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재정개혁, 자주적 근대화 지향했다”
“고종의 재정개혁, 자주적 근대화 지향했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7.29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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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준의 자력근대화론…갑오개혁으로 근대적 재정 운영, 을사조약 이후 기회 박탈

 

연세대에서 재정학을 가르치던 김대준(金大濬, 1923~1986) 교수는 1974년에 이조말엽의 국가재정에 관한 연구(18951910)예산회계제도와 예산분석을 중심으로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당시엔 박사학위가 없는 대학교수들이 많았다. 김대준이 교수로 재직하면서 쓴 박사 학위 논문이 이것이다.

이 논문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가 이 논문을 발견한 것은 1990년대 후반이었다. 이태진은 그 논문을 본 소감을 “30년간 저장되었던 양질의 포도주를 개봉하는 기분이었다고 표현했다. 역사 전공자가 아닌 분이 중요한 사료를 섭렵했고 고종시대 근세사에 대한 진실의 세계에 접근했다는 것이다. 김대준의 논문이 고종의 자질부족론 내지 근대화 실패론을 부정하고, 자력 근대화 실재론, 근대화 기회 피탈론을 뒷받침한다고 이태진은 평가했다. 이태진은 대한제국은 무능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많은 가능성 때문에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주의에 부딪혀 좌초하고 말았다, ”이 책이 바로 자수자강의 근대화 정책을 편, 대한제국 정부의 예산제도를 다루었다고 했다. 김대준의 박사학위 논문은 이태진의 주선으로 고종시대의 국가재정 연구“(태학사, 2004)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책표지(태학사)
책표지(태학사)

 

김대준은 갑오개혁(1894) 이후 조선왕조가 근대적인 예산회계제도를 시행했고, 예산을 합리적으로 운영했음에도 부정적으로 알려져 있다며 연구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갑오개혁 이후 한일합병까지의 회계제도, 예산책정과 집행 제도, 예산의 운영을 면밀하게 조사, 분석했다. 그의 결론은 1896년부터 1904년까지 대한제국은 주권을 자주적으로 행사하고 정치·경제적으로 도모하면서 합리적으로 재정을 운영했으나, 을사조약(1905) 이후 일본이 재정고문을 통해 내정간섭을 하면서 재정주권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근대적 재정제도

근대적 예산제도는 봉건 전제군주의 자의적 재정운용을 저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갑오개혁 이후 1895330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예산에 관한 근대적인 회계법이 제정되었다. 아울러 은행이 설립되고, 은본위제도가 새로이 채택되었다. 그동안 쌀 등 현물로 납부되던 세제가 화폐제도로 전환한 것이다. 중앙은행이 재정의 금고를 취급했다.

갑오개혁은 일본의 영향 하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회계법도 일본 법률의 영향을 받은바 크며 일본 회계법의 원본인 독일 법률의 간접적 영향을 받았다. 당시 회계법은 조세법률주의를 채택해 예산, 결산, 국채 등을 법률로 정하고 각의 의결을 거쳐 군주의 재가를 받도록 했다. 회계연도를 매년 11일부터 12월말까지로 정했다. 회계법의 시행세칙에 미비한 점이 있었지만 비교적 합리적으로 운영해 정상을 기했다고 볼수 있다.

 

예산회계 의결구조

구한말에 의회제도가 없었지만 입법기관에 준하는 관제가 있었다. 1895년엔 내각관제를 시행했다. 세입세출의 예산 및 결산, 국채 사항, 지출, 조세의 신설 등의 절차가 내각회의 의결을 거쳐 국왕에 상주, 재가를 받아 시행되었다..

1896년엔 의정부 관제로 바뀌어 국왕의 실권이 강화되었으나 과거와 같은 전횡은 할수 없었다. 러일전쟁 직후 1904년에 국왕의 권한이 상당히 제한되었고 을사조약 이후 일본이 내정개혁이란 구살로 재정고문을 파견했다. 일본이 임명한 재정고문은 재정 사무 일체에 관해 동의권을 가졌고, 의정부 회의에 참여했으며, 수시로 국왕을 알현할수 있었다. 1907년 이후 통감부가 재정에 관한 실질적 권한을 다 장악했다.

 

고종말기 예산의 구성비율 /김태준 논문 캡쳐
고종말기 예산의 구성비율 /김태준 논문 캡쳐

 

예산분석

김대준은 1896년 이후 대한제국의 예산안을 입수했다. 1896년 예산안은 관보에 발표되었고, 1897년 이후 예산안은 정부의 공식적 발표는 없었지만 신문에 단편적으로 보도했다. 김대준을 이를 수집해 분석했다.

김대준의 분석에 따르면, 1896년부터 1904년까지 대한제국은 회계법과 관제에 따라 매년 예산을 편성했다. 이 기간 예산은 독자적으로 편성되었다. 차기년도 예산은 10월말까지 각의를 통과하고 국왕의 재가를 받아야 하나, 법정기일을 준수하지 못한 해가 많았다.

1896~1904년 사이에 예산 규모가 안정적인 균형을 유지하면서 점진적으로 확대되었다. 이 당사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군사비가 확실하게 증가했다.

하지만 1905년 이후 일본이 간섭함으로써 재정의 자주성을 상실했고, 이후 재정의 rebah가 확대되어 적자요인이 커졌다. 이후 군부와 법부가 폐지됨에 따라 군사비와 치안유지비가 급감했다.

1905년 이후 황실비가 급증했는데, 이는 일본이 황실에 경제적 안정을 줌으로써 조선에 대한 정치적 안정을 꾀하기 위해서였다. 조사대상 기간 중에 황실비용은 전체 재정의 평균 10.1%였는데, 황실비에서 제사 등에 쓰는 향사비(享祀費)의 비중이 대략 17%를 차지했다.

 

​고종말기의 국방비 추이 /박차영​
​고종말기의 국방비 추이 /박차영​

 

1896년부터 대한제국의 예산에 대해 김대준의 강평은 일부를 소개한다.

1896: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등으로 국방력 강화, 경찰력 강화 등에 예산의 중점을 두었다. 국방, 치안, 조폐 등에 재정의 비중이 컸지만 우정사업, 교육비 등엔 너무 미약했다.

세력이 없는 계층은 중과세를 부담했고, 세력이 있는 계층은 탈세의 특혜를 받을수 있었다. 과세의 공평을 기하려면 사회적 계층에 관계 없이 동일하게 조세가 부과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음력이 양력으로 개정됨에 따라 회계연도의 실질적인 단축이 생겨나 50여일 간의 세계(歲計)의 차이가 이월되었다.

세입과 세출의 차이는 일본으로부터 차입으로 메웠다. 서재필은 재무행정의 제도상 허점과 관리들의 병폐를 실랄하게 비판했다. 이런 시정이 이뤄지면 세입의 부족이 없을 것이다.

김대준 /책표지
김대준 /책표지

 

1897: 균형 예산을 이뤘다.

1898: 조세수입이 총세입의 83.4%로 재정의 건전성을 나타냈다. 지세(地稅) 수입은 전년보다 30%의 증가율을 보였다. 이는 전년도 풍작 때문이다.

1899: 전년도 예산보다 43% 증가한 확대균형예산이다. 을미차관을 상환하기 위한 예산이 계상되었기 때문이다.

1901: 군사비가 증가함에 따라 세출이 47.5% 증가했다.

1902: 외부(외교부)에서 덕국(독일), 법국(프랑스)에 공관을 설치하는 바람에 그에 따른 예산이 계상되었다.

1903: 국채 상환비용이 크게 증가했다. 일본 제일은행 차입금에 대한 원리금 상환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군부(국방부) 소관 비용도 크게 증가했다.

1904: 국채 상환 비용이 크게 증가하고 군부 예산이 정점을 이루었다. 특히 처음으로 군함을 도입했는데, 그 비용이 계상되었다.

1905: 일본의 재정과문관이 채용되어 예산이 처음 편성되었다. 화폐단위가 원()에서 환()으로 바뀌었다. 종래의 은() 2원이 신화폐 금() 1환에 상당했다. 황실비용이 전년도에 비해 78.9% 증가했다. 일본이 재정적 면에서 황실을 안정시키고 침략의 마수를 손 쉽게 뻗치려고 한 수단으로 볼수 있다. 군부에 대한 비용도 크게 삭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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