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의 뱃길①…이동 경로
삼별초의 뱃길①…이동 경로
  • 아틀라스
  • 승인 2019.06.22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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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섬에서 진도 거쳐 제주도에서 최후 결전…전라·경상 해안 공격

 

이 글은 시인이자, 고대해양탐험연구소장인 채바다씨가 2015년 이사부사업회 주관 세미나에서 발표한 원고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징기스칸의 몽골제국은 동서양을 휩쓰는 막강한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세계 지도를 바꾸어 나갔다. 몽골은 고려의 국왕을 입조시켜 고려의 복속을 시도했다. 몽골의 이러한 전략은 본격적인 삼별초(三別抄)의 등장으로 벽에 부딪치게 된다.

1270(원종 11) 고려 원종은 몽골에 사대할 것을 약속했다. 고려 원종(元宗)은 몽골 군대 아래 호위를 받으며 귀국할 정도로 허수아비 왕이나 다름없었다. 원종은 몽골에 의존해 왕권을 이어가는 나약함을 보였다.

원종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삼별초였다. 삼별초는 나라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는 왕실에 대항하기에 이르렀다. 원종은 삼별초에 가담하고 있는 사람들의 명부를 압수하는 한편 삼별초 해산을 명령했다. 삼별초의 반발은 거세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명부가 몽골의 손에 들어가면 자신들의 위태로울 것은 물론 고려의 방위 정보를 넘겨주는 것으로 판단했다.

 

삼별초는 이런 상황을 결속력을 다지는 기회로 삼았다. 또한 몽골에 대항해 고려의 복속을 차단하는 구국의 길로 나섰다. 삼별초는 고려 왕실이 굴욕적인 복속에 맞서 목숨을 걸고 나섰다.

삼별초는 고려를 지키려는 결연한 정신과 불굴의 의지가 불 타 올랐다. 삼별초의 용맹스런 와 불퇴전의 용기들은 이미 해상 전투에서 자신감이다.

삼별초가 강화에서 진도로 이동하는데 1,000여척을 앞세웠다고 하니, 그들의 위세에서 알 수 있다. 이 정도의 선박을 동원해 이동한 것은 웬만한 준비와 각오 없이는 결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삼별초의 해양 장악은 고려의 해양 군사력 즉 조선기술, 항해 기술들의 뛰어 났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삼별초가 동원한 선박들은 거의 해군선으로 보아야 한다. 고려는 이미 예성강 벽란도을 거점으로 송나라뿐만 아니라 멀리 베트남 인도 아라비아 중동까지 세계 해양 무역으로 누비는 해양제국이었다. 세계 최강의 몽골제국에 맞서 싸우기 위해 그들은 먼 바다로 나가야 했다.

 

그래픽=김현민
그래픽=김현민

 

해산 명령과 명부 압수로 압박한 고려 조정에 반기를 들고 앞장 선 사람은 배중손(裵仲孫)과 노영희(盧永禧)였다. 이들은 왕손인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고 정통성을 찾는 수순을 취하여 진도로 향했다. 이들은 진도에 상륙해 용장산성을 근거지로 거제도,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등 주요 도서들을 장악하며 세력을 확산해 나갔다.

이에 개경 왕실과 몽골은 연합을 이루어 반격에 나섰다. 12709, 개경 정부는 김방경(金方慶)을 앞세워 몽골의 장수 아해가 이끄는 군대와 연합하여 진도를 공략했다. 11월 연합군은 진도를 여러 차례 공략해 접전을 벌였으나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당시 경상, 전라도에서 올라온 세곡미는 주로 해상로를 통해 개경으로 운송되었다. 이런 주요 해상로를 삼별초가 장악했다. 진도의 해상로가 열려 있지 않는 한 개경으로 가는 조운선들은 통과하지 못했다.

삼별초가 남서 해안의 중요한 해상로를 완전히 장악했다. 세곡미를 실은 조운선이 통과조차 하지 못하게 되자, 개경의 왕실은 큰 난관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몽골은 삼별초 지휘부에 여러 차례 회유책을 쓰며 사신을 진도로 보냈으나 삼별초는 이들을 억류하며 회유책에 응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고려왕실과 몽골은 합세하여 진도를 공격했으나 여러 차례 실패했다.

 

1271515일에 고려 왕실과 몽골은 김방경과 홍다구, 흔도를 앞세워서 진도의 용장산성에 파상적인 총공격으로 삼별초을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이 싸움에서 삼별초의 수장 배중손은 전사하고 승화후 온은 홍다구(洪茶丘, 고려인으로 몽골에 귀화한 무장)의 손에 살해당하고 말았다. 결국 진도는 이들 연합군에게 함락되어 새로운 퇴로를 찾아 제주로 향했다.

 

김통정(金通精)은 삼별초의 잔여 세력을 이끌고 제주로 이동했다. 이 때 남해 등지에서 활약하던 장수 류존혁(劉存奕)도 군선 80척을 거느리고 합류했다. 이들은 김통정을 중심으로 진용을 정비하고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1271(원종12) 11, 고려정부는 이창경과 문선열을 원나라에 보내 탐라에 들어간 삼별초들이 남해 여러 섬에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고 있다. 장차 이들은 육지로 상륙할 염려가 있으니 섬멸에 적극 나서달라.”고 요청했다.

탐라로 이동한 김통정은 1272년에 전라도 연안에까지 활동영역을 넓혔고, 충청경기 서해 연안으로 세를 확장했다. 이어 1273년에는 몽골군이 주둔하던 경상도 연안까지 위협했다.

삼별초는 영호남의 섬 뿐만 아니라 육지로 상륙해 관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육지에 있는 군현 관아까지 공격해 수령을 잡아 갈 정도로 고려정부를 긴장시켰다.

진도를 진압하고 안심했던 고려 조정은 전함병량도감을 설치해 삼별초 공격에 맞섰다. 몽골은 고려를 복속시킨 이후에 일본 정벌에 나설 준비를 했는데, 삼별초가 제주도를 중심으로 남해안을 습격하며 항거를 계속하면 일본 원정 계획에 치명타를 줄 것이라고 우려했다. 몽골은 고려 조정을 압박해 삼별초 진압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제주 항파두리 항몽 순의비(사적 396호) /문화재청
제주 항파두리 항몽 순의비(사적 396호) /문화재청

 

고려 조정은 우선 삼별초를 회유하는 작전을 벌였다.

원종 12723월 금훈(琴熏)을 탐라역적초유사(逆賊招諭使)로 임명해 산원 이정과 함께 탐라로 파견했다. 그들은 역풍을 만나 보마도(甫麻島)에 정박했으나 삼별초 선단에 발각되어 추자도에 억류되고 초유문서는 김통정에게 보내졌다. 김통정은 회답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후 풀어주었다.

너희들은 일찍이 사람을 진도에 보내어 우리를 유혹하며 마음을 늦추게 하고는 대군을 끌고 와서 공파하였다. 우리의 부모처자는 물론, 모든 것을 잃은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바다. 이제 또 우리를 멸하고자 유혹하니 마땅히 모조리 죽여 버릴 것이로되, 만일 그렇게 되면 우리의 뜻을 누가 가서 전할 것이냐. 그러므로 너희를 놓아주는 것이다.”

목숨을 건진 금훈은 곧바로 원나라로 들어가 삼별초를 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무력으로 평정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고려와 몽골은 탐라에 대한 군사적인 조처가 아니면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지만 곧바로 이행하지 않았다. 배를 건조하고 시간 벌면서 회유하는 양면 전략을 세웠다.

홍다구는 김통정을 설득하기 위해 김통정의 조카 김찬과 이소 환문백 등 5인을 보냈다. 김통정은 김찬만 남기고 모두 참했다.

삼별초의 의지를 확인한 고려와 몽골은 더 이상 탐라에 대한 군사적인 조처가 아니면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1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공격할 준비가 되자 원종 12732월 여·몽 연합군은 나주에 집결해 제주 공격에 나섰다.

고려-몽골 연합군의 제주 상륙 계획은 변덕스런 해상 날씨로 순조롭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병선 160척은 추자도를 거쳐서 제주에 도착했다. 42812,000여 명의 여몽 연합군은 항파두성 서북쪽, 명월포, 군항포, 동쪽으로 함덕포로 나뉘어 공격했다.

고려-몽골 연합군은 김통정이 이끄는 삼별초를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연합군의 파상 공격에 김통정을 비롯한 삼별초는 최후의 종말을 고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 때 여몽 연합군은 김원윤 등 6명을 공개 처형하고 지휘관급 35명과 사졸 1,300여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이때 잡힌 포로는 100~300명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제주 싸움에서 삼별초는 모두 섬멸된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김방경이 삼별초 진압을 끝낸 것은 428일이다. 몽연합군이 영산강 중류의 나주 반남현에서 49일 출정해 탐라 소탕작전을 끝내는데 대략 20일이 걸렸다.

삼별초군을 진압한 뒤 여몽 연합군은 몽골군 500, 고려군 1,000명 모두 1,500명을 투입해 삼별초 잔여세력 소탕과 치안유지 등을 맡도록 했다. 몽골은 탐라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다루가치를 파견함으로써 직할령으로 편입시켰다.

삼별초에 대한 전공으로 김방경은 시중에 올랐고, 변윤(邊胤)은 판추밀원사(判樞密院使), 김석(金錫)은 상장군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나유와 송보연은 대장군으로 승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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