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무굴제국의 보물, 공작왕좌와 코이누르
빼앗긴 무굴제국의 보물, 공작왕좌와 코이누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1.20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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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침략 때 약탈…왕좌는 멸실, 다이아몬드는 돌고돌아 영국에 보관중

 

17385, 페르시아가 인도의 무굴제국을 침공했다. 무굴제국 황제 무하마드 샤는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Nader Shah)에게 항복했다. 이후 3개월 동안 페르시아 군대가 무굴의 수도 델리를 점령했다. 페르시아 군은 무굴제국의 금은보화를 남김없이 약탈해 페르시아로 운반했다. 페르시아가 약탈해간 재물은 당시 가격으로 어림잡아 7억 루피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현대의 가치로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당시 페르시아가 빼앗아간 무굴제국의 보물 가운데 황제가 정무를 보는 공작 왕좌와 역대 황제가 아끼던 다이아몬드 코이누르가 포함되었다. 이 두 보물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페르시아 국왕 나디르 샤가 무굴제국에서 빼앗은 공작왕좌에 앉아 있다.(그림) /위키피디아
페르시아 국왕 나디르 샤가 무굴제국에서 빼앗은 공작왕좌에 앉아 있다.(그림) /위키피디아

 

공작왕좌(Peacock Throne)는 무굴제국 5대 황제 샤자한 재위(1628~1658) 때에 제작되었다. 당시 무굴제국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샤자한(Shah Jahan)알라신의 그림자를 꿈꾸며 왕좌를 만들었다. 고대 이스라엘 전성기에 솔로몬왕이 성전을 짓고 왕좌를 만든 것과 유사한 논리였다.

시크교 전설에 따르면 공작왕좌는 가로 1.8m, 세로 1.2m, 두께 23cm의 직육면체 석판을 토대로 했다고 한다. 왕좌를 제작하는데 1톤이 넘는 순금이 들어갔고, 루비, 에메랄드, 사파이어와 같은 각종 보석 230kg을 촘촘하게 박아 넣었다. 샤자한 황제가 황후 뭄타즈 마할을 추모하며 타지마할을 건설하는데 500만 루피의 비용을 쏟아부었다. 공작왕좌를 만드는데 타지마할 건축비의 두배나 들었다고 한다.

샤자한은 즉위 7주년 기념식인 1635322, 이 화려한 왕좌를 신하들에게 선보였다. 왕좌의 공개일시도 천문가들이 정한 길일을 택했다. 라마단이 끝나고 페르시아력 신년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이 왕좌는 그후 103년간 9명의 황제를 거쳐 13대 무하마드 샤(Muhammad Shah) 재위기에 약탈당했다.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는 이 왕좌를 가져가 오래 사용하지 못했다. 나디르 샤는 9년후인 1747, 반란을 일으킨 쿠르드족에 의해 살해되었다. 공작왕좌도 쿠르드족에게 넘어가 해체되어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1908년 뉴욕타임스가 공작왕좌의 받침대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의해 밸견되었다고 보도했으나, 실체가 확인되지 못했다. 런던 소재 박물관에 대리석으로 된 의자 다리 두 개 보관되고 있는데, 공작왕좌의 다리인지 여부는 입증하지 못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목걸이로 착용하고 있는 다이아몬드 코이누르 /위키피디아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목걸이로 착용하고 있는 다이아몬드 코이누르 /위키피디아

 

나디르 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다이아몬드로 알려진 코이누르도 빼앗았다. 무굴의 무하마드 샤 황제는 코이누르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자신의 터번 속에 감추었다. 눈치 빠른 나디르는 이를 알아챘다.

나디르 샤는 무하마드에게 선의와 상호 존경의 표시로 터번을 교환하자고 했다. 무슬림 세계에 터번 교환은 우의와 화해를 표시하는 관습으로 전해진다. 페르시아에 나라를 짓밟힌 무굴 황제로선 점령자가 웃으면서 하는 말을 거절할수 없었다. 무하마드는 어쩔수 없이 관습대로 터번을 바꾸었고, 그 속에 숨긴 코이누르도 나디르 샤에게 넘어갔다.

나디르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터번을 벗고 그 안에 있던 다이아몬드를 확인하고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 훌륭한 빛의 산이여

그후 이 다이아몬드는 빛의 산’(Mountain of Light)이란 뜻으로 페르시아어 코이누르(Koh-i-Noor)로 부르게 되었다.

1747년 나디르 샤가 암살된 뒤 그의 손자로 아프가니스탄에서 두리니 왕조를 연 아흐마드 샤(Ahmad Shah)가 이 다이아몬드를 차지했다. 두라니왕조가 멸망한 뒤 파키스탄의 시크왕국과 오리사를 거쳐 1849년 영국이 펀자브 지방을 병합하면서 동인도회사가 약탈했다.

코이누르는 18507월 영국으로 운송되어 빅토리아 여왕에게 헌상되었으며, 1851년 런던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일반에 공개되었다.

 

코이누르 /위키피디아
코이누르 /위키피디아

 

코이누르의 원래 크기는 186캐럿이었으나 세공을 거쳐 105캐럿이 되었다. 12~14세기초에 인도 다이아몬드 산지인 안드라프라데시의 와랑갈을 중심으로 존속한 카카티야왕조의 소유였다가 여러 정복자의 손을 거쳐 1526년 무굴제국의 시조 바부르(Bābur)의 수중에 들어갔다.

남성이 이 다이아몬드를 소유하면 저주를 부르고, 여성은 세상의 모든 것을 얻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인도와 페르시아에서 코이누르를 소유한 남성 군주는 모두 왕위를 잃거나 액운을 면하지 못했다.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여왕이 이 다이아몬드를 브로치에 부착해 패용했고, 이후 왕비가 패용하도록 했다.

현재 코이누르는 왕관에 장식되어 런던탑에 보관되어 있다.

 

코이누르의 소유권을 놓고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이 경합하고 있다. 세 나라 모두가 영국에 코이누르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 다이아몬드를 놓고 여러 중재안이 나왔다. 셋으로 나눠 세 나라가 나눠 갖는 방안이 그중 하나인데, 그렇게 되면 세계문화유산이 손상되고 가치도 떨어진다. 또다른 방안은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에 박물관을 만들어 보관하는 것인데 아프가니스탄이 반대한다. 영국은 무굴제국 멸망 이후 국왕이 인도 황제를 겸했으므로, 소유권을 넘겨줄수 없다는 입장이다.

 


<참고자료>

Wikipedia, Peacock Throne

Wikipedia, Koh-i-No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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