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서 조지 오웰, 공산당에 환멸
스페인 내전서 조지 오웰, 공산당에 환멸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8.17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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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으로 내전에 참여, 공산당의 배신과 음모 절감…‘카탈로니아 찬가’에서 경험 전달

 

조지 오웰은 동물 농장’, ‘1984’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국의 소설가다. 그가 1938년에 쓴 카탈로니아 찬가’(Homage to Catalonia)는 스페인 내전에 참가해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배신과 음모, 반혁명성을 경험하고 귀국후 쓴 다큐멘터리다.

그의 스페인 내전 참전은 순수한 동기였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이 전쟁에 참여했을 때 나이는 33세였다. 군대에 입대할 나아기 훨씬 지나서, 남의 나라 내전에 참여한 것은 순수한 동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문 기사를 쓸까 하는 생각으로 스페인에 갔다고 했지만, 가자마자 의용군에 입대했다. 스페인에 입국하기 전, 파리에서 만난 미국 소설가 헨리 밀러는 어떤 의무감이나 죄책감에 스페인 내전에 뛰어드는 것은 미친 짓이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파시즘에 대항한다는 계몽적 생각은 헛소리다.”고 그의 참전을 뜯어말렸다. 그럼에도 오웰은 그것(의용군)이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는 자기변명에 속아 참전하게 되었다.(민음사, p11)

그는 영국 독립노동당 당원이었던 존 맥네어를 만났고, 그가 스페인 우당인 독립노동자당을 소개해줘 오웰은 통일노동자당(POUM)이 장악하고 있는 카탈루냐 전선으로 배치받았다. 카탈로니아는 스페인어 카탈루냐(Catalunya)의 영어식 표기다.

독립노동자당은 사회주의 정당인데 소련공산당의 지휘를 거부한 순수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노동자 혁명의 대의를 꿈꾸던 사회주의자였다. 그에 비해 스페인 통일사회당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련 공산당의 지시를 받는 공산주의 정당이었다. 통일노동자당과 통일사회당은 이름만 보면 구별이 되지 않는 좌파정당인데도 둘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이념 차이와 대립관계였다. 다만 프랑코에 반대하는 반파시스트 인민정부에서 공동전선을 취할 뿐이다.

책 표지 /민음사
책 표지 /민음사

 

카탈루냐는 전세계 무정부주의자의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무정부주의는 전세계 어디서도 성공하지 못했으나, 오웰이 스페인에 입국했을 때 이들은 카탈루냐를 장악하고 지배했었다. 카탈루냐는 무정부운동의 한 파인 생디칼리스트들이 전국노동자연맹을 장악하고 자치정부 헤네랄리테를 주도했고, 통일노동자당의 지지를 받았다. 소련이 인민전선 정부에 무기를 지원하면서 통일사회당의 목소리가 높아갔다. 스페인 공산주의자들의 통일사회당은 카탈루냐의 혁명정부를 지휘하는 전국노동자연맹과 통일노동자당을 배척하려고 했다.

한편으로는 인만전선과 파시스트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인민전선 내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사회주의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내전 속에 또다른 내전이 벌어진 것이다.

19371, 조지 오웰은 독립노동자당 의용군으로서 4개월여 전선에 투입되었다. 오웰은 전방 생활을 즐겁게 묘사했다. “우리는 냉담과 냉소보다는 희망이 더 정상적으로 취급되는 공동체, ‘동지라는 말이 대부분의 나라에서처럼 허위가 아니라 진정한 동지적 관계를 의미하는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 스페인 의용군은 그것이 지속된ㄴ 동안에는 일정의 계급 없는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p140~141)

그는 통일노동자당 의용군 사회에서 사회주의의 평등을 체험했다. 하지만 그가 전선에 있을 때 인민정부는 공산당에 의해 장악되고, 카탈루냐의 무정부주의자-통일노동자당 자치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 4월말 오웰은 부대 교체로 바르셀로나에 돌아왔다.

 

오웰의 바르셀로나 휴가 기간에 일어난 사건이 그의 사고를 180° 뒤집어 놓았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바르셀로나 시가전이 벌어진 것이다.

스페인 공산정당인 통일사회당은 모스크바의 지시로 인민전선을 표방했다. 파시스트에 반대하는 세력을 모두 규합해 하나의 전선을 만드는 것인데, 이는 전쟁에 이기기 위한 전략이었다. 공산당은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부르주아 세력과도 연대하고, 이를 위해 노동자혁명을 일시적으로 포기하는 전술을 채택했다. 이에비해 무정부주의자와 통일노동자당은 노동자들의 혁명을 제1의 대의로 삼고 부르주아 정당과의 제휴를 반대했다. 이 사소한 차이는 격한 대립을 불러 일으켰다. 오웰은 전략적으로 공산당의 논리가 맞다고 생각했다. 일단 전쟁은 이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계급의 적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웰은 통일노동자당 소속 의용군으로써 행동을 했다.

시가전은 193753일 치안대가 무정부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전화교환소를 선제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인민정부의 치안대가 전국노동자연맹과 통일노동자당이 장악하고 있는 바로셀로나의 건물을 공격했다. 전국노동자연맹과 통일노동자당은 무기를 들고 저항했다. 오웰은 휴가를 나와 아내와 쉬고 있던 차에 시가전 소식을 듣고 통일노동자당에 배속되어 전투에 참여했다.

시가전은 57일 중립인척 한 발렌시아 정부가 군대를 투입함으로써 휴전이 맺어졌다. 하지만 인민정부는 중립적이지 않았다. 4일간의 교전에서 사망자는 400, 부상자가 1,000명에 달했다. 좌파끼리의 주도권 싸움에서 엄청난 인명피해가 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사건을 축소하려고 했다. 아울러 전국노동자연맹과 통일노동자당의 무장을 해제하고 주요인사들을 하나씩 검거했다.

시가전이 끝날 무렵 휴가를 마친 조지 오웰은 다시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때 오웰은 목에 총격을 맞아 병원으로 실려가고, 퇴역을 명령받았다. 연합전선 조직이 와해되는 가운데 그의 퇴역절차를 까다롭고 어려웠다. 통일노동자당은 불법화되었고, 오웰의 동료들은 구금되었다.

이때 오웰은 공산주의에 대한 심각한 환멸을 느꼈다. 공산당의 탄압으로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는 트로츠키파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고, 오웰은 간신히 전역서를 얻어 출국을 기다린다. 그는 마지막으로 벨기에 동료 콥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으나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오웰은 다행히 영국 영사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로 도망갈 수 있었다.

 

조지 오웰 /위키피디아
조지 오웰 /위키피디아

 

귀국후 오웰은 잠시의 공허함을 극복하고 자신이 겪은 6개월간을 정리했다. 그는 자신이 몸담은 통일노동자당을 옹호했다. 그 글이 카탈로니아 찬가. 그는 내전 와중에 공산주의자에 환멸을 느꼈다. 그가 찬미한 것은 카탈로니아 해방을 위해 싸운 통일노동자당과 무정부주의자였다. 그가 잠시 느낀 해방의 공간을 되돌아보며 공산주의자들의 탄압을 받고 해체된 통일노동자당을 옹호하고 무정부주의자들의 정당성을 기록에 남기려 했다.

그의 글은 193811일에 완성되었다. ‘카탈로니아 찬가의 출판은 영국의 좌익 출판사에 의해 거부당했다. 빅터 골란츠라는 좌익 출판업자는 소련 공산당의 입장을 지지했기 때문에 오웰의 글을 실어주지 않았다. 그의 원고는 출판사를 찾지 못하다가 프레드릭 워버그라는 작은 출판업자가 기꺼이 출판을 해주겠다고 해 19484월에야 출간되었다.

책은 잘 팔리지 않았다. 고작 9백부가 나갔다. 이 책이 진가를 발휘한 것은 2차 대전 이후 동서 냉전이 시작되고 그의 명저 동물농장’(1945)‘1984’(1949)가 히트치면서 덩달아 주목을 받았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자유주의자이자 이상적 사회주의자였던 조지 오웰이 반공주의자로 입장을 굳힌 사고의 전환을 드러냈다. 그후 그는 전체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조지 오웰은 어떤 책도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견해 자체도 하나의 정치적 태도이다고 말했다. 그가 카탈로니아 찬가를 쓴 것도 정치행위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을 널리 알리고, 통일노동자당의 혁명대의에 찬사를 보내기 위한 것이다. 그는 ‘1984’를 출간한 이듬해인 1950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스페인 내전 형세(1937년 10월) /위키피디아
스페인 내전 형세(1937년 10월)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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