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세계혁명을 꿈꾸다
체 게바라, 세계혁명을 꿈꾸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9.26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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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쿠바에서 혁명 성공…콩고에선 실패, 볼리바아에서 피살

 

장 코르미에의 체 게바라 평전은 체 게바라 전기 중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으로 꼽힌다. 기자 출신의 이 프랑스 작가는 라틴아메리카와 쿠바를 돌며 체 게바라에 관한 스토리를 모았다. 코르미에는 체 게바라에 매료되었기 때문에 이 책에서 게바라의 서른아홉 인생을 추적하며 그를 미화하고 두둔하고 정당화하는데 주력했다.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공산혁명의 주인공이자 세계 혁명의 주모자로서 대한민국 정체성에는 거스르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라틴아메리카와 제3세계에서 대단히 인기가 있는 인물로서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연구는 필요하다고 하겠다. 코르미에의 르포를 읽다 보면, 어느 순간에 ”(Che)에 빠져들 때가 많다. 사심이 없고, 인간에 충실한 그의 모습이 생생히 드러난다.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1928~1967)39년의 인생을 살며 그의 동지와 지지자에겐 혁명가, 영웅으로 받들어지지만, 그의 적에겐 반란자, 공산주의자로 악명을 떨친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쿠바에서 민중혁명에 성공하고, 아프리카 콩고 게릴라 운동에 뛰어들었다가 남미 볼리비아 게릴라전에서 사망했다. 그는 세계인이었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운동을 몸소 실천했고, 무장투쟁만이 지배계급을 무너뜨리는 유일하고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믿었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위키피디아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위키피디아

 

1928614일 아르헨티나의 로사리오에서 중류 가정의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피에는 스페인 바스크계와 아일랜드계가 섞여 있었다. 본명은 에르네스토 게바라이고, 그 사이에 끼어 넣은 ’(Che)나의라는 뜻을 가진 인디언 감탄사다. 그의 지지자들은 친근하게 라고 부른다.

20대 초반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대학 시절인 19526월 그는 동료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남미 여행을 떠났다. 중고오토바이를 개조해 포데로사II라는 이름을 짓고 아르헨티나를 출발, 안데스산맥을 넘어 칠레, 페루, 콜롬비아, 베네수엘라를 여행했다. 둘은 9개월 동안 남미 곳곳을 8,000km나 돌아다녔다. 그는 여행을 하며 남미 민중들의 고달픈 삶을 이해하게 되었다. 칠레의 구리광산에서 미국 자본에 눌려 비참하게 살아가는 노동자들을 피부로 느꼈다. 이 여행이 그를 사회주의자로 만들었다. 그는 여행을 통해 가난한 민중들의 삶을 목격했고, 빈곤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이 세계의 모순을 먼저 치료하는 것이 더 본질적인 문제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19537월 또다시 여행에 나섰다. 볼리비아, 페루, 에쿠아도르, 파나마를 거쳐 코스타리카, 니카라구아, 온두라스, 엘살바도르에 이어 과테말라에 도착했다.

그의 첫 혁명운동 참여는 과테말라였다. 당시 과테말라엔 미국의 사주와 지원을 받은 용병부대가 쿠데타를 일으켜 인민의 지지를 받고 있던 아르벤스 정권을 무너뜨렸다. 체 게바라는 제국주의 횡포에 분노해 아르벤스의 진보세력 편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체 게바라는 쿠데타 세력의 추적을 받아 체포될 위기에 처했다. 체는 아르헨티나 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멕시코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실천문학사 책표지
실천문학사 책표지

멕시코에서 체는 카스트로 형제를 만났다. 당시 피델과 라울의 카스트로 형제는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다 실패해 멕시코에 망명해 있었다. 체는 먼저 동생 라울을 만났고, 라울의 소개로 피델을 알게 되었다. 195579일 밤 10시 피델과 체의 역사적인 만남이 마리아 안토니아의 집에서 이뤄졌다. 둘은 첫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의기 투합했다. 카스트로 형제와 체 3인은 세상을 바꿀 혁명적 동지가 되었다. 그들은 몬카다 병영 습격일을 기념해 ‘M 7-26’(26th of July Movement)이란 비밀조직을 결성했고, 대원들을 규합해 쿠바를 습격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들은 쿠바 해안에 상륙할 소형 상륙정을 구입했고, 그 배를 그란마(Granma)호라고 했다.

 

19561125일 새벽 130, 그란마호의 시동이 걸렸다. 배는 82명의 게릴라를 태우고 멕시코 유카탄반도를 출항했다.

122일 새벽 그란마호는 쿠바 라스폴로라다스 해안에서 좌초했다. 대원들은 바다에 빠져 죽고, 바티스타 군의 포격에 죽고, 며칠후 살아남은 병력은 고작 18명에 불과했다. 괴멸 직전에 겨우 목숨을 건진 게릴라들은 산 속으로 도주했다. 험준한 시에라마에스트라 산은 그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 평야에 있던 지원세력들이 인원을 보충해 산으로 보냈다. 싸우고 죽고, 그렇게 2년을 버틴 끝에 쿠바 민중들은 산속의 M 7-26 조직을 지지하게 되었고, 민심은 바티스타 정권을 떠나게 되었다.

카스트로와 게바라의 극소수 게릴라들이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던 구체제를 붕괴시킬수 있엇던 결정적 동인은 바티스타 정권의 폭정이었다. 폭정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게릴라들의 토지혁명을 기대했고. 사회주의 이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을 갖게 되었다.

게릴라들은 엄격한 규율을 지켰다. 반역자는 현장에서 사살되었고, 민중을 괴롭히는 대원도 사형에 처해졌다. 조직은 대원을 잃는 것보다 민심을 잃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체는 민중이야말로 게릴라전의 바탕이자 본질이라고 했다. 그렇게 1년반의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평야에서 꾸준히 병력이 보강되고, 보급품이 지원되었다.

체는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의 활동을 인정받아 피델로부터 게릴라 대장으로 임명되어 그의 동생라울을 제치고 2인자로 올라섰다. M 7-26 조직이 대중에게 가장 손쉽게 접근하도록 한 것이 라디오 방송이었다. 19582월 체는 산중에서 라디오 레베르데를 개설했다. 자동차 모터를 돌려 전파를 송출했다. 방송은 산속에 숨어 잇는 게릴라들의 사상을 민중에게 보급하는 훌륭한 매개채가 되었다. 산속의 혁명가들은 방송을 통해 쿠바인들의 봉기를 호소했고, 파업을 선동했다.

 

게바라 부대가 산에서 내려온 것은 19587월말이었다. 바티스타 정권은 추풍낙엽이었다. 1백여명 남짓의 게릴라 부대의 진군에 수천, 수만명의 정부군이 허무하게 항복했다. 민중이 게릴라 부대의 전면을 에워싸는 바람에 정부군은 항복을 선택했다. 정부군 소속 전투기는 폭탄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해말 쿠바 중앙부 산타클라라 전투가 클라이맥스였다. 12월말 게바라는 산타클라라에 무혈입성했다. 그러자 풀렌시오 바티스타 대통령은 수도 아바나를 지킬 생각도 않고 비행기를 타고 산토도밍고로 피신했다. 망명에 앞서 바티스타는 카티요 대령에게 군 지휘권을 이양했으나, 카티요는 지휘권을 포기했다. 카스트로와 게바라는 해를 넘겨 195912일 아바나를 접수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혁명이 성공한 후 체 게바라는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 등을 역임했고, 공산권과 제3세계를 돌며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에 반대하는 외교활동을 벌였다. 이때 그의 검은 배레모와 구겨진 군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쿠바 혁명 이후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격화되고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려는 소련의 시도가 미국에 의해 무산된 이후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사이에 견해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피델은 코 앞의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에 체는 소련은 쿠바를 이용만 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체는 소련이 일방적으로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한 것을 이해할수 없었다. 소련은 체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피델과 체를 갈라 놓은 것은 체의 인터뷰였다. 1965224일 알제리 알제에서 열린 제2차 아프리카-아시아 세미나에 참석하던 중에 체 게바라는 스페인 언론과 인터뷰에서 소련을 맹렬히 비난했다. 그의 인터뷰 내용에 소련은 불쾌하게 생각했고, 피델 카스트로도 안절부절하게 되었다. 귀국후 체는 피델을 만나 이틀밤, 이틀 낮을 꼬박 보내며 토론을 했다. 토론의 끝은 체가 쿠바를 떠나는 것이었다.

 

쿠바 산타클라라의 체 게바라 무덤 /위키피디아
쿠바 산타클라라의 체 게바라 무덤 /위키피디아

 

19654월 체 게바라는 쿠바 2인자 자리를 포기하고 쿠바출신 흑인 게릴라를 이끌고 내전 중이던 벨기에령 콩고로 갔다. 그는 다시 총을 잡았지만 아프리카 회의에서 제3자의 개입을 거부하는 바람에 1년만에 콩고를 떠나야 했다. 쿠바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이번에 남미 볼리비아로 숨어 들어갔다. 볼리비아는 남미 5개국과 집경을 이루는 요충지로서 이곳에서의 활동이 혁명의 불씨를 전남미로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볼리바아 정부군은 미 CIA가 전폭적으로 지원한데다 현지 농민들은 게릴라부대를 도와주지 않았다. 1967108일 볼리비아 정부군의 끈질긴 추격에 게바라는 포로가 되었다.

쿠바에선 18명으로 정권을 전복시킬수 있었다. 볼리비아에선 마지막에 17명이 남았지만 정부군에 쫓기다가 산산조각이 났다. 쿠바에선 민중이 따랐지만, 볼리비아에선 냉담했다.

볼리비아 외무장관은 체의 목숨을 살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의 린든 존슨 행정부는 남미 게릴라 운동의 상징을 살려두길 꺼려 했다. 미국은 공산주의자들의 세계전복이 실패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체 게바라를 죽여야 한다는 의견을 보냈다. 바리엔토스 볼리비아 대통령은 미국의 의견을 따랐다. 정부의 지시가 내려가자 109일 현장의 정부특수부대원은 체 게바라를 사살했다. 39세였다.

볼리비아군은 체의 시신을 암매장했다.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체 게바라를 사살한 볼리비아 정부의 조치는 바보 같은(stupid) 짓이었다. 하지만 이해는 된다며 계산된 발언을 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장문의 성명서를 낭독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가 죽은지 30년후인 1997년 쿠바와 아르헨티나 지질학자와 고고학자, 의학자들이 체 게바라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를 찾아냈다. 그의 유해는 쿠바로 옮겨져 그가 마지막으로 승전한 산타 클라라에 묻혔다.

 

작가 잔 코르미에(Jean Cormier, 1943~2018)는 프랑스 일간지 파리지엔의 기자롸 활동하다가 1981년 체의 아버지 에르네스트 린치를 만난 것을 계기로 체 게바라를 연구했다. 작가는 10년에 걸쳐 체의 가족, 친구, 지인들을 인터뷰하면서 소재를 모았고, 책은 2002년에 출간되었다. 국내 번역서는 2011년에 나왔다.

 

1956년 12월초, 좌초한 그란마호를 탈출 쿠바 해안에 상륙하는 게릴라들 /위키피디아
1956년 12월초, 좌초한 그란마호를 탈출 쿠바 해안에 상륙하는 게릴라들 /위키피디아
콩고에서 체 게바라(1965) /위키피디아
콩고에서 체 게바라(1965) /위키피디아
사망하기 직전의 체 게바라(1967) /위키피디아
사망하기 직전의 체 게바라(1967)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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