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일야방성대곡의 문맥
시일야방성대곡의 문맥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5.10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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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던 이토에 대한 실망감, 고종을 면피시켜준 결과…장지연의 친일행각 드러나

 

19051120일자 황성신문에 게재된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은 이틀 전에 체결된 을사조약읅 규탄하는 내용이다. 이 논설은 황성신문 사장이자 주필이었던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이 쓴 것으로, 항일의지를 고취시키는 명문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을 목 놓아 통곡한다는 이 사설은 조약을 체결한 정부에게는 치명적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역사넷에 따르면, 신문이 배포된 1120일 오전 630분 경찰대가 황성신문사에 들이닥쳤다. 신문사를 압수 수색한 결과 인쇄된 신문 가운데 800부가 이미 서울 시내에 배포된 사실을 확인하고 지방에 배부하려던 2,280부를 압수하했다. 또한 인쇄기계 전부를 폐쇄 봉인하는 한편 사장 장지연을 비롯해 직원을 모두 체포했다. 하지만 이 기사는 1주일 뒤인 1127일자 대한매일신보에도 그대로 전재되었다. 황성신문은 정간된 상태였지만, 이 기사를 읽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대한매일신보에서 다시 보도한 것이다.

 

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시일야방성대곡을 읽으면 문맥에 몇가지 의문이 생긴다. 첫째는 한국인들이 이토 히로부미가 방한하는 것을 환영했다는 대목이고, 둘째는 조약체결의 최고 책임자인 고종황제를 비난하지 않았다는 자실이다.

사설 앞부분에 한국인들은 이토의 방문을 환영했다는 대목이 있다. 현대식으로 해석하면 이렇다.

우리 국민들은 이토 후작이 평소 한··일 삼국의 균형과 평화를 주선하겠다고 한 사람으로 믿었기에 그의 방한이 반드시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할 방책을 권고하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 상하가 환영해 마지않았다.”

장지연은 러일전쟁을 끝내고 이토가 방한했을 때 그가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켜줄 것으로 착각했고, 그가 을사조약 카드를 내밀 것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음을 실토했다. 당대 최고의 논객이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착시가 생겼을까.

황성신문은 러일전쟁 기간에 일본에 우호적인 논조를 폈다. 19042월 전쟁이 터지자 대한제국 정부는 중립을 선언했다. 황성신문도 정부의 입장을 지지했으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인종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캐나다 학자 앙드레 슈미드는 저서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에서 황성신문 편집자들은 백인국가 러시아와 황인국가 일본 사이에 싸움이 발생한 것으로 여겼다, “이 싸움이 황인 민족들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지적했다. 전쟁이 한창일 무렵, 황성신문이 러시아에 반대하는 바람에 일본이 동양의 선도자라는 논조가 더욱 명확해졌다. 황성신문 편집자들은 이웃과 힘을 합쳐 용감하게 북진한 뒤 시베리아 철도를 끊어버려 러시아를 우랄 산맥 너머로, 즉 아시아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고 썼다. 19043월에도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에 왔는데, 황성신문은 환영 의사를 밝혔다. 당시 황성신문은 청일전쟁 당시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주요 과업으로 삼았다고 하면서 오늘날까지도 일본 세력이 한국의 독립 기반이 되어 주고 있다고 했다.

전쟁 기간에 일본정부, 특히 이토는 한국 정부의 조언자로서 영토와 주권을 보호해준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일방적으로 한국 땅에 경의선을 부설하고 한국의 산과 강, , 슾지를 차지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황성신문의 사장이었던 장지연과 편집자들은 이런 일본의 이중성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된 연후에 이토 히로부미는 전승자로서 한국정부에 전리품을 요구한 것이다. 이토가 인천에 도착했을 때 제국의 백성들은 그를 환영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외교권 박탈이었다. 장지연은 믿었던 이토에 대한 실망감을 사설로 표출한 것이다.

 

장지연의 사설에 또다른 의문은 고종에 대한 원망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고, 그 아래 신하들을 맹비난했다는 점이다.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토 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고종은 조약에 서명을 하지 않았지만 권한을 대신들에게 위임한 것은 사실이다. 군주가 안 된다고 했으면, 조약은 절대로 성립할수 없었다. 고종은 책임을 대신에게 전가하며 회피하려 했다. 장지연은 이런 비겁한 고종을 면피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조약 체결의 책임을 다섯 대신에게 돌렸다.

장지연은 18641130일 경상도 상주군에서 태어난 유림의 마지막 세대였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고, 설흔살이 되던 1894년에 과거에 합격했으나 갑오개혁 이후 나라가 혼미하는 바람에 관직을 얻지 못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을미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지에 발송했고, 18971월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의 제소를 맡았다. 군왕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기 때문에 국가의 변란은 왕의 책임이 아니라, 신하의 잘못이라는 성리학적 사고에 빠져 있었다.

 

장지연은 1921102일 사망했다. 57세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시일야방성대곡'이 일본 침략의 만행을 폭로하고 규탄한 글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언론인으로서 일본 침략에 저항한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200411월에는 국가보훈처가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장지연을 선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산대 한문학과 강명관 교수와 사학자 이이화 등이 장지연이 말년에 친일 행각을 벌였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내용인즉, 장지연이 1914년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라는 조선총독부 인사의 권유로 조선총독부 어용 신문사인 매일신보의 주필로 활동하면서 친일 한시와 사설 730여 편을 기고했다는 것이다. 이에 201012월 국무회의에서 건국훈장 서훈 취소를 의결했고, 국가보훈처는 후손에게 서훈 취소 및 회수 통보를 했다. 그의 후손들은 정부의 서훈 취소조치에 반발해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승소하지 못했다.

 


<참고자료>

앙드레 슈미드,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 2007, 휴머니스트 출판

우리역사넷, 시일야방성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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