은 43.45이었고, 해안선 길이는 116.69km였다. 이 때까지의 간척면적은 5.80에 이르렀다. 1950년도 임자도에 관한 분석자료를 보면, 면적은 45.60이고, 해안선 길이는 113.12km이다.

1945년 해방 이후 1950년까지 나라가 어수선하고 경제불황과 재정난 등으로 간척사업을 벌일 여유가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1950년 자료는 일제말기의 자료로 볼수 있다. 두 통계를 통해 일제강점기에 임자도 간척 면적은 8.0에 이른다는 계산이 나온다.

 

1950년대 임자도 /문병채·홍기대 논문 캡쳐
1950년대 임자도 /문병채·홍기대 논문 캡쳐

 

해방 이후 간척 사업은 1980년대 국토건설과 함께 서해안 일대에서 발하게 전개되엇다. 임자도도 추가 간척이 이뤄졌다. 해방 이후 간척 면적은 1.0로 일제 때 간척면적보다는 활발하지 않았다. 일제 때 임자도에선 대략의 간척이 마무리되고, 해방 이후엔 추가적인 일부의 간척이 이뤄졌던 것이다. 1980년대 이후에 간척보다는 갯벌을 그대로 두자는 환경보전 운동이 대두하면서 임자도 간척은 염전의 일부 보수 이외에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1980년대 임자도 /문병채·홍기대 논문 캡쳐
1980년대 임자도 /문병채·홍기대 논문 캡쳐

 

우리나라 서남해의 간척의 역사는 매우 길고, 기술 수준도 높다. 특히 서해안은 갯벌이 잘 발달되고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며 연안에는 많은 섬들이 산재하고 있어 간척에 적합한 곳이 많았다. 특히 목포를 중심으로 한 서남해역은 리아스식해안과 많은 섬이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해안선 길이가 전국의 51.1%에 이른다. 전남지역의 매립면적은 368,133ha, 전국의 간척면적 635,418ha58%를 점하고 있다.

그중에서 임자도는 간척 조건이 유리하기 때문에 구한말부터 간척이 시작되어 다른 지역에 비해 선도적으로 간척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임자도의 역사는 간척의 역사라고 할수 있다.

 


<참고자료>

문병채·홍기대, GIS를 이용한 임자도의 간척과정과 지역변화 연구, 2005, 지리학연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