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당시 사용된 진관사 태극기
3·1운동 당시 사용된 진관사 태극기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8.18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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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지 고혼의 제사를 지내는 수륙재 봉행…500년전 두부찜 재현

 

서울 은평구 진관사는 서울에 있는 천년사찰로서, 외국의 저명한 사람들이 즐겨 방문하는 곳이다. 201년 부통령 부인으로 질 바이든 여사가 방문한 적이 있으며,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부인 기시다 유코 여사가 올해 5월에 김건희 여사와 함께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진관사 대웅전과 멀리 북한산 /박차영
진관사 대웅전과 멀리 북한산 /박차영

 

2009526일 진관사 칠성각(七星閣)을 해체ㆍ복원하는 과정에서 불단(佛壇) 안쪽 벽체에서 오래된 보따리 하나가 나왔다. 그 안에 태극기가 나왔고, 독립운동가들이 만든 신문 19점이 함께 발견되었다. 이렇게 해서 서울 진관사 태극기가 90년만에 후세인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신문은 경고문, 조선독립신문, 자유신종보(自由晨鐘報),. 신대한(新大韓). 독립신문 등 5종으로, 191966일부터 1225일까지 발행된 것이었다. 이를 미루어 태극기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즈음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관사 태극기 앞면 /문화재청
진관사 태극기 앞면 /문화재청

 

진관사 태극기의 가장 큰 특징은 일장기 위에 태극과 4괘의 형상을 먹으로 덧칠해 항일 의지를 극대화했다는 점이다. 특히 왼쪽 윗부분 끝자락이 불에 타 손상되었고 여러 곳에 구멍이 뚫린 흔적이 있어 만세운동 당시 혹은 그 이후 현장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만세운동 당시에 제작된 태극기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진관사 태극기는 1919년에 제작된 실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학계에서는 태극기를 숨긴 인물로 진관사 승려였던 백초월(白初月)이거나, 그와 밀접한 연관이 있던 승려로 추정하고 있다. 초월스님은 불교계 항일운동의 주축으로 활동했으며, 수차례 체포되고 감옥에 갇히면서 독립운동에 매진했으며, 광복을 1년 앞둔 19446월에 충주교도소에서 순국했다. 진관사 태극기와 신문은 초월스님이 일경에 체포되기 직전에 태극기와 신문을 급히 숨겨놓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진관사 태극기는 2021년 국가 보물로 지정되었다.

광복 78주년을 기념해 815일 초월 스님과 진관사 태극기 이야기를 담은 연극 '시간과 기억의 기다림 초월과 진관사 태극기'가 은평문화예술회관 무대에 올랐다.

 

태극기가 발견된 진관사 칠성당 /박차영
태극기가 발견된 진관사 칠성당 /박차영

 

진관사(津寬寺)는 고려 8대 임금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진관조사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1011년에 지은 절로서 조계종 직할 고찰이다. 조선 태조가 수도를 서울로 옮기면서 1397(태조 6) 정월에 내신 이득분과 조선스님에게 조상의 명복을 빌고 나라일로 죽어 제사조차 받지 못하는 굶주린 영혼을 위해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할 것을 명했다. 이에 이득분과 상충달, 지상스님은 북한산과 도봉산을 답사한 결과 수륙재를 열기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진관사를 선정하게 된다.

진관사의 수륙재’(水陸齋)는 땅과 물의 온천지에 존재하는 모든 고혼(孤魂)의 천도를 위해 지내는 의례로 개인 천도의 성격을 띤 영산재에 비해 공익성이 두드러지는 불교 의례다. 초재(初齋)에서 칠재(七齋)까지 총 49일에 걸쳐 진행된다. 진관사 수륙재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나한전 등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폐허만 있던 진관사는 1963년 비구니 최진관(崔眞觀)스님이 발원해 건물을 차례로 재건, 오늘에 이르며, 비구니사찰이다.

 

진관사 수륙제 /문화재청
진관사 수륙제 /문화재청

 

진관사는 조선시대에 왕실 제사에 두부를 공급하던 조포사(造泡寺)였다. 한국체대 심승구 교수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두부가 전래된 것은 고려말이었고, 육식을 금하던 사찰에서 주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두부를 두포’(豆泡) 또는 ’()라고 불렀다. 16세기 이후 두부를 공급하는 사찰을 조포사(造泡寺라고 불렀다.

진관사는 창릉과 홍릉의 능침조포사로서 역할을 부여받고 두부를 만들었다.

진관사에서는 조선시대에 제향음식으로 포증(泡蒸)이라 불리는 두부찜을 만들었다. 포증에 관해서는 신숙주의 문집 보한재집에도 소개되었다. 진관사는 맷돌로 콩을 직접 간 뒤 조선시대 기록인 영접도감의궤등 문헌을 바탕으로 500년전의 두부찜을 재현했다.

진관사 입구로 내려오는 곳에 정원이 조성되었는데, 그곳의 길엔 오래된 맷돌이 깔려 있다. 수백년 두부를 만들고 나서, 마지막엔 사람들이 발을 디디는 디딤돌로 수명을 연장한 것이다.

 

진관사 맷돌길 /박차영
진관사 맷돌길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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