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재 부족이 초래한 산업혁명
목재 부족이 초래한 산업혁명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2.09.14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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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목재 부족으로 석탄 활용법 개발…석탄이 목재 대체

 

숲은 인간에게 많은 것을 제공해 왔다. 사람들은 숲에서 목재와 땔감을 얻었다. 석탄과 석유가 대중화되기 전에 주요 연료는 나무였다. 나무를 태워서 그 열로 조리를 하고 난방을 하고 철을 녹이고 그릇을 구웠다. 나무가 없었으면 인류는 겨울을 나지 못했을 것이다. 나무는 또 집을 짓는 주요 재료였다. 나무 껍질에서 옷을 만들었다. 선박을 만드는 주재료가 나무였다. 나무에서 물감을 얻었고, 화장품 원료를 채취했고, 약재를 구했다. 숲에서 제공하는 임산물은 먹을 것을 제공했고, 부식토는 비료로 사용되었다. , 그리고 나무는 인류 역사의 오랜 동반자였다.

가장 먼저 산업화를 시작한 유럽도 중세 이전엔 숲이 울창했다. 아우구스투스 시기에 로마군이 토이토부르거에서 전멸한 것은 독일의 숲이 가로막았기 때문이었고, 로빈 후드가 의적 활동을 할수 있었던 것은 13세기 영국 숲이 대단히 울창했음을 반증한다. 인류는 오랜 기간 동안에 자연을 개척해왔고, 숲은 인간에 의해 변형되어 왔다. 농경지를 개간하면서 숲이 줄어들었고, 목초지 확대는 숲을 파괴했다. 그렇더라도 중세이전까지 인간과 숲은 비교적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산림의 균형이 깨진 것은 15세기부터였다. 오랫동안 평형 상태를 유지하던 유럽 인구가 이때부터 증가했다. 인구감소를 초래했던 페스트 펜데믹이 이 무렵 잠잠해진데다 작황도 비교적 순조로왔다. 인구증가는 새로운 위기를 초래했다. 숲을 가진 자와 새로운 진입자 사이에 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인구 증가는 산림 소유권 분쟁으로 확대되었다. 추가된 인구는 토지부족으로 초래했고, 농지에서 유리된 인구가 늘어났다. 빈민화한 인구는 생계를 위해 숲을 개척하게 되었고, 공유지이거나 소유자가 애매한 산지에 대한 소유권 다툼이 빈발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유럽 각국에 봉권 영주의 권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되는 추세였다. 개인 간의 숲 분쟁에 국가 또는 왕실이 개입하면서 숲에 대한 국가 보호라는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스위스 알프스 국립공원의 숲 /위키피디아
스위스 알프스 국립공원의 숲 /위키피디아

 

영국에선 런던이 위치한 동남부에서 이미 11세기말부터 숲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숲이 농경지화하면서 삼림의 황폐화가 구조적으로 나타났다. 늘어 나는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구릉이나 낮은 산지가 농지로 변해 갔고, 숲이 빠르게 사라졌다. 땔감 수요가 증가하면서 나무의 성장 속도가 목재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다.

숲과 농지는 회복기간이 다르다. 농토는 휴경을 하더라도 수확한 후 1~2년이면 회복이 가능한데 비해 임야는 일단 벌목되면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야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 인구증가는 우선 급한대로 회복기간이 긴 산림을 벌목해 농지로 전환하는 방향을 선택하게 되었다.

영국 뿐 아니라 중부 유럽도 숲의 황폐화 과정을 밟았다. 울창하던 독일의 숲은 인구 증가와 영주의 탐욕에 점점 농지로 변해갔다. 땔감 부족으로 뗏목을 이용해 나무를 먼 곳으로 운반하는 직업도 생겨났다. 대장간에서는 목재 부족으로 쉬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프랑스 왕실의 재무 장부에 땔감이 귀해지고 생활 필수품의 가격이 오르고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는 이런 현상을 반영한다.

 

나무 부족은 국가의 개입을 초래했다. 급기야 엘리자베스 1(재위 1558~1603) 시기에 영국 의회는 수목 벌채를 금지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법령은 강의 20km 이내에 있는 나무의 벌채를 금지했다. 코번트리라는 도시는 숲에서 목재를 가져다가 붙잡힌 사람은 다리에 평틀을 세워 공개하도록 규정했으며, 두 번 위반하는 사람은 시에서 추방되었다.

목재부족은 네덜란드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서유럽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영국과 네덜란드에 목재 무역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발트해와 스칸디나비아, 러시아엔 목재가 풍부했다. 재정 위기에 빠진 영주들은 서유럽에 나무를 팔았다. 북유럽의 영주들은 나무를 팔아 번 돈으로 교회를 짓고 호화묘지를 만들고 성채를 올렸다.

해양진출이 가속화하고 선박이 대형화하면서 조선용 자재의 수입이 늘어났다. 13~16세기에 베네치아, 16세기엔 네덜란드, 16~17세기엔 영국에서 조선산업이 발달했다. 조선소들은 외국에서 나무를 수입했다. 처음에는 강 주변에서 벌채를 해 뗏목으로 운반했다. 목재 수요가 확대되면서 벌목이 내륙 쪽으로 깊숙하게 들어갔다. 철도가 놓이고 임도(林道)가 뚫리면서 유럽의 울창한 숲이 대단위로 잘려 나갔다.

 

16세기 이후 유럽에서 전쟁은 일상화되었다. 전쟁으로 숲은 황폐화되었고, 전쟁에 필요한 전함 건조와 무기 제조에 나무가 필요했다.

1톤의 철을 생산하는데 숯 1,000톤이 필요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금속의 용융점까지 온도를 올리는 연료는 목탄 밖에 없었다. 목탄을 조개탄처럼 만들어 바람을 불어 넣으면 열의 온도를 1,100°C까지 올릴수 있다. 구리는 의 용융점은 1,083°C여서 숯을 잘 가열하면 구리를 녹일수 있다. 철은 용융점이 1,539°C로 높다. 목탄()을 가열하면 철을 말랑말랑하게는 하지만 완전히 녹이지는 못한다. 말랑말랑해진 철을 두드리고 식히기를 반복해 강철을 만들어 냈다.

선박 건조에도 많은 목재가 소요되었다. 선박용 목재는 땔감용 나무보다 재질이 우수해야 했다. 영국이 해양대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함대 건조용 목재를 조달하느라 산림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16세기 중반 이후 산림 면적이 국토의 30%에서 15%로 줄어들게 되었다.

민간 상선도 늘어나면서 영국에서 목재는 점점 귀해졌다. 영국은 당초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제조업을 육성하지 않을 방침을 세웠지만 목재 가공업과 조선소만은 동부 해안에서 허용했다. 1714~1763년 사이에 영국 해군의 신규 군함은 두배로 늘어났고, 여기에 들어간 목재 대부분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울창한 숲에서 벌목된 것이었다.

 

영국 국토 중 숲의 비율 추이 /위키피디아
영국 국토 중 숲의 비율 추이 /위키피디아

 

목재부족 현상이 심각해 지면서 1780년 이전까지 영국에선 철()을 국내에서 생산하기보다 수입하는 것이 더 쌌다. 영국은 부족한 철을 스웨덴과 러시아에서 수입했다. 그 이유는 철을 녹이는데 연료로 사용하는 목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석탄을 이용한 제철기법이 개발되기 이전에 유럽에선 목재와 숯을 제련 연료로 사용했다.

이에 비해 유럽의 변방이었던 러시아와 스웨덴에서는 울창한 숲이 보존되어 있었고, 목재가 풍부했다. 게다가 러시아와 스웨덴에는 질 좋은 철광석이 지하에 풍부한 매장되어 있었다. 18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철의 수요가 급증했다. 영국은 국내산보다 더 싼 외국산 철을 수입하게 되었다. 목재 부족으로 제철용 숯의 가격이 비쌌기 때문이다.

목재가 부족해지면서 영국 가정에서는 석탄을 땔감으로 사용했다. 석탄에는 유황이 석여 있기 때문에 매케한 냄새가 났고, 연기는 빨래를 더럽혔다. 처음에는 빈민층에서 석탄을 썼고, 부자들은 목재와 숯을 사용했다. 하지만 목재 부족이 심해지면서 17세기엔 부유층도 석탄을 써야 했다. 영국을 방문한 유럽 사람들이 석탄을 사용하는 빈민층의 지저분한 모습을 거지처럼 여겼다고 한다.

 

제련에 사용되는 엄청난 양의 목재는 제련업자들에게 많은 부담을 유발했다. 이런 가운데 석탄층이 인접한 곳에 있던 제철업자들이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용융점이 낮은 납 제련에 석탄을 사용했다. 영국 브리스톨 근처의 납 제련소에서 목탄 대신에 석탄과 이탄, 토탄을 혼합해 밀폐된 용광로에 납을 융해하고 정련하는데 성공했다. 이 회사는 1678년에 특허권을 출원하면서 그 배경으로 목재 가격의 상승과 부족을 피할수 있다는 사실에 석탄의 이점이 있다고 밝혔다.

이후 영국은 석탄을 이용한 제철, 제강법을 개발해 나갔고, 마침내 1856년 헨리 베세머(Henry Bessemer, 1813~1898)에 의해 강철 제조법이 개발되었다. 석탄을 활용하면서 영국의 제철산업은 급속하게 팽창하고, 산업혁명을 가속화했다

 

원목 /위키피디아
원목 /위키피디아

 

영국은 아메리카 식민지를 목재 조달의 대상으로 활용했다. 뉴잉글랜드엔 목재가 풍부했다.

뉴햄프셔 피스카타쿼 강 주변엔 1655년경에 20여개의 제재소가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1705년엔 70개로 늘어났다. 다른 강 주변에도 제재소가 들어섰다. 뉴잉글랜드는 1771~1773년 사이에 제재목 18, 지붕널 14, 통널 13를 수출했다.

목재는 배를 만드는 주요 재료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강철 구조선이 나오지 않았다. 뉴잉글랜드인들은 풍부한 목재를 활용해 선박을 건조했다. 당시 뉴잉글랜드의 선박건조비는 본국의 절반이었다. 목재가격이 쌌기 때문이다. 17세기말에 뉴잉글랜드는 세계 주요 선박건조지가 되었다.

선박 건조는 다양한 부대산업을 출현시켰다. 돛과 밧줄도 생산하는 제조업이 생겨났다. 1700년엔 뉴잉글랜드의 조선소는 15개나 되었고, 생산량이 런던과 브리스톨에 이어 세 번째가 되었다.

뉴잉글랜드 상인들은 지역에서 건조한 선박을 소유하며 해외무역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들은 남부의 버지니아와 카리브해 섬들을 연계해 유럽과 삼각무역을 하게 되었다. 뉴잉글랜드 상인들은 자기네 지역에서 생산한 어류와 육류를 카리브해 섬들에게 팔아 그곳에서 설탕과 소금을 샀다. 그들은 카리브해에서 산 설탕과 소금을 유럽에 팔고 그 돈으로 직물과 철물 등 공업제품을 사서 돌아왔다.

그들은 또 카리브해의 설탕으로 럼주를 만들어 아프리카에 팔아 노예를 사서 카리브와 버지니아에 팔았다. 또 어류를 스페인에 팔아 과일, 와인 등을 사와서 다시 영국에 팔았다. 아메리카 북동부 상인들은 대서양을 무대로 교역을 했으며, 점차 인도양과 지중해로 대상지를 넓혀 나갔다. 영국의 목재부족이 아메리카 식민지의 산업화를 촉진하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참고자료>

Dr. Bernd-Stefan Grewe, The Decline of Wood as an Economic Force with the Rise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채굴과 제련의 세계사(마틴 린치), ‘책으로 만난 세상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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