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마지막 공양왕의 두 개 무덤
고려 마지막 공양왕의 두 개 무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7.24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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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삼척 궁촌리에서 교살되어 매장…마을 주민들이 매년 4월 17일에 제사

 

강원도 삼척시내에서 7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근덕면 궁촌리를 만나게 된다. 태백산맥의 한줄기 가지가 동쪽으로 뻗어 바다와 만난 곳에 궁궐마을(宮村)이 있다. 산림이 울창하고 해변엔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루는 이곳은 630년전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이 죽은 곳이다. 마을 입구 야트마한 야산에 네 개의 무덤이 있고, 그중 오른쪽에 봉분이 가장 큰 무덤이 공양왕릉이다. 그 옆에 두 개는 왕과 함께 교살된 두 왕자의 무덤이고 나머지 하나는 왕의 시녀 또는 왕이 타던 말의 무덤이라고 전해진다.

 

삼척 궁촌의 공양왕릉 /박차영
삼척 궁촌의 공양왕릉 /박차영

 

고려 마지막 34대 공양왕(恭讓王)1389~1392년 사이 3년간 재위했으며, 임금 자리를 이성계에 양위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그에게 2년의 목숨을 연장시켰을 뿐, 끝내 역모 혐의를 뒤집어 씌워 죽였다.

이름은 요().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가 우왕·창왕을 신돈의 아들이라고 폐위하고 진짜 왕을 세운다는 명분으로 20대 신종의 7대손인 정창군을 용상에 올랐다. 이때 나이가 34. 고려사에 공양왕의 성품은 우유부단하다고 했다. 결정권이 없는 허수아비 왕은 이성계 진영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우왕ㆍ창왕 부자를 살해하도록 명을 내려야 했다.

재위 4년째 되던 1392412일 공양왕은 이성계 집으로 찾아가 왕위를 넘겨주었다. 그해 717일 이성계는 개성 수창궁에서 부하들이 도열한 가운데 조선왕조 첫임금 즉 태조로 등극했다. 바로 그날 공양왕은 이성계 앞에 엎드려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원주로 내려갔다. (태조실록 717)

한달 후인 그해 87일자 태조실록왕요(王瑤)를 봉하여 공양군(恭讓君)으로 삼아 간성군(杆城郡)에 두었다고 했다. 이성계는 공양왕을 군()으로 떨어뜨리고, 태백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간성(고성)으로 보낸 것이다.

공양왕의 귀양살이에는 충신 함부열이 끝까지 따라다녔다. 지금도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왕곡마을에는 함부열을 시조로 하는 양근 함씨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다. 공양왕은 간성에서 소수 충신들의 보필을 받으며 2년을 살았다. 이성계는 고려 잔당들이 공양왕을 옹립할 것을 두려워해 간성보다 더 오지인 삼척부로 이동시켰다. 태조실록 3(1594) 314공양군 삼부자를 삼척으로 옮겨 안치시키었다고 했다. 삼부자란 공양왕과 장자 석()과 차자 우(), 3인을 말한다.

왕조시대에 삼척은 가장 험한 유배지로 알려져 있다. 가까이에 있는 동해시 무릉계곡은 조선시대 최고 반역자들의 유배지였다. 시퍼런 동해바다를 건널수도 없고, 태백산맥을 넘자니 호랑이에 물려 죽는다. 이성계의 조상도 전주에서 원님의 기생을 후려치다 도망친 곳이 삼척이었다. 공교롭게 전주 원님이 삼척으로 부임했으니 또다시 당시 몽골 땅이었던 함흥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어쨌든 삼척은 고려의 마지막과 조선의 태동이 교차하는 곳이기도 하다.

 

삼척 궁촌의 아름다운 해변 /삼척시
삼척 궁촌의 아름다운 해변 /삼척시

 

공양왕 부자가 옮긴 곳이 궁촌이다. 공양왕과 두 아들은 이 곳에 한달간 살았다.

새 왕조는 삼척으로 옮긴 공양왕을 오래 두지 않았다. 이사한지 한달후 이성계는 정남진 등을 삼척에 보내 자신의 뜻을 전했다 “.대간과 법관이 연명상소를 올려 청하기를 12번이나 하였으되, 여러 날 동안 다투고, 대소 신료들이 또 글을 올려 간()하므로, 내가 마지못하여 억지로 그 청을 따르게 되니, ()은 이 사실을 잘 아시오." 이성계는 신하들 핑계를 댔다. 이유는 동래(부산) 현령 등이 반역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공양왕과 두 아들은 교살되었다. 1394417(음력)이다.

1916년 심의승(沈宜昇)이 삼척에 전해 내려오는 공양왕 전설을 간추려 삼척군지(三陟郡誌)에 실었다. 그 기록에 따르면, 근덕면 궁촌리는 공양왕이 천궁 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고, 왕의 거소 북쪽에 고돌치(古突峙: 고돌재)가 있는데 고돌치에 공양왕릉이 있다고 했다. 궁촌리 전승에 따르면, 왕이 살 때는 동현(銅峴)이 있어 동문(銅門)을 세웠고, 사라치(沙羅峙)에 살문(箭門)을 세웠다고 했다. 조선 숙종 때 삼척부사로 내려온 허목(許穆)은 척주지에 이에 대한 기록을 실었다. ‘사라치란 공양왕을 살해한 곳으로 살해재가 변한 말이라고도 한다.

 

고양시 덕양구 고양왕릉 /문화재청
고양시 덕양구 고양왕릉 /문화재청

 

공양왕의 무덤은 두 곳에 있다. 하나는 지금 이곳 궁촌 왕릉이고, 다른 하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다. 여기에 사연이 있다.

고양 공양왕릉은 왕이 죽은지 22년후인 1416(태종 16) 이성계의 아들 태종 이방원은 공양군을 공양왕으로 복위시키고, 능호를 내렸다. 이 때 고양에 무덤을 만들었다.

고양의 왕릉은 쌍릉으로,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무덤 앞에는 비석과 상석이 하나씩 놓여 있고, 두 무덤 사이에 석등과 돌로 만든 호랑이 상이 있다. 이 호랑이 상은 고려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왕릉은 조선 초기 왕릉과 비슷한 양식이다. 무덤의 양쪽에는 문신과 무신상을 세웠다. 비석에는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고, 무덤을 표시하는 돌은 조선 고종 때에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삼척과 고양 중 어느 무덤이 진짜일까. 문헌의 기록이 부족해 어느 쪽이 진짜 왕릉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고양의 능은 조선 왕조가 인정한 능이고, 삼척의 능은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는 것이다.

둘 다 조선시대 문헌에 남아있다. 삼척시 왕릉에 대한 기록은 1662(현종 3) 삼척부사 허목의 척주지와 1855(철종 6) 김구혁의 척주선생안에 나와 있다. 그리고 3년마다 공양왕릉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풍습이 남아 있다.

무덤을 파보면 실체가 드러날 수 있다. 1977년 삼척군 근덕면장 최문각이 군수의 지시를 받아 발굴을 시도했으나 궁촌리 마을 사람들이 이 능을 발굴하면 동네가 망한다고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무덤의 앞부분의 석축을 허물고 조금 파 들어갔더니 능의 정면에 세로 약40, 가로 약20의 석판이 있었고 약 1척 정도 내부에 석관이 보였다고 한다. 개봉 작업 중에 능과 다른 2기 무덤에서 구렁이가 나와 작업자들이 모두 놀랐다. 그후 이 무덤이 공양왕과 두 아들의 무덤이라고 믿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곳이 진짜 왕릉인지 확인되지 않지만, 삼척에 묻혔던 공양왕의 유골이 후에 고양으로 이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양의 공양왕릉은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있고, 삼척 공양왕릉은 강원도 기념믈로 지정되어 있다.

옛날에 능 아래에 못이 있었는데 일제 때 메워졌고 그 못가에는 비석이 많았으나 모두 그 안에 넣었다고 한다. 능은 1837(헌종 3)에 삼척부사 이규헌이 개보수했으며, 1977년 섬축군과 근덕면이 새롭게 보수했다.

삼척시와 궁촌리 주민들은 공양왕과 두 아들이 죽은 417일에 제사를 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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