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기에 일본과 중국의 구미사절단 기록
근대기에 일본과 중국의 구미사절단 기록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6.16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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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엔 이와쿠라 사절단의 미구회람실기, 중국엔 장덕이의 항해술기

 

19세기말 동양은 서양 화포와 군함에 놀랐고, 그 위력에 눌려 시장을 개방했다. 약간의 시차는 있지만 중국과 일본, 그리고 조선은 각기 미국과 유럽으로 사절단을 보내 서양문물을 배워오게 했다.

 

일본에선 도쿠가와 막부 시절인 1860년대에 8번에 걸쳐 구미지역에 파견했다. 그중 1860년에 보낸 미국 사절단의 규모는 메이지 시대인 1871~1873년의 이와쿠라 사절단과 규모가 비슷했다. 하지만 도쿠가와 막부는 곧 붕괴했기 때문에 막부의 해외 수업은 역사적 의미를 잃었다. 일본 역사에서 의미를 가진 해외시찰단은 이와쿠라 사절단이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가 특명전권대사를, 기도 다카요시가 부사를 맡았으며, 유신 주체세력이었던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등이 포함되었다. 107명은 18711128일 미국 배를 타고 요코하마를 출항했다. 이둘이 1973913일 다시 요코하마항으로 돌아올 때 19개월 21일간 지구를 일주했다. 사절단은 미국, 영국, 스코틀랜드,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러시아,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12개국을 방문하고,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거쳐 돌아왔다.

사절단이 각국애서 보고 느낀 내용을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가 대표필진을 맡아 낱낱이 적어 100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特命全權大使 美歐回覽實記)를 편찬했다.

 

이와쿠라 사절단 /위키피디아
이와쿠라 사절단 /위키피디아

 

중국의 청나라도 1866년에 빈춘(斌椿)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미국과 유럽지역에 보냈는데 규모는 40명이었다. 이듬해인 1867년 미국 공사 앤슨 벌링엄(Anson Burlingame)을 단장으로 2차 사절단을 구성, 미국과 유럽에 보냈다. 두 번째 사절단은 규모에서 이와쿠라 사절단과 비슷했고, 기간도 2년이 넘었으므로, 내실을 갖추었다고 볼수 있다. 이 두 사절단에 장덕이(張德彛)가 참가했다. 장덕이는 첫 번째 유람을 다녀와 항해술기(航海術奇)를 남겼고, 두 번째 외유의 기록으로 구미환유기(歐美環游記)를 남겼다. 이후 프랑스, 영국과 러시아, 독일, 일본을 다녀온 기억과 메모를 살려 모두 8권의 책을 냈다.

일본과 중국의 두 기록은 서양의 충격을 동양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들의 기록은 본국에 돌아와 근대화, 즉 서구화를 시도하기 위해 남긴 저술들이다. 흔히 20세기를 거치면서 일본이 먼저 근대화를 이루고 중국과 한국이 일본의 침략을 받거나 지배를 당해 한쪽이 성공 케이스, 다른 쪽이 실패 케이스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하지만 당시 자료들은 두 나라가 비슷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서구를 바라보았음이 드러난다.

 

앤슨 벌링엄 /위키피디아
앤슨 벌링엄 /위키피디아

 

중국과 일본의 두 방대한 견문록을 요약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다만 두 기록이 어떻게 나왔으며, 출판후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를 실펴보는 것이 양국 근대화의 속도를 가늠하는데 도움이 된다. (구메 구니다케의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는 이와쿠라 실기’, 장덕이의 여행기 8권은 항해술기로 표현한다.)

 

이와쿠라 실기의 간행처는 태정관 기록괘(太政官 記錄掛)라는 관청에서 878년에 간행되었다. 이 기관은 정부 간행물 발행처였으므로, 그의 저술은 사실상 유신정부가 발행했다고 보아야 한다. 구메는 사절단을 대표해서 집필한 것이다. 사절단의 지도부는 주요 행사에 구메를 대동했다는 점에서 사절단의 대국민 보고서라고 할수 있다.

구메는 나베시마(鍋島)번 출신의 무사로 유신 이후 관원이 되었다. 태정관 소서기관이란 직함으로 이와쿠라 사절단에 발탁되었다. 그는 이와쿠라 실기를 저술한 이후 역사기록자인 수사관(修史官)과 편수관(編修官)이 되었다. 관직을 그만둔 후에 제국대학(도쿄대 전신), 와세다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쿠메의 이와쿠라 실기는 지금까지 일본은 물론 각국에서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프랑스에서도 당시 자국의 모습을 일본인이 어떻게 보았는지를 이 기록을 통해 재확인했다. 일본의 기록은 대중화되었고, 많이 알려졌다.

 

그에 비해 장덕이의 저술은 청조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의 저술은 개인의 노력으로 이뤄졌고, 개인 비용으로 출판했다. 출판기관에 의해 중국과 일본의 관심 정도에 차이가 드러난다.

장덕이는 랴오닝(遼寧)성에서 태어난 한족으로 팔기 출신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관료가 되어 1866년 빈춘 사절단울 시작으로 해외를 다녔다. 세 번째 방문(1870~71) 대상은 법국(法國, 프랑스)이었는데, 그는 파리코뮌을 목격했다. 가는 도중에 일본인 일행을 만나 대화한 기록도 남아 있다. 그의 마지막이자 여덜번째 파견은 1902~1906년 영국 런던이었다.

장덕이의 항해술기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잊혀져 있다가 1997년에 중국에서 간행되었다. 장덕이의 저술 8권 가운데 일본을 방문하고 기록한 제7권은 빠져 있다.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게 중국측 설명이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Iwakura Mission

Wikipedia, Anson Burlingame

환혼양재와 중체서용의 재고(동아시아 근대이행의 세 갈래 중), 미야지마 히로시,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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