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남고분군에서 마한을 만나다
반남고분군에서 마한을 만나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8.23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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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반남면에 40개의 마한시대 고분군…신라·백제와 다른 독특한 독널 매장문화

 

나주시 반남면의 고분군을 보면 우리 고대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공백을 읽게 된다. 삼국이 정립해 있을 당시에 호남, 특히 전라남도에 관한 기록이 비어 있다. 김부식과 일연스님은 호남에 관한 기록을 일부러 빼버렸을까. 이 의문을 반남 고분군이 대답해 준다. 경주의 신라 고분보다는 작지만 조선 왕의 봉분보다는 크다. 40여개의 반남고분은 고대사에 대한 통설을 깬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반남고분군과 내부의 부장품은 백제와 신라의 것과 다르다고 한다. 그렇다면 백제는 반남고분군의 주인들이 세력을 떨치던 시절에 이 지역을 지배하지 못한 것이다. 백제는 언제 이 지역을 점령했을까. 한강유역에 터를 잡은 백제가 고구려에 쫓겨 공주로 천도한 475년 무렵에 그 남쪽는 거대한 마한 세력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충청도로 내려온 백제와 호남의 마한 사이에 장기적이고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반남의 고분들을 쳐다보면서 사라진 역사를 상상해 보았다. 고대사의 미스터리가 젖무덤 같은 거대한 고분들 속에 숨어 있을 것이다.

 

반남고분군 분포 /국립나주박물관
반남고분군 분포 /국립나주박물관

 

나주 반남면의 자미산(紫微山)은 영산강 지류인 삼포강에 둘러싸여 있다. 자미산을 중심으로 덕산리, 신촌리, 대안리 일대에 40여기의 무덤이 있는데, 이를 통털어 반남고분군이라고 한다.

반남고분군은 대부분 원형이거나 윗부분이 잘린 피라미드 형태다. 일제강점기에 발굴되기 시작해 세상에 알려졌고 이곳 고분에서는 신라와 백제고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대형 독널이 출토되었다. 신촌리 9호분 을관에서는 금동관, 금동신발, 환두대도 등 당시 최고권력자가 소유하는 물건들이 출토되었다. 반남고분군은 신라의 것, 백제의 것과도 다른 형태다. 이곳 고분은 마한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마한(馬韓)은 중국 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 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엔 스치고 지나가듯 언급되었을 뿐이다. 마한은 경기·충청·전라도 일대에 있었던 부족연맹체로 나라 수가 54개 또는 55개였다고 한다. 백제도 그중 하나였고, 호남지역엔 15개 정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가 세력을 확대하면서 다른 마한 소국들이 위축되었고, 백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영산강 유역에서는 5세기 중엽까지 백제와 구별되는 독자적이고 토착적인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남고분군 /박차영
반남고분군 /박차영

 

마한 세력으로 추정되는 영산강 유역 고대인은 지상에 흙을 높이 쌓아 분구(墳丘, 언덕처럼 생긴 봉분)를 만들고, 그 안에 무덤을 설치했다. 3세기 이전에는 목관(나무널)과 옹관(덕널)이 혼재했다. 3세기 무렵엔 장례풍속이 큰 변화를 겪는다. 나무널이 사라지고 옹관이 대세를 이루었다..

우리가 반남고분군을 찾았을 때, 인근에 있는 국립나주박물관에서 독널특별전이 열리고 있어 자세한 설명을 듣고 옹관(독널) 실물을 볼수 있었다. 박물관의 설명에 따르면, 영산강 유역에서 독널이 사용된 시기는 기원 전후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독널은 일상생활에 사용하던 토기를 그대로 사용했으며, 독널 2개를 옆으로 눞혀 입구 부분을 서로 겹치게 놓았다.

3세기 무렵이 되면 무덤 전용 독널이 등장한다. 전용 독널은 입구부분이 넓게 벌어지고 어깨 부분이 돌출되었으며, 바닥은 비교적 뽀죡한 형태다. 독널 2개를 눞혀 사용하기도 하고 때론 3개를 사용하기도 했다.

독널은 다른 토기보다 월등히 크다. 독널 제작에 쓰인 흙도 일반토기와 다르다. 일반토기는 고운 점토를 사용하거나 입자가 1mm 이내의 고운 흙을 사용하는데 비해 독널에는 3mm가 넘는 굵은 입자가 포함되어 있다. 입자가 굵은 흙은 성형후 말리는 속도를 빠르게 하며 가마에서 구울 때 잘 깨지지 않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독널은 죽은 사람을 위한 공간이다. 영산강 일대의 고대인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그들은 시신을 독널에 안장하면서 영원한 안식과 새로운 삶을 기원했다. 3세기 이후 영산강 마한인들이 옹관으로 완전하게 대체한 것은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그들은 옹관이 시신의 훼손을 막고 부패를 지연시킨다고 믿었으며, 사후에도 부활한다는 관념이 더해지면서 독을 더 많이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독에는 한 사람만 들어간 게 아니다. 나주 복암리 3호분 96돌방 독널에는 사람 뼈가 남아 있었다. 사람 뼈는 큰 독널 안쪽에 머리를 넣고 바깥쪽으로 팔다리 뼈를 놓았다. 이런 점에서 뼈만 추려 매장하는 세골장(洗骨葬)을 한 것으로 보인다. 3호 독널에는 3명의 뼈가 들어 있었다. DNA 분석 결과 3구중 남녀 2구가 어머니쪽의 핏줄이었음이 밝혀졌다. 모계사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남고분의 독널은 우리에게 고대의 숨은 얘기를 전해준다. 독널에는 고대인들이 쓰던 생활용품에서 흙을 다루는 기술, 죽은 사람들의 부장품, 영원을 바라는 기원까지 다양한 스토리가 담겨 있다. 반남고분의 독널은 영산강 일대에 세력을 떨치던 마한인의 타임캡슐인 셈이다.

 

반남고분군 독널 /박차영
반남고분군 독널 /박차영
여러 가지 독널 /박차영
여러 가지 독널 /박차영

 

나주박물관에서 국보로 지정된 금동관에 눈길이 꽂혔다. 반남면 신촌리 9호 무덤에서 발견된 것으로, 높이 25.5이며, 외관과 내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관은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 3개를 머리에 두른 띠 부분인 대륜에 꽂아 세웠으며, 내관은 반원형의 동판 2장을 맞붙여 만들었다. 기본 형태는 신라 금관과 같으나 머리 띠에 꽂은 장식이 신라 관의 자 모양이 아닌 복잡한 풀꽃 모양을 하고 있어, 양식상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금동관의 주인은 당시 이곳을 지배하던 마한의 지배자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한의 금동관 /박차영
마한의 금동관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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