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시는 왕건의 도시
나주시는 왕건의 도시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8.2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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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의 둘째 부인 장화황후 전설, 고려 건국의 원동력…나주시 브랜드로 활용

 

나주를 처음 찾은 사람으로서 이 도시에 왕건이란 인물이 이렇게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왕건길, 왕건모텔에다 나주시의 쌀 브랜드가 왕건이 탐낸 쌀이다. 왕건(王建)은 송악(개성)을 근거지로 삼아 고려를 건국한 임금인데, 이곳 나주와 무슨 관계가 있었단 것인가.

나주시청 앞 대로가 왕건길이고, 시의 캐릭터 중 하나가 왕건의 둘째부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를 모티브로 한 버들낭자다. 나주(羅州)라는 지명도 왕건이 나()씨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한다. 나주는 왕건과 함께 생겨 났고, 났고, 왕건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다. 나주가 배·홍어와 함께 왕건을 브랜드화하는데 이유가 있었다.

 

개성 호족 왕건이 나주와 어떻게 인연을 맺었을까. 후삼국 시절에 후고구려(태봉)과 나주 사이에 견훤의 후백제가 가로막고 있었다. 해답은 해상로에 있었다. 개성과 나주 사이에 해로는 열려 있었다. 왕건은 해상 상인 출신이었고, 왕건의 측근 박술희는 충청도 바닷가 당진 출신이었으며, 왕건을 지지한 나주 호족들도 해상세력이었다. 장보고 이후 세력을 키워나가던 서해, 남해 해상세력들이 고려 건국에 힘을 합친 것이다.

나주는 1970년 영산강하구언 공사가 있기 전에 바다에서 배가 드나드는 항구도시였다. 만조 때엔 바닷물이 유입되어 큰 배는 영산포까지 왕래했고, 작은 배는 나주읍성 동문나루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나주는 예로부터 바닷길을 이용해 내륙 곡창지대와 여러 섬을 연결하는 징검다리이자, 한반도 여러 해안과 중국, 왜와 교류하는 해상거점이었다.

 

신라말기에 나주 일대 해상세력은 장보고 몰락 이후에도 독자 세력으로 자립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궁예가 후고구려를 일으켜 다시 삼국지세가 형성되었을 때 나주 해상세력들은 어느편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효공왕조9018월에 견훤이 대야성(합천)을 공격하고 돌아오던 길에 금성(나주)을 약탈하고 돌아갔다는 기사가 나온다.

견훤의 군대에 약탈을 당한 나주 호족들은 궁예에게 손을 내밀었고, 903년 궁예는 자신에게 복속한 송악 호족 왕건을 나주에 파견했다. 왕건과 나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주시청 캐릭터 버들낭자 /나주시청 홈페이지
나주시청 캐릭터 버들낭자 /나주시청 홈페이지

 

나주 택시기사가 들려준 전설은 버들낭자 오씨와 왕건의 러브스토리다. 이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는데, 나주에서 들으니 현장감이 났다.

왕건이 배를 타고 나주로 들어올 때 산자락에 오색 기운이 서린 것을 보고 말을 타고 달려가 보니 샘가에서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왕건이 목이 말라 처녀에게 물 한 모금을 달라고 했다. 처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고 샘가 버들잎을 훑어 물에 띄운 뒤 건넸다고 한다. 이에 왕건이 왜 버들잎을 띄웠냐고 물었다. '장군님이 말을 달려오느라 기갈이 심한데 급히 마시면 체할 것 같아 천천히 불어가며 드시라고 버들잎을 띄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처녀의 총명함과 아름다움에 끌려 왕건은 처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 처녀는 나주 호족 오씨의 딸이었다. 이 전설은 고려사(88 후비)에도 적혀 있다.

왕후가 일찍이 나루터의 용()이 뱃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놀라면서 깨어 부모(父母)에게 말하니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오래지 않아 태조(太祖)가 수군장군(水軍將軍)으로 나주에 출진(出鎭)하여 목포에 정박하였다. 태조가강가를 바라보았더니 오색(五色)의 구름 같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 곳에이르니 왕후가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태조가 불러 사랑하였다. 왕후의 집안이측미(側微)하므로 임신시키지 않고자 하여 잠자리에 깐 돗자리에 정액(精液)뿌렸으나, 왕후가 바로 이를 <자신의 질 안에> 넣어 결국 임신하고 아들을 낳으니 이가 바로 혜종(惠宗)이다.. 혜종은얼굴에 돗자리 무늬가 있었으므로 세상에서 이르기를 주름살 임금[襵主]’이라 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 번역)

 

완사천 /나주시청 홈페이지
완사천 /나주시청 홈페이지

 

왕후가 왕건에게 물을 건넨 장소가 나주시청 앞 300m 지점에 있는 완사천(浣紗泉)이다. 나주시는 그곳에 왕과 왕비가 만나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을 세워 놓았다. 완사천 샘가에는 나주오씨 문중에서 세운 장화왕후 기념비가 서 있다. 완사천 위에는 혜종과 장화왕후 오씨를 기리는 흥룡사라는 절이 있었고 절 안에 혜종의 소상을 모신 혜종사가 있었으나 1429(세종 11) 폐찰되었다고 한다.

나주는 신라시대에 금성군(錦城郡)이었다. 왕건이 나주를 점령한 이후 그 지역의 수장 나총례(羅聰禮)의 이름을 따서 나주라고 고쳐 불렀다. 나주가 왕건의 도시가 된 사연이다.

 

나주를 태봉에 빼앗기자 후백제는 남북으로 협공을 받는 형태가 되었다. 견훤은 수시로 나주를 공격했고, 그 방어선이 금성산(錦城山)이었다.

우리는 무더위를 정면으로 돌파하며 금성산을 올랐다. 해발 451m로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나주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금성산은 나주의 진산으로, 고려시대에 나라가 관리하는 산악제장(山岳祭場) 중 하나로 관아에서 주관하는 금성산신제게 거행되었던 곳이다. 금성산 숭배제는 나주에서 거행하는 국가적 행사였다. 충렬왕은 금성산에는 정녕공이라는 작호를 내려 제사를 지내게 했다

금성산에는 외적을 방어했던 금성산성이 있었다. 산성은 견훤과 왕건의 싸움터이기도 했고, 삼별초의 나주공략에 맞서 승부를 벌인 전쟁터였다.

계곡엔 물이 맑았고, 너락바위는 쉬기가 좋았다. 땀을 콩죽같이 흘리고도 냇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신선이 따로 없는 것 같다. 예로부터 금성산 아래 계곡에 산신의 영험함을 얻기 위해 정성을 드리는 무속인들이 많았다는 게 이해가 되었다.

 

다보사 대웅전 /박차영
다보사 대웅전 /박차영

 

금성산 중턱 골짜기에 아담한 천년고찰 다보사(多寶寺)가 숨어 있다. 절이 만들어진 때와 유래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때 세워졌다는 설, 원효대사가 세웠다는 설 등이 혼재한다. 고려 명종 14(1184) 보조국사가, 선조 29(1594)에 청허선사가 고쳐 세웠다. 지금의 건물은 조선후기 1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절의 괴불탱은 국가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금성산은 단풍이 유명해 가을이면 진입로에 사람들로 가득하다고 택시 기사님이 동네 자랑을 했다.

 


<참고한 자료>

高麗 건국기 西南海 지방세력의 동향, 신호철, 2009, 충북대

나주지역의 역사지리적 위상과 고려 팔관회, 문안식, 2014, 전남대

한 권으로 보는 나주, 나주시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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