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말선초에 엇갈린 함씨 두 형제
여말선초에 엇갈린 함씨 두 형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8.04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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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부림은 이성계에 충성, 동생 부열은 공양왕 모셔…함씨 분가의 계기

 

형제는 우애가 깊었다. 다만 둘은 역사관이 달랐다. 형 함부림(咸傅霖)은 부패한 고려의 구신들을 탄핵하다가 벼슬을 잃었고 그 길로 이성계의 조선 창업을 도았다. 그에 비해 동생 함부열(咸傅說)은 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며 마지막까지 공양왕을 보필했다.

함부림·부열 형제는 고려에서 보문각재학을 지낸 함승경의 아들이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격변기에 두 형제는 어느 임금을 모실 것인지를 놓고 갈라섰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공양왕은 원주로 추방되었다. 함부열은 이성계를 임금으로 모실수 없다며 공양왕을 따라갔다. 그해 8월 이성계는 공양왕을 공양군으로 강등하고 태백산맥 너머 강원도 간성으로 유배를 보냈다. 함부열은 가족을 이끌고 공양왕을 따라 간성으로 갔다. 그곳에서 2년을 살았다.

함부열의 가족이 살던 마을이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의 왕곡(旺谷)마을이다. 이곳은 함씨, 최씨, 김씨의 집성촌으로 문화재청에서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왕곡마을 /문화재청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왕곡마을 /문화재청

 

2년후인 1394년 이성계는 반역자들이 공양왕을 옹립할 것을 두려워 삼척으로 이동시켰다. 함부열은 공양왕을 따라 삼척으로 갔다. 공양왕이 삼척부에 내려온지 한달후, 이성계의 사신이 사약을 들고 내려왔다. 태조실록엔 중추원부사 정남진이 내려왔다고 했는데, 야사에는 김부열의 형 부림이 정남진과 함께 삼척 궁촌에 왔다고 한다. 부림은 조선 개국공신 반열에 오르고 당시 형조전서를 맡고 있었다.

야사는 정사와 다르게 전개된다. 동생 부열은 형 부림을 찾아가 왕자와 다른 왕족들만 죽이고 왕은 간성으로 피신시킬 것을 간청했다. 부림이 동생의 간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부림은 조정의 명령을 거역할수 없다며 자객을 간성으로 보내 공양왕을 죽였다. 부열은 공양왕의 시신을 산 기슭에 모시고 자신이 죽으면 무덤 아래에 묻고 제시를 지내달라고 유언했다. 다만 공양왕의 무덤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집안에 피해가 올 것을 염려해 왕의 제사를 모실 때엔 축문 없이 지내도록 했다.

 

공식적으로 공양왕릉은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의 무덤 2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강원도 고성에 세 번째 공양왕릉이 있다는 것이다.

함부열의 후손들이 1983년 함부열 묘역을 정비하다 위쪽에서 화판을 발견했다. 이에 문중에서는 이 묘가 공양왕 무덤이라고 확신해 봉분을 만들었다. 매년 함부열 제사에 앞서 왕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공양왕은 간성에서 2년간 살아 간성왕이라고도 한다. 이에 간성의 공양왕릉은 간성릉이라고 부른다. 고양의 공양왕릉은 국가사적, 삼척의 공양왕릉은 강원도 기념물인데, 고성의 무덤은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함씨 종친회에 따르면 양근(楊根) 함씨와 강릉(江陵) 함씨는 같은 뿌리인데 본관은 양근이었다. 형 부림이 동생을 설득했으나 동생 부열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공양왕을 보필하자 더 이상 설득을 멈추고 본관을 바꾸었다. 그래서 부열의 후손은 양근 함씨, 부림의 후손은 강릉 함씨로 갈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본관을 강릉으로 바꾼 함부림의 후손들은 조선시대에 융성했으나, 함부열의 후손들은 가계가 위축되는 상황에 처했다. 그럼에도 형제는 우애가 깊어 서로 돕고 보살피며 살아갔다고 함씨 종친회보에 적혀 있다.

함부림은 조선에서 대사헌과 팔도감사, 형조판사를 지냈다. 함부열은 고려조에서 예부상서겸 홍문박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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