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황포돛대에 영산강 추억을 싣고
나주 황포돛대에 영산강 추억을 싣고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8.22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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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구언 축조 전에 영산포까지 바닷물 밀려와…광주 서창까지 나룻배 운항

 

우리가 황포돛대를 탄 것은 나주 관광의 백미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무더위도 피할 요량이었다. 배를 타고 영산강 강바람을 쐬면 찌는듯한 더위도 잊고 영산강 풍류도 느낄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선착장은 조선시대 나주평야에서 난 세곡미를 거두어 보관하던 영산창이 있던 곳, 지금의 영산포다.

영산강(榮山江)의 어원에 대해 다양한 설이 있다. 효심 깊은 며느리의 전설부터, 고려 말엽 흑산도 사람들의 피난처의 지명을 일컫는다는 학자들의 해석도 있다. 가장 유력한 설은 곡창지대의 세곡이 모이는 국가시설 '영산조창'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이다.

 

나주시 영산포 황포돛대 나루터 /나주시청
나주시 영산포 황포돛대 나루터 /나주시청

 

황포돛대는 3인 이상이 모여야 운항이 된다. 한사람이 더 있어야 했다. 30분을 기다려 한 사람이 더 와서 우리는 마참내 성원을 구성하게 되었다.

황포돛대란 황토로 물들인 돛을 단 배를 말한다. 영산강의 황포돛대는 하구언이 만들어진 1981년 이전에, 바닷물이 오르내리던 시절에 영산포구 물길을 이용해 쌀, 소금, 미역, 홍어 등 각종 생화필수품을 실어나르던 배였다. 이 배는 1977년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후 하구언이 바다와 강을 막았다.

30여년의 세월이 지나 2008년에 현대판 황포돛대가 부활해 옛 추억을 싣고 영산강을 오르내리고 있다. 다만 이 배는 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영산포 선착장에서 하류로 10km 지점인 한국천연염색박물관이 있는 곳에서 돌아 들어온다. 운항시간은 50.

 

나주 영산포등대 /박차영
나주 영산포등대 /박차영

 

선착장에는 영산포 등대가 보존되어 있다. 일제시대인 1915년 영산포 선창에 건립되었으며, 한국의 내륙 하천가에 있는 유일한 등대라고 한다. 이 구조물은 등대 기능과 함께 해마다 범람하던 영산강의 수위를 측정하는 역할도 한다. 하구언이 생긴후 등대 기능은 사라졌고 수위측정만 남았지만 그마저 1989년 영산대교에 새로 수위측정 시설이 생기고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다만 역사자료로서는 가치가 있어 2004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철근콘크리트 구조물로 그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나주 황포돛대 왕건호 /박차영
나주 황포돛대 왕건호 /박차영

 

빛가람호, 나주호, 왕건호 등 3대다. 이름만 돛대이지 돛은 없다. 돛이 있는 배도 있는데, 돛의 기능은 상실했고 모양만 갖추었다. 휘발유로 움직이는 동력선이다. 하구언에 막혀 영산포와 건너편 나주읍 사이에 큰 담수호가 만들어졌다. 우리의 투어는 이 인공호수를 헤치고 나가는 것이었다.

영산강은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과 함께 우리나라 5대강의 하나다. 전라남도 담양군 용흥리 병풍산 북쪽 용흥사 계곡에서 발원해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의 젖줄로서 장성군광주시나주시함평군영암군무안군목포시 등을 지나 서해로 흐른다. 강의 길이는 138.75km, 유역면적 3,371. 황룡강과 광주천이 광주광역시에서 합류하고, 지석천이 나주시에서 고막원천, 함평천등이 함평군에서 합류한다.

198112월에 하구둑(하구언)이 축조되었다. 그 이전에 조석의 영향이 나주까지 미쳤다. 영산포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마지막이었다. 흑산도에서 잡은 홍어가 배에 실려 영산포에 내렸고, 지금의 홍어거리는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영산포구가 있었을 때에도 40여곳의 홍어식당과 도매상이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구한말에 인천에서 나주를 가려면 밀믈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1897년 미국인 선교사 유진 벨이 누나에게 쓴 편지에서 영산강 뱃길을 설명했다.

나는 목포에서 30마일 떨어진 나주까지 데려다줄 배를 구해야 했다. 배가 강물을 타고 올라가려면 밀물 때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밀물로 강물이 불어나는 것은 여섯 시간이고, 그후 한 시간쯤 강물이 움직이지 않다가 이내 반대 방향으로 빠져나간다. 우리는 여섯 시간 동안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조류가 밀물로 변해 올라올 때까지 일곱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120여년전 진짜 황포돛대는 밀물 때에만 올라왔고, 역풍이 불거나 바닷물이 빠지면(썰물) 강가에 배를 대고 밀물이 올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밀물의 마지막 지점이 영산포였다.

 

영산강 앙암바위 /박차영
영산강 앙암바위 /박차영

 

지금 우리가 탄 가짜 황포돛대는 하구둑이 막아놓은 호수를 유유자적하게 움직였다. 10분쯤 내려갔을까, 깎아지는듯한 절벽이 나타났다. 이름하여 앙암(仰巖)바위. 이 바위에는 백제시대 연인이었던 아랑사와 아비사의 슬픈 전설이 내려온다.

백제 때 바위 허리쯤에 진부촌이란 마을이 있었고, 그 맞은 편에 택촌이 있었다. 하루는 택촌에 사는 아랑사란 어부가 고기잡이를 하는데 건너편에서 여인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그 울음소리를 따라가보니 진부촌의 아비사라는 처녀가 울고 있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아비사의 병든 홀아버지가 물고기를 먹고 싶다 하여 강가에 나왔으나 물고기를 잡을 길이 없어 울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랑사는 물고기를 잡아 아비사에게 주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둘은 사랑에 빠졌고, 밤마다 앙암바위에서 만나 사랑을 속삭였다.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소문이 났고, 이를 질투하는 진부촌 젊은이들이 아랑사를 꾀어 바위 아래 떨어뜨려 죽이고 말았다. 아비사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바위 근처에서 울고 있는데, 강에서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바위를 타고 올라와 아비사와 뒤엉켜 사랑을 나눴다. 이를 지켜본 마을 젊은이들이 구렁이와 아비사를 바위 아래 굴려 버렸다. 그 이후 두 마리 구렁이가 얽혀 진부촌에 나타났고, 마을 젊은이들이 한명씩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갔다. 마을 어른들이 무당을 데려와 굿을 하며 그들의 넋을 위로했고, 그후 젊은이들이 죽어나가는 일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바위에는 아랑사와 아비사가 서로 애절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볼수 있다고 하는데,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속세의 때가 너무 묻었는가 보다.

바위 높이는 56m. 바위 아래에는 강물이 소용돌이를 치면서 깊은 소()를 형성해 배가 침몰하는 등 사고가 자주나는 곳이다. 옛사람들은 바위 아래에 용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영산강 하구 /박차영
영산강 하구 /박차영

 

영산강 수로는 과거에 광주시 서창(西倉)까지 운항했다고 한다. 광주에는 시내 충장로3가 쯤에 읍창, 무양서원 자리에 동창, 지금 서구 서창동에 서창의 세 군데 세금 창고가 있었다. 서창에는 양쪽에 나루가 있었고, 그 사이에 나룻배가 다녔다고 한다. 사청나룻배는 1960년대까지 운항했다. 승객들은 뱃삯을 냈는데 대개 마을주민이었다.

영산강에는 하구언이 막히기 전에 다양한 어종이 잡혔다. 무안군 몽탄면 일대는 숭어, 장어, , , 뻘게, 짱둥어 등이 많이 잡혔고, 몽탄면 명산리는 장어로 유명했다. 영산강 하구엔 어종에 따라 다양한 어선이 있었다.

그런 기억은 이제 전설로만 남게 되었다. 황포돛대는 오래 전의 추억을 담아 오늘도 영산강 물길을 따라 오르내린다. 배에 내려 우리는 영산포 홍어거리에서 요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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