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별초, 이성계 조선건국에 동원한 사병세력
가별초, 이성계 조선건국에 동원한 사병세력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4.29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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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여진인으로 구성, 1361년 첫 등장…조선건국 후 태종이 해체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할수 있었던 것은 사병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가별초(家別抄) 또는 가별치(加別赤)라고 한다. 별초(別抄)는 고려말에 특별히 가려 뽑은 정예병을 의미하는데, 삼별초의 예에서 보듯 별초 부대는 무신정권의 사병으로 전락해 있었다. 이성계의 가별초는 몽골어로 '활을 잘 쏘는 사람' 즉 궁사(弓士)를 의미하는 가베치에서 나왔다는 견해도 있다.

이성계의 선대 이안사(목조)가 동북면(함경도)으로 이주했을 때 원나라로부터 천호장(千戶長)의 벼슬을 얻었는데, 천호는 1,000명의 군사를 지휘할수 있는 지방관직이다. 가별초는 이안사와 함께 원나라로 건너간 고려인 100여명의 후손과 현지 여진족으로 구성되었다. 가별초의 규모는 대략 1천여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동북면은 고려의 영토가 아니었다. 이성계는 고려 영토 밖에서 고려인과 여진인의 혼성부대로 사병을 조직해 옛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수립한 것이다.

 

KBS 드라마 ‘정도전’ 중 황산대첩의 한 장면 /KBS 캡쳐
KBS 드라마 ‘정도전’ 중 황산대첩의 한 장면 /KBS 캡쳐

 

고려사에 이성계의 첫 등장은 공민왕 10(1361) 9월이다. 평안도 일대의 지방관이었던 독로강만호 박의(朴儀)가 반란을 일으켰다. 공민왕은 김진(金璡)을 진압군 대장으로 보냈고, 김진은 왕명을 앞세워 이성계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고려사(39, 공민왕 1010월 을미)에는 이성계가 김진을 도우라는 왕명을 받고 친병(親兵) 1,500명을 인솔하여 진군해 이미 강계(江界)로 도주한 박의와 그 일당을 모두 체포해서 처형했다고 쓰여 있다. 이때 친병은 이성계의 사병 가별초였고, 1,500명이라고 했다.

이후 고려군과 이성계의 사병은 동맹관계를 형성한다. ‘박의의 난이듬해인 1362(공민왕 11) 2월에 동북면 방면으로 부원세력인 나하추(納哈出)가 침공했을 때 이성계는 가별초를 이끌고 전투에 나가 나하추 일당을 격퇴했다.

공민왕 19(1370)에 두 번 단행된 동녕부 정벌에 이성계의 가별초는 큰 공을 세웠다. 동녕부는 원종 9(1268)에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던 서경 천호 최탄(崔坦) 등이 몽골에 투항하자, 원이 서경 일대를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통치기관이었다. 동녕부 토벌에 이성계는 지휘관 중의 1명이었을 뿐이므로 그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이 원정에서 큰 공을 세워 고려에 중요한 입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가별초는 왜적과의 전투에서도 많은 활약을 했다. 우왕 8(1380)에 있었던 황산대첩에서 이성계는 가별초를 이끌고 왜적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그로 인해 정치적 위치도 높아졌다.

우왕 14(1388)의 요동정벌과 뒤이은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의 마지막 군사활동이다. 가별초는 고려 정규군에 포함되어 요동정벌에 나섰고, 위화도 회군 이후 개경을 함락하고 우왕과 최영 세력을 제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병을 거느린다고 반드시 신왕조를 수립하는 것은 아니다. 최충헌, 경대승 등 고려 무신세력들도 사병을 거느리며 권력을 잡았으나 새 왕조를 열지는 못했다. 이성계는 정도전, 조전과 같은 급진적 신진사대부가 주변에 붙어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제공했으므로, 왕조 개창이 가능했다.

조선이 건국한 이후에도 일정기간 가별초가 유지되었다. 건국후 가별초는 집권세력이 되면서 동북면의 토호세력이 되었고, 여진족 추장들의 독자세력이 될 우려가 제기되었다. 게다가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킬 때 가별치는 반대의 편에 섰다. 이방원은 가별초를 눈의 가시처럼 보게 되었다.

 

한때 조선 건국세력이었던 가별초는 이방원이 권력을 잡은 후 사냥을 끝낸 개의 신세가 되었다. 태종 2년에 대간이 사병조직의 혁파를 상소했다. ”동북면 함주(咸州) 등처에 가별치라고 이름하는 것이 모여서 일당(一黨)이 되어 국가의 역사에 이바지하지 않고, 따로 가병(家兵)을 만들어서 사사로이 서로 결탁하여 방자하게 호기(豪氣)를 믿고 날뛰어, 주현(州縣)에서 금제(禁制)하지 못한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일체 모두 혁파하여 없애어 국가의 역사에 이바지하게 하소서.“ (태종실록 4, 2122)

태종은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1411년에 가별초를 없애 버렸다. 이방원은 즉위할 때 가별초를 이미 절반으로 줄인 후 10년 후에 완전히 철폐한 것이다. (태종실록 21, 11617)

하지만 이성계의 가신이었던 이지란(李之蘭)의 가문에선 여전히 사병을 두고 있었다. 태종 13(1413)에 임금은 이지란의 아들 이화영(李和英)을 불러 조용히 타일렀다. 이화영은 저항하지 않고 나머지 가별초를 해산했다. (태종실록 26, 1386)

 

태종은 대신에 함경도 지방 군대로 친군위(親軍衛)를 편성, 옛 가별초 병사들을 흡수했다. 특정지역 출신자로 구성된 친군위는 경국대전에 영안도 사람으로 제한한다.’라고 규정되었다. 정원은 40인으로 영안 남도와 북도에서 각각 20인씩 뽑았다. 친군위는 정규군인 오위(五衛)의 하나로 편성되었다. 이성계 출신지역인 동북면은 조선 초기에 영안도(永安道)로 편입되었다.

 


<참고한 자료>

윤훈표, 고려말 이성계의 군사 활동과 조선 건국 주도 세력의 결집 양상. 2013, 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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