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고봉산에 얽힌 고구려판 춘향전
고양 고봉산에 얽힌 고구려판 춘향전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4.2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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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안장왕과 한씨 미녀와의 국경 초월한 러브스토리…춘향전의 모태

 

경기도 고양시에 고봉산(高峰山)이란 얕은 야산이 있다. 해발 208m이며 산이 밋밋해 산책코스로 제격이다. 지정학적으로 보면 북쪽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어 전략적 요충지다. 6·25전쟁 때 이 곳은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 공세를 막아내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그 능선에 전쟁의 상흔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의 넑을 기리기 위해 평화의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고봉산은 1,500년전에도 고구려와 백제가 뺏고 빼앗기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도 사랑의 스토리가 전해진다. 고구려 22대 안장왕(安藏王)과 미녀 한씨의 얘기다.

 

고봉산의 위치 /네이버지도
고봉산의 위치 /네이버지도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 조에 딱 한 줄만 나와 있다.

骨衣內縣 王逢縣[一云皆伯 漢氏美女迎安臧王之地 故名王逢]”

헤석하면, “한산주(漢山州) 골의내현(骨衣內縣)에 왕봉현(王逢縣)이 있는데, 일명 개백(皆伯)이라고도 한다. 한씨(漢氏) 미녀가 안장왕(安臧王)을 맞던 곳이라 하여 왕봉(王逢)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지 신라한주 조로 돌아가면 교하군 고봉현(高烽縣)은 원래 고구려의 달을성현(達乙省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고 했다.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맞던 곳이라 왕병의 지병이 고봉으로 변했다. 지금의 고봉산이 바로 스토리의 장소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한줄로는 무슨 내용인지 알수 없다. 이 짧은 내용을 보완취재해 스토리를 완성한 사람은 구한말 언론인이자 역사가인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신채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 이 스토리가 상세하게 실려 있다. (일신서적출판, p216~219)

신채호가 전하는 안장왕과 한씨미녀의 스토리는 춘향전과 너무나 닮아 있다. 그래서 조선시대 말에 나온 춘향전이 고구려의 한씨 스토리에서 나왔다는 견해도 있다. 신채호가 전하는 스토리를 들어보자.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스토리를 그린 그림 /박차영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스토리를 그린 그림 /박차영

 

안장왕이 태자 시절에 백제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으려고 몰래 지금의 고양시 지역으로 와 적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곳에는 지방호족의 딸인 한주(漢珠)라는 아주 아름다운 처녀가 살았다. 이름을 구슬 주’()로 표기했으므로, 아마 구슬이라 불렀을 것이다. 둘은 백제 관리들 몰래 정을 통했고, 부부의 약속을 맺었다. 남자는 나는 고구려 태자인데 귀국해서 군사를 몰아 이곳을 차지하고 그대를 맞겠노라라는 말을 남기고 귀국했다.

고구려에 돌아후 아버지 문자왕이 죽고 태자가 등극, 안장왕이 되었다. 안장왕은 구슬에게 약속한 대로 여러 차례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했지만 거듭 실패했다. 그러던 중 이곳을 다스리던 백제 태수가 구슬의 아름다움에 대한 소문을 듣고 청혼했다. 구슬은 이미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어 청혼을 승낙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화가 난 태수는 구슬을 붙잡아 그 사람이 누구냐고 다그쳤다. 한주는 사랑하는 사람이 고구려 왕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태수는 적의 첩자와 장래를 약속한 것이 틀림없다고 여겨 구슬을 옥에 가두었다.

안장왕이 이 소식을 듣고는 크게 낙심했다. 안장왕은 한강 유역을 회복하고 구슬을 구해 오는 신하에게는 큰 상을 내리겠노라고 했다.

그때 을밀이란 장수가 왕의 여동생 안학공주를 좋아했는데, 신분의 차가 커 용기를 내지 못했다. 을밀이 왕에게 나아갔다. “폐하, 저에게 군사를 내주시어 그 일을 맡겨 주십시오. 반드시 폐하의 근심을 해결해 드리고 오겠사옵니다.”

안장왕은 을밀이 여동생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왕은 을밀에게 군대를 주며 그대가 이 일을 성공한다면 내 그대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오.”라며 안학공주와의 결혼을 성공조건부로 허락했다.

을밀은 안학공주에게 반드시 임무를 성공하고 돌아오겠노라고 다짐하고 백제 땅으로 떠났다. 을밀은 20여 명의 용감한 부하들과 함께 무기를 감추고 광대놀이패로 변장하여 백제 태수의 생일잔치에 참석했다.

한편 태수는 생일잔치에 구슬을 끌어내 다시 청혼을 했다. 하지만 구슬은 단심가를 부르며 태수의 요구를 거절했다. 태수는 화를 참지 못하고 마침내 구슬을 죽이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바로 그때 광대놀이패로 가장하고 생일잔치에 참여했던 을밀과 그 부하들이 감추었던 무기를 꺼내 들고 뛰쳐나와 외쳤다. “고구려 대군이 이미 이곳에 쳐들어왔다. 모두들 항복하라.”

백제의 군사들은 갑작스런 외침에 모두 놀라서 허둥대었다. 이 틈을 타서 을밀은 구슬을 구하고 안장왕에게 소식을 알렸다.

을밀에게 구출된 한구슬은 빨리 왕을 만나고 싶은 심정에 고봉산에 올라가 봉화를 밝혀 자신이 구출되었음을 알렸다. 마침내 왕과 한주는 다시 만났고, 안장왕은 한주를 고구려로 데려갔다. 물론 한주를 구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을밀도 안학공주와의 결혼을 허락받았다.“

 

신채호는 이 스토리를 해상잡록에서 인용했다고 밝혔는데, 해상잡록은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해상잡록도 아마 고양 일대에 내려오는 전설을 채집한 것으로 여겨진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이와 관련한 내용이 있다고 한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쟁터에도 사랑이 싹튼 것이다. 전쟁터 속에서 피어난 러브스토리는 후대의 춘향전보다 더 극적이고 재미있다고 하겠다. 한씨 미녀가 고산(高山) 위에서 봉화(烽火)를 피워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 후에 고봉(高烽)’이라는 이름을 남겼다.

 

고봉산 정상에는 삼국시대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봉화터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고봉산 봉수대는 파주시 교하 검단산 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같은 제4노선 봉현 봉수로 전달했다. 정상에는 석축 등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민간인들의 접근이 불가하다. 군사지역으로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이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 산은 군사적 요충지였다.

고봉산 정상에는 높다란 철탑이 세워져 있다. 다행히 고양시는 정상부에 전망대를 만들어 지난해 5월 민간인들의 출입을 허용했다. 전망대가 군부대 담벼락에 붙어 있어 보안시설은 사진촬영 금지다. 두 개의 전망대가 있는데, 하나에는 일출이, 다른 하나에는 일몰이 아름답다고 한다.

 

고봉산 정상의 전망대와 철탑 /박차영
고봉산 정상의 전망대와 철탑 /박차영

 

전망대에서 내려보면 한강 하구의 넓은 들녘에 시원하게 펼쳐진다. 일산남부 평야지대에서 유일하게 우뚝 솟은 봉우리이기 때문에 고봉산(高峰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고봉산이 위치한 일산(一山)이라는 지명은 일대에 산이 하나 있다고 해서 지어졌으며, 고양시도 고봉산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신도시가 들어서며 인구유입이 늘어 일산구는 2005년에 일산동구와 일산서구로 분구되었다. 고봉산은 일산동구 석성동에 속해 있다.

 

고봉산 전망대에서 내려본 풍경 /박차영
고봉산 전망대에서 내려본 풍경 /박차영
고봉산 전망대에서 내려본 풍경 /박차영
고봉산 전망대에서 내려본 풍경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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