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4세에게 템플기사단 저주 통했나
필리프 4세에게 템플기사단 저주 통했나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1.24 18: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크 드 몰레 “1년내에 신의 법정 출두할 것”…그해말 국왕 사망

 

성전기사단은 우리나라에선 템플기사단이라고도 번역하는데, 흰색 옷을 입고 가슴에 붉은색 십자를 그려넣은 옷으로 유명하다. 유럽의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한 이후 예루살렘으로 오가는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1119년 프랑스 귀족 위그 드 파 주도로 8명의 기사들이 모여 9인 기사단을 조직한 것이 시초다.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2세가 예루살렘 성전의 언덕에 기사단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는데 그 터가 옛날 솔로몬 성전(Temple)이 있었던 자리였기 때문에 기사단의 이름을 성전기사단(Knights Templar)이라고 짓게 되었다.

성전기사단은 주로 프랑스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살라흐 앗 딘의 이슬람군에 예루살렘이 함락 된 이후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하지만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는 엄청난 재산을 확보했다. 기사단은 순례자들의 예금을 맡아 두고, 프랑스 국왕에게 돈을 빌려주는 형식으로 자본금을 불려 나갔다. 프랑스 이외에도 거래를 터 다국적 금융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다. 막대한 부를 축적한 성전기사단은 유럽과 중동 각지에 광활한 영지를 갖고 독자적인 함대를 보유하기도 했다. 전성기에는 키프로스 섬 전체를 소유했으며, 파리 지부는 프랑스 왕국의 비공식 재무성이라는 말도 있었다.

 

템플기사단의 복장양식 /위키피;디아
템플기사단의 복장양식 /위키피;디아

 

프랑스 카페 왕조의 필리프 4(Philip IV, 1285~1314)가 템플기사단의 돈을 노렸다. 필리프 4세는 교황과 싸우느라 늘 돈이 부족했다.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를 퇴위시키려다 실패하기도 하고, 1309년엔 교황 클레멘스 5세를 프랑스 영내인 아비뇽으로 이전하게 해 교황청을 손아귀에 넣으려 했다. 이러한 일들엔 모두 돈이 들어갔다.

필리프 4세는 국민들에게 세금을 쥐어 짰다. 그는 긁을수 있는 모든 돈을 가져왔다. 전시세, 소득세, 채권발행을 통해 재정을 늘렸다. 금에 구리비율을 높여 발행하는 방법도 써먹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각종 혐의를 뒤집어 씌워 돈 있는 자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유대인을 잡아 재산을 뺏고, 롬바르드족 대금업자들을 족쳐 돈을 빼앗았다. 그렇게 긁어 대도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결국엔 성전기사단의 돈을 뺏는 방법에 골몰했다. 국왕이 기사단에게서 많은 돈을 빌렸기 때문에 기사단을 털면 돈을 갚지 않아도 되고 새로운 돈을 구할수 있게 된다.

 

화형당하는 템플기사단의 자크 드 몰레 /위키피디아
화형당하는 템플기사단의 자크 드 몰레 /위키피디아

 

기사단도 완벽하게 깨끗하지 않았다.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그들이 역모를 꾸민다느니, 무슬림과 내통하고 있다느니, 동성연애를 한다느니 하는 소문이 돌았다. 기사단 단장인 자크 드 몰레(Jacques de Molay)는 이런 유언비어에 항의하기 위해 필리프 4세를 방문하던 중에 오히려 포로로 잡혔다. 국왕은 남색, 악마 숭배 같은 비도덕적 죄명을 뒤집어 씌워 성전기사단 단원들을 기습적으로 체포했다. 아비뇽에 와 있는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오랫동안 처형을 인준하지 않다가 마침내 프랑스 국왕에 굴복했다. 필리프 4세는 54명이 기사를 화형시키고, 성전기사단의 해체를 명령했다.

기사단장 자크 드 몰레는 화형대에서 국왕에게 1년 후에 신의 법정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날이 1314311일이었다. 모든 이의 처형이 끝난 날은 저 유명한 13일의 금요일이었다.

필리프 4세는 몰레가 죽은지 1년도 되지 않은 그해 1129일에 뇌졸증으로 쓰러져 사망했다. 나이는 46세에 불과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