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제철 건설의 방패막이 “종이마패”
포항제철 건설의 방패막이 “종이마패”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8.06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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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에 전시…정치적 외압 막기 위해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준 절대신임장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기획전 박정희 대통령과 철의 사나이를 둘러보면서 눈에 띠는 것이 있었다. ‘종이마패였다. 마패(馬牌)의 원래 의미는 고려·조선 시대에 관원이 지방에 갈 때 역마를 사용할수 있는 권리를 증빙하는 패였는데, 일반에서는 암행어사가 임금에게서 부여받은 절대권한을 의미했다. 종이마패도 그런 의미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박태준 사장에게 절대권한을 부여해준 종이서류였다.

 

전쟁기념관 특별기획전에 형성화된 고로 쇳물 /박차영
전쟁기념관 특별기획전에 형상화한 고로 쇳물 /박차영

 

1960년대에 포항의 모래 사장에 제철소를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6·25 전쟁 때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한 이 나라가 다시 일어서기까지는 앞으로 100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보릿고개와 배고픔, 궁핍이 만연해 있던 시절에 박정희 정부는 제철산업을 하겠다고 했다. 세계은행은 한국에서 일관제철소 건설은 불가능하다며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에게서 받을 예정인 청구권자금을 제철소 건설에 돌려쓰기로 했고, 1968년 포항제철을 설립해 박태준을 사장으로 임명했다. 박태준이 어려움을 돌파해낼 인물로 보았던 것이다.

초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세계은행이 뒤틀자 선진국 철강회사들이 기술과 차관 제공을 거절했고, 국내에선 대일청구권 자금을 전용하는데 대한 정계·언론계의 비난과 반대가 거셌다. 이런 가운데 박태준은 박정희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제철소 건립을 밀어붙였다. 일본 철강회사들이 한국의 제철소 건설을 비아냥거리고 견제했지만 일본통인 박태준이 설득에 나서 일본에서 기술 도입을 타결지었다. 19691215일 신일본제철, 일본강관 등이 구성한 저팬그룹(JG)과 예비기술 용역 계약을 체결해 103만톤 규모의 1기 설비계획을 확정하고 본격적으로 설비 구매에 나섰다.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제철소 사업이 서서히 형체를 굳혀가자, 이번엔 이권을 얻으려는 정재계의 유착세력이 개입했다. 제철설비는 고가였다. 여러 업체가 설비 구매에 개입하기 위해 유언비어와 역정보를 퍼트렸다. 박태준이 설비구매협상을 위해 일본에 가면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고 귀국하면 또 다른 상황이 벌어졌다. 설비구매와 원료확보에 내부와 외부에서 압력이 작용한 것이다. 집권 공화당의 유력인사는 설비 구매에 일벙한 비율의 리베이트를 내놓으라고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힘께나 쓰는 사람들이 연줄을 대서 청탁을 해왔고, 제철소 사업은 국내외의 압력이라는 예상치 못한 문제에 직면했다. 청탁을 받자니 사업부실, 과다비용이 우려되었고, 거절하자니 상대가 만만치 않았다.

박태준은 누구의 압력도 받길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혼자의 힘으로 해결하기 힘들었다. 그는 고심 끝에 결단을 내렸다. 대통령를 만나 권한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197023. 박태준은 제철소공사 진척사항을 보고하러 청와대에 들어갔다. 보고가 끝나고 박태준은 대통령에게 구매 절차에 문제가 있다면서 설비구매 과정에서 공급업체에 상납과 리베이트를 받아내려는 정치인들의 간섭과 압력이 극심하다고 보고했다. 박정희는 지금 말한 내용을 여기다 간략히 적어봐라며 메모지를 건네 줬다. 박태준은 만년필을 들어 그동안의 문제점을 간단하게 요약했다. 골자는 포항제철이 일본기술협력단(JG)과 협의해 공급업체를 결정한다.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간편 계약을 하더라도 정부가 이를 보증해준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메모를 읽고 왼쪽 위의 모서리에 친필서명을 하고, “이제는 번거롭게 나를 찾아오지 말고 이걸 보여 주면서 소신대로 밀고 나라고 했다.

이후 박태준은 어떠한 청탁도 물리칠 뒷배경을 얻게 되었다. 지금와 돌이켜보면 독재정권 시절에나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그런 대통령의 지지가 오늘날의 포스코를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포스코는 그때의 메모지를 종이마패라고 부르며 보존하고 있고, 이 메모지가 전쟁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포스코의 종이마패 /박차영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포스코의 종이마패 /박차영

 

이어 1971년 박태준 사장은 허허벌판의 부지 위에 공장 위치만 표시한 입간판 사진 몇장만을 들고 호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리나라는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조업에 필요한 철광석과 원료탄의 안정적 수급이 절실했다. 그러나 일본이 호주를 제철원료 확보의 거점으로 삼으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 호주의 원료 공급사들을 설득하기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집요한 설득으로 마침내 철광석과 원료탄 장기구매 계약을 체결할수 있었으며, 특히 일본에 비해 소량 구매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가격과 조건으로 공급받기로 했다.

우여곡절 끝에 197369일 오전 730분 포항 1고로 출선구에서 황금빛 첫 쇳물이 쏟아졌다. 처음 건설해본 대형고로에서 쇳물이 내려오자 철의 사나이들은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그해 73일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포항 1기 종합준공식이 열렸고, 우리나라는 제출입국을 실현하게 되었다.

 

포항제철 대역사를 준공한 다음날인 1992년 10월 3일 박태준 회장이 박정희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고 25년 대역정을 마무리했음을 보고했다. (전시 사진) /박차영
포항제철 대역사를 준공한 다음날인 1992년 10월 3일 박태준 회장이 박정희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고 25년 대역정을 마무리했음을 보고했다. (전시 사진) /박차영

 

전쟁기념관의 특별기획전은 74일 개막해 109일까지 열릴 예정이다. 주최는 경상북도와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이다. 우리나라 철강산업과 경제발전 역사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된다. 입구에서 포석호라고 새겨진 호돌이 볼펜 선물도 받았다.

 

특별기념전 포스터 /전쟁기념관
특별기념전 포스터 /전쟁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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