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네덜란드 무역갈등, 전쟁으로 치닫다
영국-네덜란드 무역갈등, 전쟁으로 치닫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7.15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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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에서 밀린 영국, 전쟁으로 네덜란드 제압…세계최초의 무역전쟁

 

영국 동인도회사(EIC: East India Company)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보다 13개월 먼저 출발했지만, 모든 면에서 경쟁자에 뒤졌다. 영국은 1588년 당대 최강의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했지만, 네덜란드가 그 어부지리를 챙겼다. 경제력에서 네덜란드가 월등하게 앞섰다. 스페인의 카톨릭 정통주의에 쫓겨난 유대인들이 대량 이주함에 따라 네덜란드에 자본주의가 먼저 꽃피웠고, 자본력도 든든했다. VOC의 자본금은 16세기 전반기에 유대 자본이 대거 참여하는 바람에 영국의 EIC보다 10배 이상 많았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처음에 인도에 주력했다. 인도에는 포르투갈이 1509년 디우 전투(Batalha de Diu)에서 오스만해군과 무굴제국 군대와 싸워 이긴 이후 100년 이상 거점을 확보해 독점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영국으로선 포르투갈의 인도 요새를 빼앗는 게 최선이었다.

16세기말부터 영국 상선대가 인도를 기웃거렸다. 인도 항로를 지나던 영국 선원이 포르투갈 해군에 체포되는 일이 발행했지만 대응하지 못했다. 영국은 처음에 평화적으로 무굴제국과 거래를 트고 싶어했다. 1608년 상인 윌리엄 호킨스(William Hawkins)가 상선대를 이끌고 구자라트(Gujarat) 항에 내려 많은 금과 함께 무굴제국 자한기르(Jahangir) 황제를 알현하고 영국 제임스1세 국왕의 서신을 전달했다. 무굴제국의 칸은 환대했지만, 갑자기 변덕을 부려 그를 쫓아냈다. 호킨스는 빈손으로 돌아갔다.

16129월 포르투갈 해군이 인도 수라트(Surat)에서 영국 동인도회사 선원을 체포하자, 위기를 느낀 선장 토머스 베스트(Thomas Best)가 포격 명령을 내려 두 나라 해군이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12일의 전투에서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해군이 포르투갈 해군에 완승했다. 이를 스왈리 전투(Battle of Swally)라 한다. 이 전투에 놀란 무굴제국 자한기르 황제는 영국과 교역을 허가하고, 항구를 내줬다.

스왈리 전투는 100년간 유지되었던 포르투갈의 인도 독점권이 붕괴되고, 영국이 인도 해안에 작은 거점을 형성하는 계기를 형성하게 되었고, 후에 영국이 인도를 식민화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스왈리 전투도 /위키피디아
스왈리 전투도 /위키피디아

 

영국 동인도회사는 초기에 자기나라에서 생산되는 모직물을 아시아에 팔려고 시도했다. 영국산 모직물은 당시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의 제품에 비해 일류 상품의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아시아인들이 영국 모직물을 사지 않았다. 인도나 동남아는 더운 나라여서 양털로 만든 모직물의 수요가 없었는데다 캘리코(calico)라 불린 인도산 면직물이 영국 옷감보다 우수했기 때문이다.

아시아 무역에서 향신료 거래가 수익률 400%나 되는 노다지 사업이었다. 하지만 향료 교역에서 영국은 네덜란드에 밀렸다. 처음에는 두나라 동인도회사가 동시에 인도네시아 향료 산지에 함께 뛰어들었지만, 영국이 압도적인 전함과 병력을 보유한 네덜란드에게 패해 물러나야 했다. (1623, 암본 사건)

암본 사건 이후 영국은 인도네시아 스파이스 생산지에서 물러났만, 향신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의 함대의 움직임을 피해 현지 무허가 상인들과 거래를 텄다. 셀레베스 섬의 마카사르는 무허가 상인들이 결집하는 곳이었는데 영국은 몰래 그곳에 배를 보내 화약과 아연를 주고 스파이스를 샀다. 자바섬 서쪽 반탐섬에서도 영국은 뒷거래를 하며 향료 거래를 했다. 1)

 

1차 영란전쟁 전투도 /위키피디아
1차 영란전쟁 전투도 /위키피디아

 

상품의 길이 막히면, 군인이 길을 연다. 17~18세기엔 그랬다. 두나라 동인도회사의 충돌은 결국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도발은 아시아 무역에서 뒤쳐진 영국이 걸었다.

17세기 중엽에 네덜란드와 영국에서는 큰 정치적 변동이 일어났다. 네덜란드는 1648년에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수십년 간의 전쟁을 끝내고 독립을 쟁취했다. 드디어 유럽에서 강력한 무역세력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선 청교도 혁명이 일어났다. 1649년 찰스 1세가 공개처형되고, 혁명의 주역 올리버 크롬웰이 호국경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165110월 크롬웰의 공화파 정부는 항해조례(Navigation Act)를 공포했다. 법안의 골자는 영국 항구에서 운반하는 화물은 영국 배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타깃은 네덜란드 선박이었다. 영국은 당시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네덜란드 상업과 해운업에 타격을 주기 위한 조치였다.

항해조례 이후 영국과 네덜란드는 네차례의 전쟁을 치르는데, 16세기에만 세차례 전쟁을 벌였다. 우리말로는 영란전쟁(英蘭戰爭)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은 세계 역사상 첫 무역전쟁으로 기록된다. 오스트리아-스페인의 카톨릭계 합스부르크와 싸울 때에 두 나라는 연합했지만, 적이 사라지고 나서 무역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1차 영란전쟁은 1652~1654년 사이에 벌여졌다. 두나라 전함 수는 비슷했다. 전투결과는 영국이 우세했다.

네덜란드 경제의 우월함에 대한 영국의 계획은 치밀했다. 당시 영국 공화파였던 조지 멍크(George Monck)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2)

이런저런 논리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네덜란드가 지금 하고 있는 무역에 우리가 더 많이 참여하는 것이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항해술이 발달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세계의 제해권을 제패했고, 그에 걸맞는 해군을 건설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영국이 이를 따라 잡았다.

영국은 암본 학살사건에서 굴욕을 당한 것, 향료 시장에서 네덜란드에게 밀려난 것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함대를 마음껏 늘렸다. 1649년에 39척이던 영국의 주요 전함 수가 1651년에는 80척으로 늘어났고, 병력은 16502~3만명에서 7만명으로 두배 이상 늘렸다.

네덜란드는 영국이 해상 상권 확보를 위해 군사적 수단을 늘려 나가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염려하고 있었다. 영국이 해군력을 확대하면서 어느 순간 네덜란드와 싸우 이길수 있다고 판단하는 순간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대만의 젤란디아 요새(赤嵌城) /위키피디아
대만의 젤란디아 요새(赤嵌城) /위키피디아

 

1차 전쟁 이후 네덜란드는 해군력을 확장하면서 무역을 진흥시켰다. 하지만 1660년 왕정복고로 찰스 2세가 복귀한 이후 항해조례를 갱신하자 두 나라는 다시 전쟁에 들어갔다. 2차 영란전쟁(1665~1667)에서 영국 해군은 북아메리카의 뉴암스테르담을 점령하고 뉴욕으로 이름을 바꿨다. 두 번째 전쟁은 흑사병과 런던대화재 등으로 영국이 수세에 몰린 가운데 네덜란드 해군이 런던 입구가지 침입하는 등 네덜란드의 기세가 여전히 강력함을 보여주었다.

3차 영란전쟁은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라인강을 건너 네덜란드를 침공한 것이 주요한 전투였고, 영국은 보조적 역할을 했다.

세 차례의 17세기 전쟁의 결과로 네덜란드는 상업과 무역에서 퇴조의 길을 걷게 된다. 네덜란드는 북아메리카의 거점을 잃었고, 아시아에서도 영국 상선대에 길을 열어주게 된다.

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6112월에 명()나라의 유신 정성공(鄭成功)에 의해 대만의 거점 젤란디아 요새(중국명 赤嵌城)을 빼앗기게 된다.

유럽에서, 아메리카에서, 아시아에서 손발이 잘려나가면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그 빈 자리를 영국 동인도회사가 차지했다.

 


1) 아사아 미노루, 동인도회사, 2004년 도서출판 파피에, 39

2) 그레이엄 엘리슨, ‘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 2018년 세종서적, 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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