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양 길목에 위치한 스리랑카의 눈물
인도양 길목에 위치한 스리랑카의 눈물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2.25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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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화함대의 길목…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에 440년간 지배

 

스리랑카는 인도반도 남쪽에 위치한 섬나라다. 면적 65,610로 우리나라의 3분의2 정도이고, 인구는 2,215만명(2020)에 이른다. 농업이 주산업인 이 나라가 강대국의 관심을 끈 것은 지정학적 요인 때문이다. 인도양 한가운데 위치해 동쪽으로는 동아시아와 동남아가, 서쪽으로는 아프리카로 있고, 좁은 해협을 건너면 인도대륙이 버티고 있다. 일찍이 명나라 정화함대가 이 섬을 지나갔고, 서양세력으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이 차례로 식민통치를 했다. 최근에는 시진핑의 중국이 해양실크로드의 한 가운데에 있는 이 나라를 주목하고 있다.

 

스리랑카의 위치 /위키피디아
스리랑카의 위치 /위키피디아

 

인도대륙에서 유독 이 섬나라에만 불교가 번성해 있다. 주류종족은 싱할리족으로, BC 6세기경 인도 북부에서 건너온 아리안족이 토착원주민 베다족을 정복하면서 생긴 혼혈민족이다. BC 248년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아소카왕이 아들 마힌다 왕자와 승려들을 스리랑카로 보내 불교를 전파했다. 이때부터 스리랑카는 불교왕국이 되었으며, 인도 반도에 불교가 쇠퇴한 후에도 아시아의 불교 본산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인도반도 남단에 거주하는 타밀족이 수시로 침략해 싱할리족과 타밀족은 원수지간이 되었다. 타밀족은 주로 섬 북쪽에 왕국을 세웠는데, 힌두교를 믿으며, 불교도인 싱할라족과 다른 문화와 관습을 유지했다.

1411년에 중국 명나라 정화(鄭和) 제독의 함대가 도착했으나 당시 감폴라(Gampola) 왕국와 마찰을 빚어 전쟁이 벌어졌다. 정화는 승리해 감폴라 국왕 위자야바후 6세를 끌어내리고 그를 중국으로 압송했다. 명의 영락제는 위자야바후를 풀어주고 다시 스리랑카로 돌려보냈으나, 위자야바후는 권력을 다시 쥐지는 못했다. 정화의 편에 선 감폴라의 왕족 파라크라마바후 6세가 1412년에 새 왕국을 개창했는데, 코테(Kotte) 왕국이다. 정화는 갈레에 정복 기념비를 세우고 돌아갔다.

 

스리랑카 갈레의 정화 기념비 /위키피디아
스리랑카 갈레의 정화 기념비 /위키피디아

 

서양과의 첫 접촉은 포르투갈이다. 바스코다가마의 인도 도착 이후 포르투갈인들은 본격적인 동양 탐험에 나섰고, 로렌초 데 알메이다가 1505년 이 섬을 발견했다. 1517년에 포르투갈은 콜롬보항에 요새를 건설했다. 코테 왕국은 포르투갈을 피해 내륙으로 들어가 칸디(Kandy)를 수도로 삼아 외세와 투쟁을 벌였다. 포르투갈은 해안의 요새만 점령했을 뿐, 내륙은 스리랑카인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서양인들은 스리랑카를 실론(Ceylon)섬이라고 불렀다. 1638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탐험가 섬에 도착해 칸디를 방문하자 당시 라자신하(Rajasinha II) 왕이 네덜란드를 이용해 포르투갈을 몰아낼 생각을 했다. 왕은 포르투갈을 몰아내 준다면 상품교역 독점권을 준다는 조건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조약을 체결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해외식민지를 놓고 지리한 전쟁을 벌였는데, 1656년에 네덜란드가 콜롬보를 함락시켰다. 네덜란드는 콜롬보 요새를 돌려준다는 조약을 이행하지 않고, 요새와 항구를 점령해 버렸다. 이후 칸디 왕국과 네덜란드는 교전상태로 돌입했다.

네덜란드인들은 지배 기간 동안에 현지처를 두어 버거(Burgher)인이라는 혼혈족을 탄생시켰다. 2012년 센서스에 37,000명의 인구가 버거인으로 등록되었다.

 

1796년 나폴레옹 전쟁 기간에 네덜란드는 프랑스에 점령되어 바타비아 괴뢰정권이 수립되었다. 영국은 실론섬이 프랑스령이 될 경우 인도가 위험하다고 판단해 섬을 점령하고 관리했다. 전쟁이 끝나고 네덜란드 왕실이 돌아갔지만 1815년 아미앵 조약에 의해 영국은 실론섬을 통치하게 되었다.

영국은 실론섬을 동인도회사의 관리하에 두었다. 그해 동인도회사 군대는 내륙의 칸디 왕국을 쳐들어가 점령해 버렸다. 이로써 실론섬의 원주민 왕국은 종언을 고했다.

실론섬 전역을 지배한 영국은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서 커피를 재배해 많은 소득을 올리는 것을 모방해 실론섬에 커피 재배를 시도했다. 영국인들은 십년 이상 노력한 끝에 커피 재배에 성공했는데 그후 커피 농장은 가격 폭락으로 고생하고 1870년경 퍼진 커피녹병으로 초토화되었다. 영국인들은 그 자리에 대용 작물로 차를 심었고, 홍차 산지로 유명해졌다. 또 고무나무를 심어 고무 생산지로 활용했다.

영국인들은 스리랑카의 주류인 싱할라인을 지배하기 위해 인도대륙 남부의 타밀족을 대량으로 받아들였다. 타밀인은 처음엔 거의 무임금에 가까운 일꾼으로 농장에서 일을 시켰고, 나중엔 타밀족과 버거인을 대우해 싱할라인을 지배하는데 활용했다. 영국인들의 인종차별주의는 독립후에 인종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타밀반군 지역(녹색) /위키피디아
타밀반군 지역(녹색) /위키피디아

 

1919년 싱할라인과 타밀인이 연합해 실론국민회의를 조직했다. 인도국민회의처럼 실론국민회의에서도 싱할라인과 타밀인의 종족 대립이 격화되었다.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영국은 인도를 독립시킨 이듬해인 194924일 실론섬을 자치령으로 전환했다. 영국 국왕이 국가원수인 입헌군주국의 형태였으나, 사실상 이때부터 실론은 독립했다. 1972년 실론정부는 공화국으로 전환하고 국명도 스리랑카로 변경했다. 국가원수 자리에 형식적으로 남아 있던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을 배제함으로써 오랜 식민지 지배의 흔적을 지웠다.

 

스리랑카는 독립후 1983723일부터 2009519일까지 무려 26년간 내전으로 시달렸다. 정부군과 타밀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반군 사이에서 일어난 내전으로 스리랑카는 큰 피해를 입었고 오늘날까지도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전 기간에 양측은 도합 5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결국엔 타밀반군이 정부군에 진압되면서 내전은 끝났다.

최근 스리랑카는 경제위기로 국제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2022412일 정부가 대외부채 510억 달러상환을 잠정 중단했고, 618일 국채 이자를 상환하지 못해 디폴트를 선언했다. 스리랑카는 최악의 경제난을 겪게 되었고, 오랫동안 정치권력을 쥐고 있던 라자팍사 가문이 축출되었다.

 

1985440년간 식민지통치 시기의 중심지였던 콜롬보에서 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코테로 수도를 이전했다. 줄여서 코테라고 한다. 하지만 콜롬보는 여전히 상업과 행정수도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종족구성은 싱할라족 74, 타밀족 18, 무어족 7순이며, 종교는 인구의 70가 불교신자이며 힌두교 15%, 기독교 8%, 이슬람교 7% 등 다양하다. 섬의 모양이 눈물처럼 생겼다고 해서 인도의 눈물이라고도 한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Sri Lanka

Wikipedia, History of Sri La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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