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더 이상 과학자의 것이 아니다”
“과학은 더 이상 과학자의 것이 아니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9.05 13: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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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펜하이머’, 대량살상무기 개발 과정에서 정치와 과학의 대립 그려내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를 속이고 불을 훔쳐 인간에게 몰래 주었다. 그로 인해 제우스의 분노를 사 프로메테우스는 코카서스 산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게 되었다고 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원자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신의 불을 훔친 댓가를 톡톡하게 치른다. 그는 청문회에 나가 인격적인 고문을 당한다.

영화는 카이 버드의 원작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American Prometheus)를 토대로 놀란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영화는 과학자 오펜하이머의 전기에다 원자폭탄 개발과 개발 전후 미국의 정치 세계를 다룬 다큐멘터리의 성격을 띠고 있다.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의 초기 인생을 다룬 전반부보다 보안청문회 과정을 다룬 후반부에 초점을 맞췄다. 더 많은 인명을 죽일수 있는 무기를 소유하려는 정치인과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한 후 고뇌하는 과학자의 대립이 감독이 의도한 바였다.

영화포스터
영화포스터

 

영화를 보고 나서 몇가지 의문이 생겼다. 오펜하이머가 핵폭탄 개발에 나서지 않았다면 미국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았을까. 독일이 먼저 원자무기 개발에 성공했다면 2차 대전의 성패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오펜하이머가 수소폭탄 개발을 중단하고 소련과 협상을 해서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제한하자고 한 주장은 현실적 타당성이 있었을까.

놀란 감독은 일부 영화적 터치를 제외하고 대부분 사실에 입각해서 시나리오를 썼다는 평을 받는다. 영화에 그려졌듯이 오펜하이머는 핵 개발에 참여하면서 과학자의 차원을 넘어 정치인이 되어 있었다.

독일 나치정권도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미국 첩보부대가 입수한 문건에 따르면 독일 물리학자 카를 폰 바이츠체커가 참여한 핵 개발은 성공할 확률은 낮았다. 영화에도 그런 내용이 나온다. 유대인 과학자들이 대거 미국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미국의 핵 개발 가능성이 독일보다 높았다.

오펜하이머는 한때 공산주의에 경도되었고, 그의 동생과 애인, 아내에게도 공산주의 전력이 있었다. 그러던 그는 유대인의 적이었던 독일보다 빨리 핵을 가져야 한다며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에 가담했다. 19455월초 독일이 무조건 항복한 후에도 핵 프로젝트는 진행되었다. 그 명분은 소련을 견제하고 일본을 조기에 항복시키기 위해서였다.

뉴멕시코 로스앨러모스에서 트리니티(Trinity)라는 암호명으로 실시된 핵실험은 독일 패망직 후에 있었다. 이때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로서의 동기, 독일에 대한 적개심이 사라진 뒤였다. 그는 영웅이 되고 싶었을까. 1945716일 트리니티 작전이 성공하고 그는 신의 불을 훔치고 말았다.

그리고 21일후 그의 성공은 일본 히로시마에서 실증되었고, 며칠후 나가사키에서 재연되었다. 덕분에 우리나라가 일본의 사슬에서 벗어나 해방되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 /위키피디아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 /위키피디아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투하는 오펜하이머가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과학적 성취는 수많은 미군의 생명을 건져냈다. 앞서 오키나와 전투에서 12,000여명의 미군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고, 3만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본토를 공격해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려면 수십만명의 피를 흘려야 할 것이란 계산이 나왔다. 원자무기 두 방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옥쇄 투쟁을 무력화시켰다. 말하기 쉬운 사람들은 미국이 원자탄을 사용하지 않았어도 일본은 패망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댓가는 엄청났다. 원자무기와 수만명의 미군 생명을 바꾼 것이다.

그의 고민도 여기서 시작되었다. 오펜하이머는 수많은 미군 생명을 건져냈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개발한 원자폭탄이 수많은 일본인을 죽게 했다는 점에 공포를 느꼈다. 핵 경쟁이 가열될 경우 인류가 멸망할 것이란 걱정이 엄습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그를 불러 수소폭탄 개발에 참여할 것을 독려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대통령은 다시는 징징거리는 사람을 데려오지 말라고 했다. 그는 징징거리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의 위력에 놀랐다. 그는 러일전쟁에 패하고 1차 대전 중도에 철수하는 비극을 재연하지 않기 위해서는 강한 군대를 원했다. 소련의 독재자는 핵물리학자를 우대하며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고, 곧이어 수소폭탄 개발에 나섰다. 소련의 과학자들 가운데 오펜하이머같은 사람은 없었을까. 그들은 스탈린이 시킨 대로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데 충견 역할만 했을까.

 

트리니티 실험 /위키피디아
트리니티 실험 /위키피디아

 

영화는 과학은 더 이상 과학자의 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19세기말에도 유럽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기관총을 개발했다. 그 기관총은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며 식민화 쟁탈전을 가열시켰고, 지구를 돌아 동학농민군 살상에 사용되었다. 19세기에 기관총은 20세기의 핵무기처럼 대량살상무기였다.

오펜하이머는 청문회에서 애국자로 인정을 받았지만 끝내 보인승인이 거부되었다. 그는 더 이상 응용물리학에서 손을 떼었지만 시름시름 앓다가 1946762세의 나이로 자다가 사망했다. 그와 함께 핵개발에 참여했던 레오 실라드는 물리학을 포기하고 미생물 분야의 연구에 몰두했다. 그들이 무서운 과학에서 멀어졌다고 해서 미국의 핵 개발은 후퇴하지 않았다.

 


<참고자료>

Wikipedia, Oppenheimer (film)

Wikipedia, J. Robert Oppenheimer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어니스트 볼크먼, 이마고,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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