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사람들이 이 석등에 집착하는 이유
나주 사람들이 이 석등에 집착하는 이유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8.24 12: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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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세력 이름과 건립시기 새겨져…일제 때 서울로 옮겨져 88년만에 귀향

 

국립나주박물관은 고분에 둘러 싸여 있다. 마한시대 고분으로 알려진 반남고분군의 40여개 무덤이 나주시 반남면에 흩어져 있고, 그 한가운데에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마한 유물들을 보관하는 박물관이라 해도 무방하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입구에 흔한 석등 하나가 서 있다. 조금 오래된 절에 가면 쉽게 접하는 석등과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해 그냥 지나치고, 마한시대의 금동관과 옹관(독널)을 관람했다. 관람을 마치고 박물관을 나오려 하는데, 해설자가 석등을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다. 해설자의 설명을 듣고 설립된지 10년밖에 되지 않은 나주박물관이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있던 이 석등을 왜 옮겨오려 애를 썼는지를 이해할 것 같았다. 이 석등은 원래 나주 읍성 서문(西城門) 근처에 있다가 일제 때 서울로 옮겨졌고, 마지막엔 용산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나주 서성문 안 석등 /박차영
나주 서성문 안 석등 /박차영

 

석등의 공식 명칭은 나주 서성문 안 석등으로 1963년 보물 364호로 지정되었다. 이 석등이 일찍이 보물로 지정될만큼 특별한 것은 석등의 위 받침돌(상대석)과 아래 받침돌(하대석) 사이의 기둥(竽柱石) 8개 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연구자들이 오랫동안 탁본을 뜨고 사진을 찍어 글자를 해독했고, 현대에는 3D 정밀탁본을 찍어 명문을 정밀 판독했다. 그 결과 파손이 아주 심한 글자 몇 개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글자가 판독되었다. 8개 면의 글자는 다음과 같다.

① 南贍部洲高麗國羅州

② 中興里戶長羅在堅應

③ 迪孫○先月心光○○心

④ 聖壽天長百穀豊登

⑤ 錦邑安泰富貴恒存

⑥ 願以燈龕一坐石造排立

⑦ 三世諸佛聖永獻供養

⑧ 大安九年癸酉七月日謹記

 

우주석 명문 8행 3D 정밀탁본 /나주박물관
우주석 명문 8행 3D 정밀탁본 /나주박물관

 

전남대 변동명 교수는 명문을 이렇게 해석했다.

① 南贍部洲에 있는 高麗國羅州

② 中興里, 戶長 羅在堅

③ 道에 감응하고 에 순종하여, 달이 뜨기에 앞서 속으로 그 빛을 떠올리는 마음 ○○○ 은혜로,

국왕의 수명이 하늘처럼 길고 온갖 곡식이 풍성하게 여물며

나주고을이 편안하고 태평하면서 부귀와 늘 함께하도록,

등불 켜는 탑 한 자리를 돌로 만들어 줄에 맞게 세워서,

삼세의 여러 부처 성인께 영원히 바쳐 공양하기를 원하나이다.

⑧ 大安 9癸酉 7월 어느 날 삼가 기록합니다.

 

첫 번째 구절의 남섬부주(南贍部洲)는 불교용어로 인간세계라고 한다. 따라서 첫 번째행 명문은 인간세계에 있는 고려라는 나라의 나주라는 뜻이다.

3행에서 7행까지는 좋은 얘기다. 석등은 원래 나주의 고려 사찰인 흥룡사(興龍寺) 경내에 있다가 나주 읍성이 만들어진 이후 서성문 근처로 옮겨졌다고 한다. 따라서 석등의 명문도 불사(佛事)를 위한 것이었고, 국왕의 만수무강과 풍년을 기원하며 나주고을의 안녕을 부처님께 비는 내용이다.

8행의 명문은 석등의 준공일자를 설명한다. 대안 9년은 고려 12대 선종(宣宗) 10, 서기로는 1093년을 말한다. 석등에 건립 유래와 시기가 적혀 있는 경우는 희귀하다고 한다.

가장 논란이 되는 대목은 두 번째 행의 중흥리와 호장 나재견에 대한 해석이다. 호장(戶長)은 지방의 호족을 말한다. 지금으로 치면 이장, 좀더 크게 면장쯤 된다. 왕이 내려보낸 수령과 달리 호장은 토박이다. 고려초기 나주는 목사(牧使)가 다스리던 곳인데 감히 호장이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것이다. 전남대 변동명은 석등의 명문에 나주목사가 거론되지 않았지만, 호장 나재견의 개인적인 기복 내용도 들어가지 않았다면서 나재견이 토착세력의 대표로 이름을 올렸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명문에 나오는 중흥리(中興里)의 위치도 연구대상이다. 현재의 지명이나, 옛지명을 찾아도 나주 인근에 중흥리란 지명이 없다. 따라서 중흥리가 현재 어디쯤인지는 불분명하다. 나주에서 전해지는 바, 석등은 흥룡동의 흥룡사에 있었다가 나주읍성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향토사학자들은 대체로 흥룡동을 송월동 어디쯤으로 본다.

또 고려사에 따르면 왕건의 둘째부인 장화왕후가 2대 혜종을 출산하고, 그곳에 흥룡사와 혜종사가 건립했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장화왕후는 나주 오씨다. 따라서 흥룡동은 나주의 세도가엿던 오씨의 근거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이 석등은 나주고을의 역사를 이해하는 소중한 유물이자, 지역사회외 연고를 지닌 상징물로 여겨졌다. 10년전 나주박물관이 세워진 후 나주 향토사학자들은 중앙박물관에 다른 유물들과 섞여 가치를 드러내지 못하는 이 석등을 고향으로 돌려달라고 했고, 문화재 당국이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나주읍성에 있던 석등은 1929년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경복궁 복원계획에 따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건되어 보관되어 왔다. 2017년 해체, 보존처리를 거쳐 현재 국립나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돌고 돌아 88년만에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석등에는 오점이 있다. 일제가 석등에 불을 켜는 자리(火舍石)에 글자를 새겨놓았는데, 흐릿하게 남아 있다. 화사석은 불발기집이라고 하는데, 불을 켜면 밝게 비추는 곳이다. 그곳에 쓰여진 명문은 한자로 昭和 412월 전라남도 나주 읍내에서 조선총독부 박물관 내로 이전하고 보주와 화대석을 보족하다고 쓰여 있다. 흐릿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아픈 역사도 역사인만큼 놓아두었다고 해설자는 설명했다.

 

나주 서성문 안 석등 /박차영
나주 서성문 안 석등 /박차영

 


<참고한 자료>

고려 선종대 나주 서성문 안 석등의 건립, 전남대, 2018, 호남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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