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주식회사가 인도 삼켰다
영국 주식회사가 인도 삼켰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1.28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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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도회사, 인도 지배의 첨병…세포이 항쟁 후 영국의 직접 지배

 

인도를 식민화한 주체는 영국이란 국가가 아니라 영국의 주식회사였던 동인도회사였다. 1600년에 설립된 이 회사는 처음엔 무역회사로 출발했다. 하지만 점차 영토에 욕심을 내 1757년 플라시 전투 전후로 군대를 보유하고, 점령지에서 세금도 걷었다. 100년후 1857년 세포이 항쟁을 계기로 동인도회사는 수백년간 인도의 주인이었던 무굴제국을 무너뜨리고 대륙을 차지했다. 아틀라스뉴스는 그동안 동인도회사의 인도 잠식과정을 여러 회에 걸쳐 다뤘는데, 이를 1회로 정리한다. /편집자주

 
 

네덜란드를 꺾다

1580년부터 1640년 사이에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통합되었다. 토르데시야시 조약에 의해 포르투갈의 영역이었던 아시아에 공백이 생겼다. 그 틈을 네덜란드가 노렸다. 포르투갈의 아시아 영토는 네덜란드 상인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1595년 네덜란드 탐험가 프레데릭 하우트만은 4척의 함대를 이끌고 자바섬에 도착해 포르투갈인들을 쫓아내고 후추 등 화물을 싣고 돌아왔다. 3년후 야곱 판 넥이라는 네덜란드인이 인도네시아에서 대량의 후추를 갖고 귀국했다. 판넥은 후추 무역에서 400%의 이익을 내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네덜란드는 이후에도 인도네시아를 안방처럼 드나들며 향료 무역으로 대박을 냈다.

이 소식이 영국에 전해졌다. 영국 상인들도 아시아에서 대박을 원했다. 한 사람의 부자가 돈을 내 아시아로 가는 상선단을 꾸리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상인들은 여러 사람의 돈을 모아 큰 회사를 만들었다. 그렇게 급조한 주식회사가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 .

15999월 런던의 상인들이 동인도 무역을 위해 자금을 모으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그때 모은 자금이 3만 파운드였다. 그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특허장을 신청했다. 그해 마지막날인 1231일 특허장이 나왔다. 칙허가 나온후 상인들은 자본을 68,373 파운드로 늘렸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선박 4척은 이듬해 2월 런던을 출발해 160210월에 수마트라섬(인도네시아)에 도착했다. 무려 20개월이 걸린 긴 항해였다. 선단은 103만 파운드의 후추를 싣고 16039월에 돌아왔다. 당시 영국에서 소비하는 후추량은 25만 파운드였는데, 그들이 싣고 온 후추는 남아돌아가 다른 나라에 수출도 했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초기 자금조달 방식은 일회성이었다. 선단이 한번 출항할 때마다 자금을 모집해 싣고온 물건을 팔아 대금을 출자비율로 투자자들에게 나눠주는 방식이었다. 만일 배가 출항해 무사히 귀환하지 못할 경우 배당금은 한푼도 돌아가지 못했다. 1613년까지 선단이 모두 12번 출항했다.

개별 항해 때마다 자금을 조달하고 배당하는 방식으로는 회사를 영속시킬수 없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이에 영국 동인도회사는 1613년부터 몇 년 단위로 사업을 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1613~1623년의 1, 1617~1632년의 2, 1631~1642년의 3차 합본 투자방식이 있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보다 13개월 먼저 출발했지만, 모든 면에서 경쟁자에 뒤졌다. 당시 경제력에서 네덜란드가 월등하게 앞섰다. 네덜란드엔 스페인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대거 이주함에 따라 자본주의가 먼저 꽃피웠고, 자본력도 든든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자본금은 유대 자본의 힘으로 영국의 동인도회사보다 10배 이상 많았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처음에 인도에 주력했다. 인도에는 포르투갈이 100년 전에 거점을 확보해 독점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영국도 네덜란드처럼 포르투갈이 만든 인도 요새를 빼앗는데 주력했다.

16세기말부터 영국 상선대가 인도를 기웃거렸다. 인도 항로를 지나던 영국 선원이 포르투갈 해군에 체포되는 일이 발행했지만 대응하지 못했다. 영국은 처음에 평화적으로 무굴제국과 거래를 트고 싶어했다. 1608년 상인 윌리엄 호킨스가 상선대를 이끌고 구자라트의 항구에 내려 많은 금과 함께 무굴제국 자한기르 황제를 알현하고 제임스1세 국왕의 서신을 전달했다. 자한기르 황제는 처음엔 환대했지만, 갑자기 변덕을 부려 그를 쫓아냈다. 호킨스는 빈손으로 돌아갔다.

16129월 포르투갈 해군이 인도 수라트에서 영국 동인도회사 선원을 체포하자, 위기를 느낀 선장 토머스 베스트가 포격 명령을 내려 두 나라 해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12일의 전투에서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해군이 포르투갈 해군에 완승했다. 이 전투(Battle of Swally)에 놀란 자한기르 황제는 영국과 교역을 허가하고, 항구를 내줬다. 스왈리 전투는 100년간 유지되었던 포르투갈의 인도 독점권이 붕괴되고, 영국이 인도 해안에 작은 거점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영국산 모직물을 아시아에 팔려고 시도했다. 영국 모직물은 당시 유럽에서 일류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아시아에선 영국 모직물의 인기가 없었다. 인도나 동남아는 더운 나라여서 양털로 만든 모직물의 수요가 없었는데다 캘리코(calico)라는 인도산 면직물이 영국 옷감보다 우수했기 때문이다.

아시아 무역에서 향신료 거래가 수익률 400%나 되는 노다지 사업이었다. 향료 교역은 네덜란드가 영국보다 앞서 있었다. 처음에는 두나라 동인도회사가 동시에 인도네시아 향료 무역에 함께 뛰어들었지만, 영국이 네덜란드에게 패해 물러나야 했다. (1623, 암본 사건)

암본 사건 이후 영국은 인도네시아 스파이스 생산지에서 물러나 네덜란드의 함대의 움직임을 피해 현지 무허가 상인들과 거래를 텄다. 셀레베스 섬의 마카사르는 무허가 상인들이 결집하는 곳이었는데 영국은 몰래 그곳에 배를 보내 화약과 아연를 주고 스파이스를 샀다. 자바섬 서쪽 반탐섬에서도 영국은 뒷거래를 하며 향료 거래를 했다.

상품의 길이 막히면, 군인이 길을 연다. 17~18세기엔 그랬다. 영국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충돌은 결국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도발은 아시아 무역에서 후발주자였던 영국이 걸었다.

 

1  1차 영란전쟁 레그혼 전투(1553)
1차 영란전쟁 레그혼 전투(1553)

 

165110월 청교도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크롬웰의 공화파 정부는 항해조례(Navigation Act)를 공포했다. 법안의 골자는 영국 항구에서 운반하는 화물은 영국 배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타깃은 네덜란드 선박이었다. 영국은 당시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네덜란드 상업과 해운업에 타격을 주기 위한 조치였다.

항해조례 이후 영국과 네덜란드는 네차례의 영란전쟁을 치렀는데, 이 전쟁은 세계 역사상 첫 무역전쟁으로 기록된다.

1차 영란전쟁은 1652~1654년 사이에 벌여졌다. 두나라 전함 수는 비슷했다. 전투결과는 영국이 우세했다. 네덜란드 경제의 우월함에 대한 영국의 계획은 치밀했다. 당시 영국 공화파였던 조지 멍크(George Monck)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이런저런 논리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네덜란드가 지금 하고 있는 무역에 우리가 더 많이 참여하는 것이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항해술이 발달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세계의 제해권을 제패했고, 그에 걸맞는 해군을 건설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영국이 이를 따라 잡았다. 영국은 암본 학살사건에서 굴욕을 당한 것, 향료 시장에서 네덜란드에게 밀려난 것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함대 증설에 국가의 역량을 결집시켰다. 1649년에 39척이던 영국의 주요 전함 수가 1651년에는 80척으로 늘어났고, 병력은 16502~3만명에서 7만명으로 두배 이상 늘렸다.

네덜란드는 영국이 해상 상권 확보를 위해 군사적 수단을 늘려 나가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염려하고 있었다. 영국은 해군력을 확대하면서 어느 순간 네덜란드와 싸우 이길수 있다고 판단하는 순간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1660년 영국에서 왕정복고로 찰스 2세가 복귀한 이후 항해조례를 갱신하자 두 나라는 다시 전쟁에 들어갔다. 2차 전쟁(1665~1667)에서 영국 해군은 북아메리카의 뉴암스테르담을 점령하고 뉴욕으로 이름을 바꿨다. 두 번째 전쟁은 흑사병과 런던대화재 등으로 영국이 수세에 몰린 가운데 네덜란드 해군이 런던 입구가지 침입하는 등 네덜란드의 기세가 여전히 강력함을 보여주었다.

3차 전쟁은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라인강을 건너 네덜란드를 침공한 것이 주요한 전투였고, 영국은 보조적 역할을 했다.

세 차례의 17세기 전쟁의 결과로 네덜란드는 상업과 무역에서 퇴조의 길을 걷게 된다. 네덜란드는 북아메리카의 거점을 잃었고, 아시아에서도 영국 상선대에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유럽에서, 아메리카에서, 아시아에서 손발이 잘려나가면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그 빈 자리를 영국 동인도회사가 차지했다.

 

 

상업혁명 촉진하다

인도산 면직물 캘리코(calico)는 동인도회사에 엄청난 수익을 안겨주었다. 동인도회사가 해외 무역에서 번 돈은 영국에 쏟아졌고, 영국 경제는 번영을 구가했다. 청교도 혁명의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은 1657년대에 임시회사였던 동인도회사를 영구조직으로 개편하고, 회사에 인도무역 독점권을 줬다. 영국 정부는 전쟁을 통해 네덜란드를 격파함으로써 영국의 무역회사들이 전세계 해양을 마음껏 누비고 다니도록 여건을 마련했다. 동인도회사를 비롯해 사설 무역회사들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 아시아에서 삼각무역을 통해 이익을 남겼고, 그 이익은 영국의 상업혁명을 촉진시켰다.

 

동인도회사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영국의 상업혁명을 선도했다. 1660년 왕정복고가 이뤄진 후 20년간 영국경제는 번영을 이루었다. 1665년부터 1688년까지 영국의 국부는 23% 증가했다. 동인도 회사의 교역량은 1664년 수출 118,362 파운드, 수입 138,278 파운드에서 1684년에 수출 488,709 파운드, 수입 802,527 파운드로 급팽창했다. 수출은 20년 사이에 4.12, 수입은 5.8배 증가했다.

수입품도 다양해졌다. 향료와 캘리코, 중국산 비단, 커피와 차 등이 수입되어 영국인의 입맛을 돋우고 패션감각을 높였다. 무역역조가 발생해 신대륙에서 도입된 은()이 아시아로 대량으로 건너갔다.

 

크롬웰의 개편 이전에 동인도회사는 매번 출자자들을 모아 이익이 나면 출자금과 이익을 되돌려주는 단발성 조직으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개편 이후에 동인도회사는 주식회사로 전환되어 기업화했다. 출자자는 주식 형태로 투자해 수익을 배분되었다. 출자금은 돌려받지 못하는 대신에 주식의 매매가 허용되었다.

회사의 매출이 늘고 수익이 높아지면서 동인도회사의 배당도 높여졌다. 1666년에 40%의 배당이 이뤄졌고, 1674년에는 무려 99%나 되는 높은 배당이 주어졌다. 그후 잠시 배당이 없었지만, 1677년에 3월과 10월에 두찰예 걸쳐 40%의 배당을 줬고, 1679년에도 40%, 1680년에는 50%, 1681년에는 20%의 배당이 돌아갔다. 1671년부터 1681년 사이에 11년간 연평균 21.8%의 고율 배당이 돌아갔다. 1691년부터 10년간에는 450%의 배당을 줬는데, 이는 연평균 배당률 45%, 1670년대보다 두배나 높은 것이었다.

돈이 돈을 번다. 동인도회사 자본도 풍선처럼 부풀었다. 1659년 주식회사로 전환할 때 369,891 파운드의 출자금으로 출발한 이 주식회사의 자산은 1664495,735 파운드, 1671608,837 파운드, 1678798,041 파운드, 1685년에는 1703,422 파운드로 팽창했다. 동인도 회사는 거대회사로 성장했다.

돈 쓸데도 많았다. 해외 각지에 상관을 설치하고, 직원을 파견했으며, 상선대를 사고, 상선을 보호할 전함도 배치고 군대도 양성해야 했다. 수시로 전개되는 영국 왕실의 전쟁에도 비용을 갹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인도회사의 순자산은 확대되고 고액의 배당을 할수 있었던 것은 상업혁명이라 불릴 정도로 무역규모가 커졌고, 동양 무역에서 거의 독점적 지위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인도회사의 회계는 불투명했다. 얼마나 많은 돈이 해외 상관운영에 소요되는지, 상선 구입에 얼마나 투자했는지는 투자자들로선 알길이 없었다. 7년마다 결산보고가 있었지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잘 나가는 회사이므로 투자했고, 높은 배당을 주므로 이익이 나는줄 알았다.

 

2  런던에 소재한 동인도회사 본사 건물
2 런던에 소재한 동인도회사 본사 건물

 

동인도회사의 주식은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고액의 배당을 주었으니, 주식의 인기가 높이질 수밖에 없었다. 주식가격은 주식 가치와는 달리 움직인다. 경영성과와도 별개로 뛴다. 회사가 손실을 보았을 때도 주가는 뛰고, 물건이 잘 팔릴때에도 주가는 하락하기도 한다.

투기세력이 끼어들기 좋은 조건이 되었다. 당시 주식거래는 조나선 커피숍, 갤러웨이 커피숍등에서 이뤄지다가 1671년 왕립 거래소(Royal Exchange)가 개설되었다. 초기의 주식 거래는 주먹구구식이었다. 당시 주식거래는 은밀히 이뤄지는 것이 대다수였다. 중개인 없이 상인이나 브로커가 중개하고, 매매가격이 공시되지도 않았다. 확인되지 않는 정보에 의해 주식가격이 오르고 내리기 일쑤였고, 사기가 횡행할 여건이 조성되었다. 유언비어를 날조해 주가를 올리거나 떨어뜨려 조작하는 방법으로 엄청난 돈을 버는 사람이 생겨났다.

 

1694년 영국의회는 동인도회사의 독점에 대한 비판 여론을 받아들여, 인도 무역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다. 즉 동인도회사의 독점권을 해제해버린 것이다. 그러자 16989월에 제2의 동인도회사가 생겨났는데, ‘동인도와 무역하는 영국회사’(English Company Trading to the East Indies)였다.

잘 나가던 옛 동인도회사는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명예혁명 세력들은 옛 동인도회사에 대한 왕실의 보호를 베껴버렸고, 무역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박탈했다. 게다가 100년 가까이 유지되어온 면허권도 취소될 위기에 놓였다. 그래도 100년 사업을 한 사람들이 능구렁이었다. 구 회사 주주들은 제2의 동인도회사가 200만 파운드의 자본금으로 설립될 때에 315,000 파운드를 투자해 새 회사의 지배권을 장악해 버렸다. 옛 회사는 사활을 걸고 새 회사와 싸웠다.

 

그 무렵 영국의 숙적 프랑스가 인도를 넘보고 있었다. 프랑스는 네덜란드와 영국에 뒤늦었지만, 1664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인도무역의 독점권을 부여했다. 영국은 1688부터 97년까지 이른바 ‘9년 전쟁’(Nine Years' War)을 치렀다.

영국 내에서도 더 이상 두 동인도회사의 밥그릇 싸움을 두고 볼수 없었다. 양측은 통합회담을 열어 17027월 국왕과 신·구 동인도회사가 협정을 체결해 1708년 두 회사가 대등한 입장에서 통합하게 된다. 합병 동인도회사는 1858년 해체가 결정될 때까지 150년간 유지되었다.

 

 

인도산 캘리코 열풍

1660년대 영국 왕실 사람들은 인도에서 온 캘리코 옷감에 반해 버렸다. 일단 가벼웠고, 다양한 색상의 무늬를 넣을수 있었다. 왕실 가족들이 캘리코 옷을 입자 귀족들이 따라갔고, 곧이어 그 유행은 중산층, 서민층까지 내려갔다. 곧이어 영국 사회에 캘리코 열풍이 불었다.

캘리코(Calico)는 인도 남서부 캘리컷(Calicut) 사람들이 사용하는 옷감이라는 뜻이다. 인도인들에게 캘리언(cāliyan)이라 알려진 이 옷감은 1500년대 포르투갈 사람들이 인도와 무역을 하면서 인도인들이 입는 캘리컷제 천을 유럽인들에게 소개했다. 캘리코는 면화를 원료로 실을 짜 옷감을 만드는 인도산 목면을 말한다.

 

영국은 모직물에 자부심이 있었다. 양털을 깎아 짠 모직물 양복은 영국 신사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모직물은 어두침침하고 무거웠다. 이에 비해 면직물은 가볍고 다양한 색상으로 채색할수 있었다.

인도에 풍부한 면화가 생산되는데다 오랜 면직산업 역사와 우수한 기술, 인도인들의 솜씨 등이 가미되면서 양질의 옷감이 생산되었고, 이 캘리코가 영국에 밀려들었다. 게다가 인도인의 임금은 당시 영국인의 6분의1이었기 때문에 면직물 가격이 쌌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싼 면직물을 배에 실어 런던에 갖다 놓으면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영국인들은 처음에는 값싼 인도산 천을 식탁보와 침대보, 커튼 등 가구용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1660년대 왕정복고 시대가 되면서 왕실에서 캘리코가 의복으로 사용하고, 왕실의 패션이 곧바로 유행으로 번져 나갔던 것이다.

캘리코 가운데 꽃무늬 같이 밝고 대채로운 무늬를 채색한 인도 고유의 친츠(chintz)는 면직물이 가장 인기를 끌었다. 영국인 신사들은 우중충한 모직물 옷을 벗어던지고, 밝은 무늬의 친츠로 갈아 입었다. 당시 신사는 친츠를 입어야 그 지위에 맞는 자질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숙녀들도 무채색에 무늬 없던 모직물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고 화려한 색상의 캘리코를 좋아하게 되었다. 귀부인들은 예전보다 훨씬 멋지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극장에 갔고, 사교모임에 등장했다.

캘리코 열풍은 무역구조를 바꾸어 놓았다. 17세기 전반기에 영국과 네덜란드는 아시아, 특히 인도네시아 열도에서 향료 전쟁을 벌였다. 향료를 생산하는 섬들을 차지하는 것이 두나라 동인도회사의 수익과 직결되었다. 향료 전쟁에서 네덜란드는 선두주자였고, 영국은 후발주자였다.

하지만 17세가 후반기 들어 유럽인들이 캘리코 패션이 유행하면서, 캘리코가 향료를 제치고 1위 무역상품이 되었다. 먹는 게 충족되면 그 다음은 입는 것이 인간의 욕구였고, 그 욕구에 따라 동양 무역의 상품구조도 바뀌었던 것이다.

 

1620년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수입품중 후추와 스피이스등 향료가 전체의 75%를 차지했는데, 1670년대엔 41%, 1700년대엔 23%로 줄어들었다. 물론 이 회사의 향료 수입량은 16202,943 플로린(네덜란드 화폐단위)에서 1670년에 1813 플로린, 1700년에 15,000 플로린으로 급증했다. 전체적으로 무역량이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캘리코의 수입이 더 빠르게 증가한 것이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향료에서 네덜란드에서 뒤졌지만, 캘리코 수입에서 앞서갔다. 네덜란드가 향료의 집산지인 인도네시아는 독점했지만, 인도에서는 네덜란드의 독주가 허용되지 않았던 덕분도 있었다. 게다가 올리버 크롬웰의 공화정부가 항해조례를 선포해 네덜란드 선박 운항을 견제한데다 영국 동인도회사를 임시조직에서 영구조직으로 개편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2  런던에 소재한 동인도회사 본사 건물
18세기 친츠 드레스 /위키피디아

 

영국 동인도회사는 캘리코를 왕실에 상납해 영국사회에 패션으로 유행시키고, 저렴한 비용으로 인도산 면직물을 무더기로 수입해 팔았다. 얼마나 많은 캘리코가 영국에 유행했든지, ‘로빈슨크루소의 저자 대니얼 디포는 캘리코는 우리의 집과 방, 침실까지 밀고 들어와, 커튼과 쿠션, 의자, 침대에까지 사용되었다고 썼다. 페스트가 퍼져 나가듯, 캘리코 사용은 늘어났다.

하지만 캘리코의 수입은 새로운 문제를 야기시켰다. 영국은 인도에서 다량의 면직물을 수입하면서 대금으로 은()을 지출했다. 당시 영국 제품으로 인도에 팔만한 것이 없었다. 영국의 은이 대량으로 인도로 건너가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영국이 유럽 내에서 경쟁력 있다고 판단한 모직물 산업이 무너지고, 견직물 산업도 가라앉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산업이나 상품이 소개되어 유행하면 경쟁력 없는 옛 산업이 도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구산업은 기성의 정치권에 상당한 실력자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캘리코의 수입 급증은 기존 사업자의 노여움을 샀고, 정치투쟁으로 비화하게 된다.

캘리코 논쟁은 처음에 카페에서 시작되었다. 캘리코의 무분별한 수입에 반대하는 사람이 팜플렛에 그 의견을 적어 카페에 뿌렸다. 다른 사람이 그 팜플렛을 받아 보고는 동조하든지, 비판하는 의견을 적는다. 캘리코 수입을 찬성하는 사람도 팜플렛에 의견을 적어 카페에 돌려 동조자를 찾는다. 찬성자든, 반대자든, 서로 팜플렛을 통해 동조자를 구해 의회에 법안을 청구한다. 전형적인 직접민주주의적 방식의 토론이다.

캘리코 반대론자들은 모직물과 견직물등 기존산업의 피해를 주장했다. 영국인들이 앞을 다투어 캘리코를 사는 바람에 금과 은이 대량으로 인도에 반출된다. 수입된 인도 제품은 다른 나라에 수출되지 않고 영국에만 팔려 제조업이 무너지고 있다. 모직물과 견직물 산업이 번성한 도시들에 실업자가 나오고 빈민이 증가한다. 빈민 구제 비용이 늘어나고 결국 시민들의 세금증가를 초래한다는 게 반대론자들의 지론이었다.

이에 비해 찬성론자는 캘리코 수입으로 의류 제품의 가격이 싸지고, 결국 소비자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산업이 생겨 새로운 일자리가 생긴다는 주장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신상품, 신산업의 등장기에 나오는 논리는 비슷하다. 구산업의 목소리가 더 큰 것도 시대를 초월해 다름 없었다.

 

캘리코 수입 금지에 대한 여론이 형성되고, 법안이 의회에 제출되었다. 1696인도직물 착용금지 법안이 의회에 상정되었지만, 부결되었다. 그러자 부결에 참여한 의원들이 협박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법안이 부결되면서 더 많은 캘리코가 수입되었고, 동인도회사는 캘리코 수입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1700년에 또다시 캘리코 금지법안이 상정되어 이번에는 하원을 통과했다. 이 법안에는 허점이 있었다. 법안은 채색, 염색, 착색되어 수입되는 캘리코에 한해 착용 또는 사용을 금지했는데, 염색하지 않은 캘리코의 수입은 제한되지 않았다. 당연히 염색되지 않은 캘리코가 대량으로 수입되었다. 그리고 인도에서 채색 또는 염색되는 과정에 소비지에서 이뤄지는 바람에 영국에 염색, 날염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금지법안에도 불구하고 캘리코 수입이 늘어나자, 반발도 심해졌다. 어떤 이는 캘리코를 입고 가는 사람을 잡아 옷을 벗기는 일도 있었고, 또다른 이는 캘리코를 적발한다며 남의 집안까지 침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노리치, 캔터베리등 모직물, 견직물 공업지역에서는 실업자가 양산되었다.

1719년에는 더 강력한 법안이 마련되었다. 법안을 위반할 경우 20파운드의 벌금도 물도록 규정되었다. 하지만 이 법안에도 예외조항이 있었다. () 또는 모()를 혼합한 면직물, 남색이나 단색으로 염색한 캘리코는 수입될 수 있었다. 결국 두 번째 수입금지조치도 흐지부지 되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많은 의원들과 밀착해 있었기 때문에 의회가 캘리코를 전면 수입금지하는 조치를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인도의 면직업은 두차례에 걸친 영국내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성황을 이룬다. 하지만 18세기 중엽에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대량의 면직물 생산구조를 갖추게 되면서 수공업으로 짠 인도산 면직물은 사양길로 들어서게 된다.

 

 

플라시, 회사 군대를 지휘하다

영국이 동인도회사를 설립한 시기는 1600년이지만, 인도에 영토를 확보한 것은 1757년 플라시 전투(Battle of Plassey)1764년 북사르 전투(Battle of Buxār) 이후부터다. 두 전투 이전의 인도에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무굴 제국으로부터 해안에 교역거점을 허가받아 무역활동에 주력했다.

1700년대에 접어들면서 무굴제국의 중앙지배력이 약화되고, 각지의 제후들이 사실상 독립적 정치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무굴제국 제후들은 상대 제후의 영역을 침략하고, 음모와 모략으로 권력을 탈취하는 일이 빈발했다. 중국 주나라 시대, 일본 히데요시 이전의 전국시대(戰國時代)와 같은 상황이 인도에서 벌어졌다.

 

지방의 권력자들이 영국, 프랑스등 서양 세력과 연합해 세력을 확장하려 했고, 이 틈을 타서 영국과 프랑스도 인도에서 세력 확장을 위해 제후국들을 활용했다. 유럽에서는 두 나라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에 이어 7년전쟁(1756~1763)의 전쟁을 벌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1746~1763년 사이에 인도 남동부에서 세차례의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를 카르나티크 전쟁(Carnatic Wars)라 한다.

1707년 무굴 황제 아우랑제브가 죽자 제국은 지방 통제력을 잃었고, 데칸 고원에 있던 하이데라바드(Hyderabad)를 비롯해 카르나티크(Carnatic), 마이소르(Mysore) 등이 각각 독립했다. 이들은 나와브(Nawab) 또는 니잠(Nizam)이라 부르며, 겉으로는 무굴제국의 봉신이라 자칭하면서 종주국의 간섭을 배제했다.

남동부의 제후국 카르나티크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영국은 한쪽 편을 들고, 프랑스는 다른 편을 들었다.

프랑스는 영국보다 늦은 1664년에 동인도회사를 만들어 인도에 진출했다. 인도에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경쟁이 벌어졌다. 1715년에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조세프 프랑솨 뒤플렉스(Joseph François Dupleix)라는 호전적인 인물을 퐁디세리 총독으로 보냈다.

프랑스의 뒤플렉스는 본국이 영국과 교전을 벌이자, 카르나티크 내전에 끼어들어 영국군 기지 마드라스를 공격했다. 전투는 1746~1748, 1749~1754, 1756~1763에 걸쳐 세차례 벌어졌다. 최종 승리는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가 이끄는 영국군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영국과 프랑스 동인도회사 사이의 전쟁에서 영국 회사가 이긴 것이다. 당시 유럽 무역회사는 군대와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4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로버트 클라이브가 미르 자파르를 만나는 장면 /위키피디아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로버트 클라이브가 미르 자파르를 만나는 장면 /위키피디아

 

이번에는 벵골의 제후(나와브)가 영국에 도전해왔다. 벵골 제후 시라지 웃다울라는 기골이 장대하고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많은 이익을 내는데 분노했다. 웃다울라는 캘커타에서 요새 건설을 중단할 것을 영국에 요구했다. 영국이 거절하자 웃다울라는 175663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캘커타를 함락하고, 체포한 영국군을 포트 윌리엄스(Fort William) 요새의 지하 감방에 쳐넣었다. 6명을 수용할 감방에 146명을 수용하다 보니, 대부분이 질식사, 심장마비 등으로 죽었고, 다음날 문을 열었을 때 23명만 살아 나왔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보복을 결의했다. 이듬해 19일 클라이브는 2,400(영국군 900, 세포이 1,500)을 이끌고 제후의 요새와 시설물을 파괴했다. 웃다울라는 캘커타와 영국인 재산을 돌려주고 배상금까지 지급하겠다고 약속하고 빠져나갔다.

웃다울라도 반격을 결심했다. 웃다울라는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하고, 동시에 병력을 총동원했다. 웃다울라의 병력은 총 5만명(보병 3, 기병 2)이었고, 영국 클라이브의 병력은 3,000이었다. 여기에 프랑스 포병 50명이 벵골측에 붙었다.

 

전투는 1757623일 플라시에서 프랑스 포병의 발사로 시작되어 하루만에 싱겁게 끝났다. 클라이브는 벵골측 지휘관 미르 자파르를 매수해 제후 자리를 보장했고, 개전과 동시에 자파르의 군대가 회군했다. 웃다울라는 도주하다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플라시 전투 이후 미르 자파르는 벵골 제후가 되었고, 영국은 인도에 설치된 프랑스 무역거점들을 하나씩 점령했다.

미르 자파르가 제후 자리에 오르자 영국의 간섭은 심해졌고, 영국의 팽창욕이 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자파라는 네덜란드와 손을 잡고 영국에 대항하려 했다. 하지만 영국은 1759년 네덜란드와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자파르를 퇴위시키고, 그의 조카인 미르 카심을 그 자리에 올려 놓았다.

카심도 영국에 도전했다. 카심은 영국 상인들의 면세특권을 폐지했는데, 동인도회사가 또다시 제후를 갈아치울 조짐을 보였다. 카심은 무굴 제국과 이웃한 이와드 제후의 도움을 요청해 병력을 모았다.

17641022일 벵골-무굴-아와드의 연합군이 인도 북부 북사르(Buxar)에서 동인도회사군과 붙었다. 인도 연합군은 4만의 병력을 확보했고, 영국군은 7천명 정도였다. 영국군의 대부분이 인도인 용병 세포이였다. 이번에는 이탈자가 없었지만, 인도 연합군은 패배했다. 영국군의 화력을 당해낼수 없었다.

북사르에서 승리한 영국은 이듬해 무굴제국과 알라하바드 조약을 체결해 동인도회사는 벵골, 비하르, 오리사 세 지방의 징세권을 인정받았다. 이 조약 이후 클라이브는 17655월에 세 지역을 담당하는 동인도회사 초대 디완(diwan, 조세징수관)이 되었고, 사실상 인도 동부의 총독 역할을 하게 되었다.

1757년 플라시 전투, 1764년 북사르 전투 이후 인도에서 영국 동인도회사의 위치는 달라졌다. 그동안 동인도회사는 인도에 상관을 둔 무역회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두 번의 큰 전투 이후 동인도회사는 벵골, 바하르, 오리사의 세지역에서 세금을 걷어 수익을 얻을수 있게 되었다. 동인도 회사는 세 지역에는 무굴의 나와브를 두었지만 그 자리는 동인도회사의 연금을 받는 명목상 지위에 불구했다.

세 지역에서 징수되는 세금은 연간 165만 달러였다. 1720~1730년 사이에 동인도회사의 연간 매출이 150~200만 파운드였다. 물건을 사서 머나먼 길을 배에 싣고와 팔아 낸 한해 이익금 만큼을 아무런 밑천 없이 세금으로 뜯어낼수 있었으니, 동인도회사의 장사는 거저 먹는 것이었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세금징수기관(국세청)을 디와니(diwani)라고 했는데, 디와니 업무는 국가가 해야 하는 몫이다. 징세권은 영토와 국민을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벵골등 세지역의 징세권은 회사(company)가 아니라, 국가(nation)이 해야 한다는 주장이 영국 정치권에서 나왔다. 이때부터 동인도회사의 지위를 둘러싸고 영국정부와 동인도회사간에 이해다툼이 벌어진다.

영국 정부가 본토보다 넓은 땅을 지배하는 동인도회사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영국 정치인들은 상업회사가 영토를 지배하는 권력기관으로 변신한데 대해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이에 대해 동인도회사측은 영토가 무굴 제국의 현지 제후(나와브)의 것이고, 징세권의 수익만 얻기 때문에 주식회사가 해도 무방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기업과 정치가 부딛칠 때에는 입법권을 가진 쪽에서 이긴다. 18세기 후반에 영국 의회는 노스 규제법, 피트 인도법 등을 제정해 동인도회사의 권력을 줄이고, 영국정부의 기능을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인도에 대한 영국정부의 개입은 점점 영국으로 하여금 제국주의 길을 걷게 했다.

 

 

100년의 정복

인도를 식민화한 무력은 영국의 정규군이 아니라, 동인도회사의 군대였다. 주식회사가 군대를 보유하는 것을 현대적 개념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군대를 보유하기 시작한 것은 1600년 창립 초기부터였다. 이때만 해도 수백명 정도 병력을 보유하며 인도내 무역 거점에 경비를 서는 수준이었다. 동인도회사 군대가 급증한 계기는 1757년 플라시 전투 전후였다. 175026,000, 177867,000명으로 늘어났고, 1857년 세포이 항쟁 때에는 무려 28만명으로 늘어났다.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1857년 세포이 항쟁까지 정확하게 100년 동안 동인도회사는 군대를 동원해 인도 각지를 점령해 들어갔다. 회사는 이 기간에 무역업이라는 본업보다는 영토 확장에 주력했다. 장사를 해서 이윤을 남기는 것보다 영토를 늘려 세금을 더 걷어내는 것이 더 큰 이익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되었다.

1700년 이후 인도의 무굴제국은 급격히 약화하며 각지의 제후들이 왕국을 건설했다. 회사는 인도의 분열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서로를 이간질시키고, 왕위 계승전에 참여해 왕국을 집어삼켰다. 대항하는 왕국은 점령해 직영하고, 미리 항복하는 왕국은 보호국으로 삼았다. 1947815일 인도와 파키스탄이 독립할 때 영국령 인도에는 직할령과 보호령, 위성국등 500개 이상의 나라로 분리되어 있었다. 철저하게 분할 통치(divide and rule)를 한 것이다.

 

동인도회사는 인도인 용병을 고용했다. 이를 세포이(sepoy)라 불렀다. 세포이 고용은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가 플라시 전투를 치르면서 채용한 것이 최초였다. 그후 세포이는 동인도회사군의 주력이 되었다.

동인도회사 군대는 벵골, 마드라스, 봄베이에 세 개의 부대를 두고 별도로 운영되었으며, 보병, 기병, 포병으로 구성되었다. 해군을 별도로 두어 함대를 운영했다.

세포이는 동인도회사가 고용한 병사였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영국정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들은 힌두교와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에서 채용되었고, 봉급 받는 조건으로 동족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 전투에서 실적을 올린 세포이는 계급이 상승되었고, 봉급도 많이 주었다.

세포이를 지휘하는 장교는 영국인이었다. 동인도회사 군대의 장교수는 1763114명에서 1769500, 1784년에는 1,069명으로 불어났다. 장교 수가 늘어나면서 회사는 자체 사관학교도 세웠다. 영국인 장교들은 세포이 하사관, 병사들을 이끌고 인도 전역으로 정복전쟁에 나서게 된다.

돈 벌이 하는 회사가 정복 전쟁을 벌인 이유는 세금을 이익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플라시, 북사르 전투 이후 벵골, 비하르, 오리사 세 지역의 징세권을 얻어 걷은 연간 세수가 회사 한해 매출액이 나온 것을 보고, 동인도회사는 인도 자체가 돈이 된다고 파악하게 되었다. 회사는 군대가 돈을 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 영토를 얻어 세금을 걷고, 또다른 영토를 늘리면서 동인도회사는 본업을 잊은 채 정복전쟁에 매진하게 된다. 약탈만큼 손쉬운 벌이도 없다. 힘들게 노동하지 않고 남이 일해 생산한 것을 빼앗으면 된다. 동인도회사는 1757년부터 1857년까지 100년간 약탈자로 둔갑하게 된다.

 

동인도회사가 벌인 전쟁은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다. 소소한 약탈행위는 전쟁이라 이름하기 않았고, 굵직한 전쟁으로 마이소르 전쟁, 로힐라 전쟁, 마라타 전쟁, 구르카 전쟁 등을 들수 있다. 동양의 패권국이었던 중국과 아편전쟁을 벌일 때 영국의 당사자가 동인도회사였다.

18세기 중엽, 인도 남부는 무굴 제국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동인도회사의 입장에서는 왕국을 하나씩 먹어 치우기에 좋은 여건히 형성된 것이다.

 

첫 번째 타깃이 마이소르(Mysore)였다. 데칸 고원에 있는 이 왕국은 하이데르 알리(Hyder Ali, 재위 1761~1782)와 그의 아들 티푸(Tipu, 재위 1782~1799)가 술탄이었을 때 전성기를 구가했다.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인도의 여러 왕국들 가운데 경제력이 가장 높았고, 농업과 섬유산업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알리와 티푸는 영국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었고, 여러 왕국에 연락을 취해 연합을 모색하고, 해군력도 증강시켜 동인도회사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동인도회사는 마이소르에 대해 1767~69, 1780~84, 1790~92, 1798~99년 사이에 네차례나 전쟁을 벌였다. 마이소르군은 한때 영국 무역기지인 마드라스를 함락하기 직전까지 갔고, 로켓까지 개발해 동인도회사 군대를 위협했다.

마이소르 로켓은 철제 포신에서 발사되었는데, 사거리 2km에 화력도 뛰어났다. 당시 유럽에도 로켓이 있었으나, 사거리나 성능 면에서 마이소르의 것에 미치지 못했다. 마이소르는 1,200명의 로켓 부대까지 운영했고, 이 로켓 부대로 영국군에 굴욕적인 패배를 안기기도 했다. 후에 영국군이 이 로켓을 가져가 1805년 콩그레브 로켓(Congreve rocket)을 개발해 나폴레옹 전쟁에 활용했다.

마이소르는 협력을 기대한 왕국들이 동인도회사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소극적으로 대응한데다 급격하게 불어난 동인도회사 군대에 의해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다. 마이소르 영토의 일부는 영국에 협조한 하이데라바드와 마라타에 병합되고, 나머지 부분은 옛 힌두 왕가 일족에게 주어졌다. 마이소르에는 영국군이 주둔하고, 외교권이 박탈되는 등 왕국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위성국으로 전락했다.

 

제3차 마라타 전쟁 그림 /위키피디아
제3차 마라타 전쟁 그림 /위키피디아

 

마라타는 제국(Maratha Empire)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인도 중앙부를 차지한 거대한 왕국이었다. 동인도회사와의 전쟁은 권력 다툼에서 시작되었다.

1772년 페슈와 마드하브라오가 사망하자 그의 동생인 나라얀라오가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 그런데 그의 삼촌 라그후나스라오가 조카를 암살하고 자신이 페슈와를 꿰어찼다. 죽은 나라얀라오의 왕비가 아기를 출산했는데, 12명의 지방 제후들이 이 아기가 왕실의 혈통이라고 주장하면서 라그후나스라오가 축출되었다. 페슈와에서 물러난 그는 봄베이 소재 동인도 회사와 1777년에 협정을 체결했는데, 이 협정에는 동인도회사가 라그후나스라오에게 2,500명의 군대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수라트와 바루흐지역의 징세권을 양도하고 살세트와 바세인 지역을 할양하는 내용이 담겼다. 캘커타에 있는 동인도회사 위원회는 폐위된 국왕과의 협정이 무효라고 주장했지만, 봄베이 측은 협정을 근거로 군사행동을 취했다.

1777년부터 동인도회사는 군대를 투입했는데, 초기 전투에서 숫적으로 우세한 마라타군에 패배하는 굴욕을 당했다. 하지만 동인도회사는 군대를 보강해 1781년 승리했다. 동인도회사는 마라타 왕국의 서쪽 영토를 빼앗는 것으로 1차 전쟁은 막을 내렸다.

동인도회사와 마라타 왕국은 그후에도 1803~1805년에 2차 전쟁, 1817~1818년에 3차 전쟁을 치렀다. 세차례의 마라타 전쟁을 거치면서 동인도회사는 인도 중부의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다. 페슈와는 추방되었고, 나라는 작은 제후국으로 쪼개져 동인도회사 봄베이 관구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로힐라 전쟁(Rohilla War)은 동인도회사가 자신에게 우호적인 왕국을 지원한 전쟁이다. 히말라야 기슭, 갠지스강 상류의 비옥한 지역에 로힐칸드(Rohilkhand)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이 나라는 마라타 왕국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로힐칸드는 북인도의 아우드(Oudh)의 나와브와 협정을 맺어 마라타족을 격퇴하는 보상으로 400만 루피를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로힐캍드는 마라타를 격퇴한 후에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우드는 동인도회사의 지원을 얻어 로힐라를 침공해 병합시켰다.

구르카 전쟁은 네팔 전쟁이라고도 한다. 구르카(Gurkha)는 네팔의 또다른 이름인데, 네팔이 인도북부를 공격하자 동인도회사군이 네팔을 공격해 히말라야산맥 쪽으로 밀어붙여 경계선을 그었다. 동인도회사는 네팔군의 전투력을 인정해 후에 구르카 병사를 비정규군을 활용했다.

 

1857년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기 이전까지 동인도회사는 영국에 우호적인 오드(Oudh), 라지푸타나(Rajputana), 펀잡(Punjab)을 제외하고, 인도 대부분을 점령하게 된다. 무굴제국 황제는 동인도회사로부터 조그마한 땅을 얻어 연금생활자로 축소되었다. 19세기 중엽,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아시아에서 지정학적으로 강력한 패권자가 되었다.

 

 

세포이 항쟁 진압후 영국 직접통치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투자자들이 자본금을 납입한 주식회사였지만, 군대를 보유하고 영토를 갖는 준국가 형태의 특이한 조직이었다.

동인도회사가 군대를 보유하기 시작한 것은 1757년 플라시 전투 전후부터였다. 당시 전투를 지휘했던 로버트 클리이브는 인도인 병사를 용병으로 고용했다. 이 용병을 세포이(sepoy)라 불렀다. 세포이는 동인도회사의 용병일 뿐, 공식적으로 영국 정부 또는 영국군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세포이는 주로 이슬람교도들로 구성되었으며, 간혹 힌두교도도 있었다. 그들은 인도 카스트 계급질서에서 상위계층에 속했고 예의 바르고 유능한 인물들이 많았다. 영국이 주도하는 전투에서 세포이들은 좋은 실적을 내 영국의 인도지배의 초석이 되었다.

영국 본국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가급적 자국군의 인도 파견을 꺼렸고, 동인도회사는 불가불 세포이 용병에 의존도를 높였다. 이에 따라 동인도회사군의 세포이수는 175026,000명에서 177867,000명으로 늘어났고, 100년후인 1857년엔 28만명으로 증원되었다.

 

세포이들은 마이소르 전쟁, 로힐라 전쟁, 마라타 전쟁 등 동인도회사가 인도를 지배하기 위해 토착 부족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갈 때 용병으로 참여했다. 세포이들은 영국 장교들의 전투 지시를 충실히 따랐지만 종교적 신념에 배치되는 지시에는 불만을 드러냈다.

특히 세포이들은 해외파병을 싫어했다. 인더스강 서쪽의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거나 해로로 미얀마(버마)를 원정할 때 그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따라서 1856년 동인도회사는 해외 원정시 세포이를 동반하지 않는다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세포이들의 불만에 불을 당긴 것은 아주 사소한 문제였다. 1857127일 영국령 인도의 수도였던 캘커타(지금은 콜카타) 인근에 주둔하던 세포이들이 새로 지급된 탄약통의 수령을 거부했다. 당시 총은 신형 머스킷 총 엔필드 라이플(Enfield P-53 rifle)이었는데, 이 총은 병사들이 종이로 싼 탄약통을 입으로 물어 뜯어 탄약을 총신에 넣고 발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문제는 탄약통의 방수를 위해 종이에 동물성 지방을 입혔는데, 그 지방이 인도인들이 싫어하는 소와 돼지의 지방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소는 힌두교도들이 신성시하고, 돼지는 이슬람교도들이 싫어했다. 세포이들은 탄약을 입에 물기를 거부했다.

 

1857423일 델리 북동부 갠지스강 상류에 있는 메루트(Meerut)라는 도시의 동인도회사군 부대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메루트에도 곧 새 탄약이 배급되고, 탄약통에 소와 돼지 기름이 칠해져 있다는 내용이었다.

세포이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할 말을 잃었다. 영국인 지휘관은 사격 훈련을 하면서 탄약을 지급했다. 90명의 세포이 가운데 85명이 탄약 수령을 거부했다. 지휘관은 이들을 모두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59일 열린 재판에서 대부분 세포이들이 5~10년형을 받았다.

510,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일부 세포이들이 소리를 외치며 무기고를 습격하고 영국인 장교를 살해했다.

이 우발적인 충동이 1857년 세포이 항쟁을 촉발했다. 항쟁은 탄약수령 거부에서 시작되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동인도회사의 무자비한 통치에서 일어난 저항운동이었다. 영국인들은 문명인임을 자처하며 인도의 문화를 무시하고, 인도인을 차별했다. 지배자들은 인도 억압을 위해 고용한 세포이들에 의해 스스로를 부정당하는 일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메루트에서 델리까지는 38마일에 불과했다. 반란군은 갠지스강을 따라 인도 중부 지역을 순식간에 장악하고, 다음날인 511일 무굴제국의 수도 델리를 점령했다. 인도는 힌두교와 이슬람교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다종교 사회였기 때문에 이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이끌어줄 구심점이 필요했다. 반란군 지도자들은 무굴제국의 황제 바하두르 샤 2(Bahadur Shah II)의 궁전으로 밀고 들어갔다.

황제 앞에서 그들은 주장했다. “우리는 신앙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움에 나섰습니다. 황제 폐하의 도움을 청하러 여기에 왔습니다.” 바하두르 샤는 즉답을 하지 않았다.

다음날 바하두르 2세는 모처럼 국정회의를 소집했다. 세포이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황제는 신하들 앞에서 세포이들의 충성을 요구하며 항쟁을 지지했다. 516일 황제는 세포이에 체포된 영국인 50명을 왕궁 밖에 있던 보리수 나무에서 처형을 지시했다.

 

처음엔 세포이 반란군이 기세등등했다. 하지만 인도인들은 단결하지 못했다. 바하두르 샤 2세의 호소에 마라타 왕국 등이 참여하고, 일부 이슬람들이 지하드를 선언했다. 그에 비해 수니파 이슬람들은 봉기에 합류하지 않았고, 세포이 일부는 영국군 용병으로 남았다. 펀잡의 시크교도와 파슈툰족들은 영국 편에 서서 델리 탈환작전에 참전했다.

분열은 곧 패배다. 봉기군은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영국군은 서아시아와 중국에 주둔해 있던 군대까지 불러들여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영국의 반격은 잔인했다. 포로로 잡힌 세포이 수백 명을 세워 두고 대포를 쏘아 한꺼번에 처형시키는 살인극도 벌였다.

9월초 영국군은 델리 북부 능선에 집결해 공방전을 벌였다. 영국군도 사령관이 4차례나 바뀔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914일 영국군은 60문의 중포로 성문을 파괴하고 델리성을 점령했다.

황제는 델리 교외에 있는 후마윤 묘지(Humayun's Tomb)에 숨었지만, 영국군의 끈질긴 추적 끝에 발각되어 920일 체포되었다. 이때 황제의 나이는 72세였다. 이로서 몽골제국의 마지막 황제국인 무굴제국은 20330년의 영광을 뒤로 하고 종말을 고했다.

 

1857년 후마윤 묘지에서 나와 체포되는 바하두르 샤 황제와 황자 /위키피디아
1857년 후마윤 묘지에서 나와 체포되는 바하두르 샤 황제와 황자 /위키피디아

 

영국 정부는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이후 동인도회사를 통한 인도 간접통치의 가면을 벗고 직접통치로 전환했다. 18588월 영국 의회는 인도통치법을 가결해 동인도회사의 통치권과 특허권을 영국 국왕에게 반납하도록 했다. 동인도회사는 곧바로 해산되었고, 그동안 지배하던 영토와 자산은 영국 정부로 이양했다. 영국은 그해 111일부터 총독을 인도에 보내 식민지배를 본격화했다.

영국은 또 무굴제국 황제를 폐위시킨 다음 영국 여왕을 인도 황제로 옹립해 인도제국을 성립시켰다. 동인도회사는 주주들에 대한 배당금 지불등 잔무처리를 위해 1874년까지 청산법인 형태로 존재하다가 완전하게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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