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읍성은 한양도성의 축소판
나주읍성은 한양도성의 축소판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8.21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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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금성산과 남쪽 영산강 사이에 위치…4대문 갖춘 구조, 읍성으로는 큰 규모

 

나주읍성을 다니면서 한양도성을 옮겨 놓은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 북한산에 해당하는 금성산이 북쪽에 버티고 있다. 읍성 안에는 청계천에 해당하는 나주천이 동쪽으로 흐르고 외곽에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영산강은 한강과 오버래핑한다. 4대문이 갖춰져 있다. 읍성 한가운데 지방관청인 금성관이 대궐처럼 우뚝 서 있다. 읍성의 외형은 네모진 타원형 모양을 하고 있다.

다만 한양도성에 있는 4개 소문이 나주읍성엔 없다. 한양도성은 북악산·남산 등 4개의 산을 타는데 비해 나주읍성은 평지성이다. 규모의 차이는 크다. 나주읍성의 둘레는 자료마다 차이가 나는데, 나주시는 3.5km라고 한다. 어느 수치라도 한양도성의 둘레 18.6km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면적은 길이의 제곱에 비례하므로, 나주읍성의 넓이는 행정구역 상 동()의 규모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나주읍성 지도 /국립나주박물관
조선시대 나주읍성 지도 /국립나주박물관

 

나주읍성의 공식 기록은 태종실록 1404(태종 4) 101일자나주(羅州)와 보성(寶城)의 성()을 쌓았다는 짤막한 기사다. 하지만 개인문집 등에서 그 이전에 나주읍성을 언급한 기록이 있다. 정도전은 삼봉집에서 나주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나주성 동문 누각에 올라 나주를 둘러보았다고 했다. 고려사 열전에 1237(고종 3)김경손이 초적 이연년을 토벌하기 위해 나주성을 포위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나주성이 고려시대에 존재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조선 태종 때 나주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기존 성곽을 개축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주가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후삼국시대부터이고, 견훤이 나주를 약탈했다는 기록을 보아 나주는 천년고도다. 읍성도 그때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나주읍성은 현존하는 읍성에 비해 규모가 큰 편이다. 나주시에 따르면 나주읍성의 성벽 길이는 3.5km로 보면, 전주부성 3.2km, 광주읍성 2.2km, 낙안읍성 1.5km보다 크다. 나주읍성은 동서남북 네방향에 성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사대문이 설치된 읍성은 전라도에서는 나주를 포함해 전주, 광주, 남원, 구례, 순천 등 여섯군데밖에 없다.

 

북망문 /박차영
북망문 /박차영

 

나주읍성의 성문은 각기 이름이 있다. 동문은 동점문(東漸門)으로 읍성 내부를 흐르는 나주천이 동쪽으로 흘러 영산강을 만나 바다로 나아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서성문(西城門)西成門으로 표기한 지도도 있다. 서성문에 영금문(暎錦門)이라는 편액도 있었다고 하는데, 영금은 두루 나주를 비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북망문(北望門)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바라본다는 뜻이고, 남고문(南顧門)남문을 지나면서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돌아본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나주읍성 성벽 /박차영
나주읍성 성벽 /박차영

 

읍성은 그동안 여러차례 개축되었다. 고려시대에 쌓은 성은 태종 때 다시 쌓았고, 조선 세조 3(1457)에 성을 확장했다. 임진왜란(1592) 후에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있었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성벽은 돌을 쌓아 만들었으며, 둘레는 3,126(940m), 높이는 9(2.7m)이며 대포를 쏠 수 있는 성벽에 나온 포루가 3개이고, 우물이 20여 개 있었다고 한다. 성문은 4개로 동···북에 있었으나 모두 없어지고 북문터에 기초석만 일부 남아있었다.

나주읍성 복원은 1993년 남문터에 남고문을 다시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2층으로 된 누()는 앞면 3·옆면 2칸이며, 지붕은 화려하다. 옆에서 보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어 나주읍성의 옛 모습 일부분을 보여준다. 이후 2005년 동점문, 2011년 서성문, 2018년에 북망문이 마지막으로 복원되어 사대문을 완성했다.

 

금성관 /박차영
금성관 /박차영

 

나주읍성 내 명물은 역시 금성관(錦城館)이다. 나주의 옛이름을 딴 건물로서 나주목에 출장온 관리들이 묵던 객사(客舍) 건물이다. 건물의 규모는 조선시대 객사 건물 중 가장 크다고 한다. 나주목사의 권력이 컸음을 보여준다.

금성관의 창건시기는 분명치 않다. 조선시대 전패와 궐패를 모시고 망궐례를 행하던 객사 건물로서, 매월 두차례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과 관원들이 대궐을 바라보며 절을 올리는 향망궐배(向望闕拜)을 행했다.

금성관 좌우에는 날개처럼 동-서익헌이 붙어 있는데, 지방출장 관리들이 이곳에 오면 숙소로 활용했다. 동익헌에는 문관이, 서익헌에는 무관이 머물렀다. 동익헌이 서익헌보다 더 큰데, 조선시대에 문관이 무관보다 우대받았기 때문이다.

각종 기록과 구조양식으로 보아 전체적인 건축물의 규모와 골격은 1617년 중수시의 것을 유지하고 있다고 추정된다. 목조 가구와 세부 공포형식은 1775년과 1885년 중수시의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나주목사 내아 /박차영
나주목사 내아 /박차영

 

나주는 고려시대부터 특별 대우를 받았다. 고려 태조 왕건은 나주를 지지 기반으로 후삼국을 통일했기 때문에 건국후 나주에 나주도대행대(羅州道大行臺)를 설치했다. 이 기구는 나주에 설치한 별도 행정부였다. 대행대는 처음에 군사행정기구였으나 나중엔 민사행정를 담당했다. 대행대의 최고책임자는 시중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총리급이다. 조선시대에도 목사가 주재하는 행정구역이었고,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가 협쳐서 생긴 이름이다.

나주는 나주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힘있는 읍이었다. 나주읍성 곳곳에 위용을 자랑하는 수백년 된 보호수가 이 도시의 과거 위용을 대변하고 있다.

 

나주목사 내아의 벼락맞은 팽나무 /박차영
나주목사 내아의 벼락맞은 팽나무 /박차영
나주목 관아문인 정수루 /박차영
나주목 관아문인 정수루 /박차영
나주향교 /박차영
나주향교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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