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잔다르크, 잔시의 라니 락슈미바이
인도의 잔다르크, 잔시의 라니 락슈미바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2.03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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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후국 잔시의 왕비로 독립운동의 전설적 영웅…세포이 항쟁에 합류해 전사

 

1857년 인도 세포이 항쟁에 수많은 투사들이 등장했지만 여성 전사 락슈미바이(Lakshmibai)만큼 인도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인물은 없을 것이다. 혹자는 그녀를 인도의 잔다르크라고 했다. 인도 북부 잔시(Jhansi)라는 토후국의 왕비(Rani)였기에 사람들은 그를 잔시의 라니라고도 부른다.

 

락슈미바이는 18281119일 바라나시에서 브라만 가문 일원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마니카르니카 탐베(Manikarnika Tambe)였다. 아버지는 군인으로 마라타제국의 페슈와(재상)를 위해 일했다. 아버지의 상관인 페슈와는 그녀를 깝찍하고 이쁘다며 귀여워했다고 한다.

마니카르니카는 어려서부터 호신술, 승마, 활쏘기 등을 배웠고 14세가 되던 1842년에 잔시 왕 강가다르라오(Gangadhar Rao)와 결혼했다. 결혼후 이름을 여신 락슈미를 본따 락슈미바이로 고쳤다. 락슈미바이 왕비는 아이를 낳았으나 아이는 4개월만에 사망했다. 왕과 왕비는 사촌의 아들 다모다르 라오(Damodar Rao)를 양자로 입양했다. 입양 행사에는 영국 동인도회사 간부도 참석해 왕의 후계자임을 확인했다.

1853년 왕이 죽자 동인도회사측은 태도를 바꿔 양아들의 승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동인도회사는 토후국을 하나씩 합병하고 있던 단계에 있던 터여서 양아들의 승계가 좋은 빌미가 되었다. 락슈미바이는 속으로는 크게 분노했으나, 겉으로는 저항하는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동인도회사측은 잔시국을 직할령으로 만들고, 락슈미바이에게 궁궐에서 나가는 조건으로 연간 6만 루피의 연금을 주었다.

전설에 의하면 궁궐에서 쫓겨난 락슈미바이는 새벽에 일어나 체력을 단련하고 공부에 집중했다고 한다. 그녀는 평복을 입고 백성들과 친밀하게 지냈다.

락슈미바이 /위키피디아
락슈미바이 /위키피디아

 

그러던 중 1857년 세포이 항쟁이 일어났다.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락슈미바이는 동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락슈미바이는 잔시 주둔 영국군 장교에게 잔시의 보호를 위해 무장을 하겠다고 요청했고, 영국측도 이에 동의했다.

무장봉기 한달후 세포이 병사들이 잔시로 몰려왔다. 세포이 반란자와 동인도회사군 사이에 무력충돌이 벌어져 영국인 40~60명이 사망했다. 당시 영국군 군의관은 락슈미바이가 세포이 반군을 지휘했다고 주장하며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 이세벨에 비유했다. 이세벨은 바알의 숭배자로 성경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타락한 여인으로 지탄받았다.

영국군은 잔시에서 퇴각했다. 그 틈을 타서 락슈미바이는 무장을 했다. 혼란을 틈타 이웃 동인도회사를 등에 업은 토후국들의 침공과 내부 반란이 있었지만 라니는 이들을 진입했다. 라니는 열살배기 양아들을 앞세워 스스로 통치자가 되었다.

 

영국군은 이듬해(1858) 3월 잔시로 돌아왔다. 그들이 돌아와 보니 잔시에는 중무장한 병력이 성을 에워싸고 있었다. 락슈미바이는 조용히 잔시의 독립을 추구했던 것이다.

323일 영구군은 잔시를 포위했다. 영국군의 포격은 다음날부터 시작되었다. 양측의 치열한 공성전이 전개되었다. 잔시군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락슈미바이는 또다른 저항지도자 타트야 토페(Tatya Tope)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타트야는 2만명을 이끌고 있었는데, 그의 부하들이 잔시로 달려오다가 영국군에 막혔다. 영국군을 포위망을 점점 좁혀 왔다.

 

양아들을 업고 탈출하는 락슈미바이 /위키피디아
양아들을 업고 탈출하는 락슈미바이 /위키피디아

 

4월초 영국군은 잔시 성을 뚫고 시내로 진입했다. 잔시가 함락 직전에 측근들은 라니에게 후일을 도모하라고 권유했다. 라니는 양아들 다모다르를 등에 업고 말에 올라타고 멀리 도망쳤다. 도착한 곳은 칼피(Kalpi)였다. 그곳엔 탄트야 토페를 비롯해 저항군이 모여 있었다. 락슈미바이는 그들과 합세해 영국군에 저항하다가 괄리오르(Gwalior)로 밀려났다.

영국군은 괄리오르로 밀려왔다. 1858617, 락슈미바이는 죽을 결심을 했다. 그녀는 제왕의 복장을 하고 전투에 참여했다. 그녀는 전투 중 총에 맞아 말에서 떨어졌다. 그 순간 영국 병사가 다가왔다. 그녀가 권총을 집어드는 순간 영국 병사가 그녀를 향해 총을 쏘았다. 잔시의 왕비 락슈미바이는 순국했다. 나이 30세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시신을 거두어 조용하게 화장했다..

양아들 다모다르는 전투가 벌어진 곳에서 떨어진 밀림에 숨어 있다가 구사일생 살아 남았다. 그는 도망쳐 잘란파탄(Jhalrapatan)이이라는 토후국의 왕에게 의지해 목숨을 부지하다가 동인도회사에 자수했다. 영국은 그를 살려주고, 매년 1만 루피의 연금을 주었다. 그는 결혼하고 자식도 낳아 살다가 1906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잔시 요새 공성전 /위키피디아
잔시 요새 공성전 /위키피디아

 


<참고한 자료>

Wikipedia, Rani of Jhansi

Wikipedia, Damodar Rao of Jhan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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