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고구려, 동해안에서 4백년 영토싸움
신라-고구려, 동해안에서 4백년 영토싸움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6.18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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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세기에 신라, 4세기 후반에 고구려, 5세기 후반부터 신라 장악

 

신라, 백제, 고구려가 어우러진 삼국시대에 한반도 서부가 가장 주요한 전투지였다. 하지만 동해안에서도 고구려와 신라가 400년에 걸쳐 치열하게 영토전쟁을 벌였다. 동해의 패권을 쥐기 위한 것이다.

동해안은 백두대간에 막혀 길고 좁게 해안이 이어져 있고, 일찍부터 해상활동이 활발했다. 따라서 신라와 고구려의 전투는 육상은 물론 해상을 통해 이뤄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선 신라가 2세기 초반에 동해안을 장악하면서 고구려와 말갈 연합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다. 그후 4세기 후반에 고구려가 동해안을 차지한다. 5세기 들어 신라가 다시 동해안 거점을 하나씩 차지해나간다.

 

파사 이사금 23(102)에 신라가 삼척에서 흥해에 이르는 동해안의 실직왕국을 복속시킨다. 이에 그 북방과 서쪽에 포진한 예국과 말갈의 저항이 본격화했다. 이어 고구려가 옥저를 예속시킨 이후 강원도 해안을 따라 남하하면서 예족과 말갈을 끌어들여 신라와 전쟁 상태에 들어갔다.

신라의 힘이 강할 때는 함경도와 강원도 경계선인 안변까지 밀고 갔고, 고구려의 힘이 강할 때엔 포항 흥해까지 밀렸다. 안변에서 흥해까지 1,000리 동해안이 2~5세기까지 400년동안 신라와 고구려, 예국, 말갈이 뺏고 뺏기는 전쟁터가 됐다. 신라 이사부 장군이 실직에 이어 하슬라 군주가 되고 나서야 400km에 달하는 동해안이 신라의 품으로 들어가게 된다.

 

[1단계] 2~4세기, 신라의 동해안 장악고구려-말갈 연합군 반발

 

1차로 실직국이 102년 멸망한후 2세기 중엽까지 말갈족이 대대적으로 신라가 점령한 동해안 일대를 공격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지마, 일성, 조분 이사금조의 기록을 보자.

 

지마 14(125) 1, 말갈이 북변을 침입해,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했다.

지마 14(125) 7, 말갈이 다시 대령(大嶺) 목책을 습격하고 니하(泥河)를 넘어왔다. 임금이 백제에 서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백제는 5명의 장군을 보내 돕게 했다. 적병은 이 소식을 듣고 물러갔다.

일성 4(137) 2, 말갈이 국경에 쳐들어와서, 장령(長嶺) 지방의 다섯 군데 목책을 불태웠다.

일성 5(138) 7, 알천(閼川)의 서쪽에서 군대를 사열했다.

일성 5(138) 10, 임금이 북쪽을 두루 살피고, 태백산(太白山)에서 제사를 지냈다.

일성 6(139) 8, 말갈이 장령을 습격하여 백성들을 노략질했다.

일성 6(139) 10, 말갈이 다시 습격해왔으나, 눈이 심하게 내리자 물러갔다

일성 7(140) 2, 장령에 목책을 세워 말갈을 방어했다.

조분16(245) 10, 고구려가 북쪽 변경에 침입했다. 우로가 병사를 이끌고 나가 공격했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馬頭柵)을 지켰다.

 

이 기록을 보면, 125년에서 140년까지 15년간 말갈이 집중적으로 신라의 북변을 공격했다. 신라는 목책을 세워 방비하고, 임금이 군대를 사열하고, 동해안 북쪽 국경을 순시하며 태백산에 제사를 지내며 시위를 했다.

기사에 나오는 대령, 장령등은 구체적인 위치는 알수 없지만, 영동과 영서를 가르는 백두대간의 어느 고개였던 것 같다. 대관령일수도 있지만, 백두대간을 넘나드는 고개 이름 가운데, 대치(大峙), 댓재등의 이름이 많아 어디인지 비정하기 어렵다.

니하(泥河)가 어디인지에 대해서 동해로 흐르는 작은 하천 가운데 강릉 근처의 것으로 보는 견해와 남한강 상류인 강원도 정선군 임계의 송계리산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로 나눠져 있다. 필자는 후자, 즉 산맥을 넘어 영서지방에 있는 송계리산성으로 본다.

정선 임계면 송계리 산성의 축성설화가 남아있는데, 성을 쌓을 때 돌이 없어 마고할멈이 동해에서 돌팔매로 돌을 던져 성을 쌓았다고 한다. 축석이 무너지면 그 돌은 간데 없고, 그 자리에 원상태로 메워진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하슬라 사람을 동원해 니하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마고할멈의 전승기사와 닮아 있다.

대령, 장령, 니하의 위치가 어디이든, <삼국사기>엔 실직국이 멸망한 이후 말갈이라는 존재가 갑자기 부상하며 신라를 공격하는 기사가 반복된다.

말갈의 존재에 대해 학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만주에 있던 숙신계 일족이 고구려의 힘에 밀려 한반도 동해안과 내륙지역으로 내려온 것인지, 영동의 예국과 영서의 맥국을 지칭하는 것인지, 예맥과 말갈이 같은 종족인지, 확실치 않다.

삼국시대 초기에 가장 가까운 시기에 쓰여진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동해안에 말갈의 존재에 대한 서술이 없고, 예국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12세기 중엽에 편찬된 <삼국사기>에는 예국에 대한 언급이 실종하고, 말갈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다. 김부식이 북방세력인 묘청의 난을 진입한후 <삼국사기>를 쓰면서 북방 종족을 모두 오랑캐로 지칭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실직국 멸망 이후 동해안에 출몰하는 말갈은 예국이며, 백제 서북부에서 충돌한 말갈은 맥족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예족이든, 맥족이든, 말갈이든, 그 종족이 모두 신라에 흡수되면서 하나의 언어를 쓰고 단일 문화를 형성하며 오늘 한민족의 원류가 된 것은 분명하다.

필자는 영동말갈과 예족, 영서말갈과 맥족을 동일한 개념으로 보기로 한다.

말갈족의 신라북변 침략기사는 2세기 중엽에 뚝 끊어지고, 3세기 중엽 조분이사금 조엔 고구려가 직접 공격하는 기사가 나온다. 말갈이 고구려에 복속된 것을 의미한다. 아마 이때 고구려군에는 말갈족이 동원돼 별도의 부대를 형성했을 것이다.

실직국이 멸망하고, 150년이 지난 3세기 중반 이후에야 신라는 강원도 동해안 일대에 지배권을 서서히 확립해간 것으로 보인다.

 

[2단계] 4세기 후반, 고구려 남하

 

4세기말엔 상황이 달라진다. 고구려가 남하하면서 동해안도 고구려의 수중에 떨어진다.

신라 눌지마립간은 재위 37(392)에 고구려의 강압으로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냈다. 이어 서기 400년 광개토대왕은 신라의 요청으로 보병 5만을 보내 임라가라 종발성(從拔城)까지 진출해 왜군을 무찔렀다.

광개토대왕비의 비문 해석을 보자.

 

그 때 신라왕(눌지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했다. 태왕이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 고하게 했다.

10(400) 경자년에 왕(광개토대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그 곳에 왜군이 가득했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했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해 임나가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했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戌兵) □□신라성(新羅城)왜가 크게 무너졌다. (해독불가)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廳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하여 스스로 조공했다.“ (광개토대왕비문)

 

<광개토대왕비>에서 보듯, 눌지마립간때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나 다름 없었다. 광개토대왕시대 5만명의 병력은 약간의 과장이 있었다 해도 엄청난 병력이었다. 남행한 고구려군은 퇴각이후 일부가 남아 신라 영내에 머물렀고, 그 대가로 실직국 옛영토를 장악했다. 그 흔적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삼척군(三陟郡)은 원래 실직국(悉直國)으로써 파사왕 때 항복하여 왔는데 지증왕(智證王) 6년 즉, 양 천감(天監) 4(서기 505)에 주로 만들고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삼았다. (삼국사기 잡지 명주편)

 

[3단계] 5세기 중반 이후, 신라의 동해안 북벌

 

곧이어 신라의 반격이 개시됐다. 이사부가 실직주 군주가 되기 직전, 5세기 중엽 이후 50년간 삼척, 강릉을 두고 고구려와 신라는 혈투를 벌였다.

 

눌지 34(450) 7, 고구려의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실직(悉直)의 들에서 사냥하고 있었는데, 하슬라성(何瑟羅城)의 성주 삼직(三直)이 병사를 내어 습격하여 그를 죽였다.

자비11(468) 봄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의 실직성(悉直城)을 습격했다. 그해 9, 하슬라(何瑟羅) 사람으로서 15세 이상인 자를 징발하여 니하(泥河)에 성을 쌓았다.

소지 3(481) 2, 비열성(比列城)에 행차해 병사들을 위로하고 군복을 내려줬다. 그해 3,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호명(狐鳴)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또 미질부(彌秩夫)에 진군했다. 우리(신라) 병사가 백제,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서 그들을 막았다. 적이 패하여 물러가자 니하(尼河)의 서쪽까지 추격하여 쳐부수고 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라가 먼저 공격했다. 신라는 5세기 중엽에 하슬라(강릉)까지 다시 진출했는데, 450년에 고구려 장수가 사냥을 핑계로 실직(삼척)에 쳐들어왔다. 고구려가 평창 일대의 니하(尼河)를 통해 백두대간을 넘어 삼척을 공격해 강릉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강릉에 주둔하던 신라군이 남하해 고구려군을 무찔렀다. 이 사건 이후 신라는 고구려에 대한 반격을 개시한다.

468년에도 고구려군은 말갈과 연합해 실직을 공격했고, 신라는 하슬라 주민을 동원해 고구려군의 길목인 니하에 성을 쌓았다.

4812, 소지 임금은 비열홀(함경남도 안변)까지 진출한 신라군을 군복을 하사하며 위로했다.

하지만 그 다음달 고구려는 말갈족을 이끌고 다시 신라를 공격해 미질부성(포항 흥해읍)까지 공격했다. 고구려의 공격로는 영서지방에서 출발해 삼척을 빼앗고, 해안을 따라 경주에서 가까운 흥해까지 내려갔다. 신라는 나제동맹을 활용해 백제에 구원을 요청했고, 신라는 영동지방을 되찾을수 있었다. 나제동맹에는 가야까지 포함돼 있었던 것 같다. 고구려군이 종발성(從拔城)까지 처들어가 쑥대밭을 만들었으니, 가야에서 고구려에 대한 반발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픽=김현민
그래픽=김현민

 

소지왕 3년 이후 동해안은 신라의 영토로 굳어진다. 신라는 동해 일대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신라는 흥해에서 삼척까지 성을 대대적으로 구축한다.

 

지증왕 5(504), 파리(波里), 미실(彌實), 진덕(珍德), 골화(骨火) 등 열두 개 성을 쌓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리는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미실은 포항시 흥해읍으로, 지증왕 시대에 동해안 일대에 신라 성들이 줄지어 건축된다.

지증왕의 12성 구축 1년후인 505년 그의 조카 이사부(異斯夫)가 실직 군주로 부임한데 이어 512년 하슬라 군주로 이동하게 된다. 이후 강릉 이하 영동지방은 신라의 땅으로 굳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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