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륙의 고종 커피독살 미수사건
김흥륙의 고종 커피독살 미수사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3.18 23: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근대조선의 풍경…아관파천후 친러파 득세, 커피를 좋아한 고종의 스토리

 

사람들은 그를 정동대감이라고 불렀다. 집이 지금의 서울중구 정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동대감은 18962월 아관파천 이후 고종 옆에서 러시아어 통역을 담당한 김흥륙을 말한다.

김흥륙은 함경도 단천에서 태어난 천민 출신이다. 일찍이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가 고용살이를 하며 러시아어를 배웠다. 당시 연해주에는 함경도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는 원어민에 가까운 러시아어를 구사했다.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카를 베베르가 러시아 전권공사로 서울에 부임했다. 김흥륙은 베베르의 통역관으로 일자리를 얻었다. 통역관은 통변(通辯)이라고 했다. 당시 조선에서 러시아어 통변은 김흥륙이 유일하다시피 했다. 국내에는 이범진이 친러파 관료를 대표했는데, 그는 러시아어를 하지 못했다. 이범진은 김흥륙을 옆에 끼고 살다시피 했다.

고종의 아관파천은 김흥륙에 출세의 기회를 제공했다. 밑바닥 생활을 오래 해온 그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고종과 베베르 공사에게 연결해줄 다리는 김흥륙이 유일했다. 조선인 가운데 그 이외에 러시아어를 아는 사람이 없었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조선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통역은 제멋대로였다.

김흥륙은 권력의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친러파의 수장 이범진은 일본 공사관과 친일파의 공세로 아관파천 후 두달만에 실각했다. 김흥륙이 통변이자 친러파의 수장으로 떠올랐다. 임금과 엄귀비, 베베르 공사가 그에게 달라 붙었다. 그는 고속승진했다. 그는 귀족원경, 한숭부판윤, 학부협판이 되었다. 학부협판은 정2품으로, 지금의 교육부 차관에 해당한다. 일자무식이었던 그가 러시아어 하나로 이 나라의 교육을 관장하는 자리로 올라간 것이다.

 

천민 출신이 갑자가 고관대작이 되면서 세상에 겁이 없어졌다. 조정 대신들이 그를 찾아와 아부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머리를 조아려야 했던 대감들이 이 문고리 권력의 바짓가랑이를 잡고서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했다. 어떤 고관은 뇌물을 썼고, 또다른 고관은 첩을 잠자리에 보내 고위관직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점점 안하무인이 되었다. 임금도 그가 없으면 벙어리가 되었다.

그는 장돌뱅이 기질이 있어 재물에 민감했다. 그는 나라의 이권을 내주고, 인사권을 행사하며, 자신의 재산을 불려 나갔다. 러시아는 고종을 인질로 잡은 김에 조선에서 이권을 챙기려 했다. 러시아는 극동에서 부동항을 얻기 위해 부산 절영도를 조차하려 시도했다. 고종이 허락했고, 외부대신 민종묵이 서명했다. 그러자 독립협회가 고종의 환궁을 주장하며 절영도 조차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유림도 고종의 환궁을 요구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 피신을 오래 끌수 없었다. 임금은 미국 공사관으로 도피할 것을 추진했다. 김흥륙은 고종의 음모를 재빠르게 간파하고 방해했다. 고종이 미국공사관으로 가면 자신의 쓸모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김흥륙은 고종에게 무례하게 대했다고 한다. 그는 예법을 배우지 못한 인물이었다. 임금은 어쩔수 없이 참았지만, 언젠가 한번 저 인간을 혼내주려고 마음 먹게 되었다.

 

독립협회의 반대로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가 무산되고 고종은 18972월 파천 1년만에 환궁을 하게 되었다. 환궁후 고종은 규장각 학사 이재순을 시켜 김흥륙을 몰래 처단하라고 지시했다. 이재순은 자객들을 동원해 백주대로에 김흥륙을 덮쳤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김흥륙은 여전히 러시아를 배경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고종은 모른척했다.

김흥륙은 살인자를 찾아내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결국 자객 무리 가운데 유진구가 붙잡혀 태형 100대에 종신유배형을 언도받았고, 경무사 이충구는 업무태만을 책임지고 파면되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김흥륙 처단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김흥륙의 가렴주구를 처벌하라는 상소가 연일 올라왔다. 고종은 상소를 빌미로 김흥륙을 파면하고, 곤장 100대에 종신귀양을 보내라고 명령했다. 유배지는 전라남도 흑산도였다.

이 시장잡배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배우지 못한 이 인간은 임금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별렀다. 그는 유배를 떠나면서 심복 공흥식에게 고종 황제를 독살하라고 지시했다. 공흥식은 김흥륙의 추천을 받아 궁궐 주방에서 외국요리를 전담하던 요리사였다.

공흥식은 궁궐 창고지기 김중화를 1,000원의 은으로 포섭했다. 공흥식은 김흥륙에게서 받은 아편 한 냥쭝을 김중화에게 건넸다. 김중화는 그 아편을 고종이 마시는 커피에 넣어 올렸다.

1898912일 고종과 황태자가 커피를 마시고 쓰러졌다. 다행스럽게 모두가 회복되어 무사했다. 고종은 사건의 전모를 밝히라고 엄명을 내렸다. 공흥식이 체포되어 김흥륙의 범행을 실토했다.

유배지로 내려가던 김흥륙은 서울로 소환되었다. 대역죄인 김흥륙과 공흥식, 김종화를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고종은 상소를 허했다. 김흥륙과 그의 음모에 가담한 두명은 처형되었다. 김흥륙의 부인은 곤장 100대에 유배형에 처해졌으나, 임신중이라는 이유로 곤장은 면케 해 주었다. 김흥륙의 시체는 시장으로 끌려가 난자당했다.

 

덕수궁 정관헌 내부 /사진=문화재청
덕수궁 정관헌 내부 /사진=문화재청

 

고종은 커피를 좋아했다고 한다. 고종이 커피를 처음 마신 것은 개항 이후인 1880년대 중반으로 파악된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한 이후에는 앙투아네트 손탁이 제공한 커피를 마셨다고 한다. 환궁후 고종은 1900년에 덕수궁에 서양식 정관헌을 지어 커피와 차를 마시며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로 활용했다.

 


<참고한 자료>

저잣거리의 목소리들, 이승원, 2012, 천년의 상상

조선역관열전, 이상각, 2011, 서해문집

이완용평전, 김윤희, 2011, 한겨레출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