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 개념의 효시, 유득공의 ‘발해고’
남북국 개념의 효시, 유득공의 ‘발해고’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9.20 15: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득공, 발해를 우리의 영토로 인식…고려가 발해사 편찬하지 않은 것 한탄

 

유득공은 발해고’(渤海考) 서문에 이렇게 썼다.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국사(南北國史)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이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유득공은 조선 정조 때 학자이자 관료로,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과 교유한 실학자로서, 그 중에도 북학파로 분류된다. 그는 발해의 영토가 거란과 여진에게 넘어갔지만 고려가 발해사를 서술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 땅을 도로 찾으려 해도 근거가 없게 되었다고 한탄했다. 그는 “(고려가) 발해사를 써서 이 것을 가지고 왜 우리 발해 땅을 돌려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바로 고구려 땅이다고 여진족을 꾸짖은 뒤 장군 한명을 보내서 그 땅을 거두어 오게 했다면 토문강 북쪽의 땅을 차지할수 있었을 것이다고 했다.

발해고는 우리 사학사에 신라-발해의 남북국 개념을 도입한 효시라고 할수 있다. 고려는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짓게 함으로써 삼국시대를 정리하려 했지만, 유득공은 발해가 고구려를 이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삼국통일이 아닌, 남북국시대라고 정의한 것이다.

홍익출판사 표지
홍익출판사 표지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은 서얼 출신이다. 증조부 유삼익(柳三益)과 외할아버지 홍이석(洪以錫)이 서자였고, 할머니 이씨 부인도 서녀였다. 적서의 구분이 분명했던 시대였기에 그는 20대 청년기에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도 했다.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삭바느질로 생계를 잇는 궁핍한 생활을 했다. 그랬기에 당대 중국 일변도의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글에는 중국과 조선 이외에 만주, 몽고, 회회(回回, 위구르), 안남(安南. 베트남), 남장(南掌, 라오스), 면전(緬甸, 미얀마), 대만, 일본, 류큐(琉球)가 언급되어 있다. 또 홍모번(紅毛番, 영국), 아란타(阿蘭陀, 네덜란드)에도 그의 세계관은 뻗어 있다. 남들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발해사에 그가 깊은 관심을 가진 것도 이런 신분적 소외감에서였을 것이다.

 

27살이던 1774년에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었고, 32세이던 1779년에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에 임명되었다. 검서는 도서관 사서에 해당하는데, 그는 이 지위를 활용해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일본의 사료를 읽을 기회를 가졌다. 그는 다양한 역사서를 읽으면서 발해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사료의 부족을 절감했다. ‘발해고서문에 그는 , 문헌이 흩어진지 수백년이 지난 뒤에 역사서를 지으려 해도 자료를 얻을수 없구나하고 한탄했다.

그럼에도 그는 부족한 자료를 가지고 발해사를 쓰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그는 저술의 제목을 세가(世家), (), ()라고 하지 않고 ’()라고 한 것에 대해 아직 역사서로 완성하지 못하여 정식 역사서를 저처할수 없기 때문이다고 했다.

 

발해고5년간의 검서관 생활을 마치고 포천현감으로 가 있던 1784(정조 8)에 저술했다. 본인과 포천현감 때 교유한 성해응, 북학파 동료인 박제가가 쓴 세 편 서문이 실려 있다.

책의 내용은 군고(君考), 신고(臣考), 지리고(地理考), 직관고(職官考), 의장고(儀章考), 물산고(物産考), 국어고(國語考), 국서고(國書考), 속국고(屬國考) 9()로 나누어 정사(正史)의 체계로 엮었다. 군고는 발해 역대 왕에 관해 기술한 본기(本紀)이며, 신고는 83명의 발해국 문신과 무신, 학자들에 관해 정리한 열전이다. 지리고는 51562주의 지방제도에 관한 내용이며, 직관고는 문무 관직에 대한 내용을 기술했다. 의장고는 품계에 따른 문무관의 복식과 수도 동경의 모습을 기록했다. 물산고는 발해국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에 대한 기록이며, 국어고는 발해에서 사용된 각종 칭호의 예를 적었고, 국서고는 외국에 보낸 국서를 정리했으며, 속국고는 정안국(定安國)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특히 국서고에는 일본과 주고받은 국서가 주로 실려 있다.

발해고를 국역한 송기호 교수는 (유득공)는 한걸음 나아가 발해사를 우리 역사 속에 넣을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발해사를 나름대로 체계화시키고자 함으로써, 그 자신을 한국사학사 한가운데 우뚝 세우는데 그 누구도 주저하지 않도록 만들었다고 평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