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도시, 대만 진과스
황금의 도시, 대만 진과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10.08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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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때 연합군 포로수용소 있던 곳…폐광 후 황금박물관 설립

 

대만 여행상품 예---지의 세 번째 코스는 진과스였다. 대만 북부 신베이(新北)시 루이팡(瑞芳)구에 있는 옛 금광채굴지다.

대만 북부에 금이 발견된 것은 청나라 말기였다. 1890년 지룽강 구간에서 철교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사금을 발견했고, 그 소문이 돌아 지룽강 일대에 골드 러시가 발생했다. 사금 채굴의 범위가 금새 지룽강 상류로 확장되었고, 오늘날 루이팡역까지 진출했다. 1893년 리()씨 성을 가진 농부가 지우펀(九份)에서 금맥 노두를 발견했다. 이 곳을 진과스(金瓜石)라고 부르게 것은 주변 돌산의 모양이 참외(金瓜)와 같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격적인 금 채굴은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대만을 접수한 1895년 이후다. 일본의 대만총독부는 일대 광산을 진과스와 지우펀으로 나누었고, 진과스 광산은 민간에게 불하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회사가 대만광업주식회사(臺灣鑛業株式会社)였다. 일본인들은 진과스를 일본식으로 킨카세키로 읽었다. 진과스 금광은 일본제국 시절에 점령지에서 가장 생산량이 많은 광산이었다.

 

진과스의 폐광 시설 /위키피디아
진과스의 폐광 시설 /위키피디아

 

진과스는 연합군 포로수용소로 유명하다. 동남아를 침공한 일본군은 전쟁포로를 대만으로 끌고와 수용했다. 대만에는 14개의 포로수용소가 있었고, 그중 가장 큰 곳이 진과스 수용소였다.

킨카세키 포로수용소는 194311월에 개설되어 싱가포르에 수용되어 있던 포로가 이송되었으며, 수용인원은 1,100명에 달했다. 포로의 대부분은 영국군이었다. 그들은 광산 채굴에 동원되었다. 전시에 먹을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포로들은 비타민 부족으로 각기병에 시달렸다. 태평양전쟁이 확대되면서 미군이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킨카세키에서 채굴된 광물은 일본 본토로 수송되지 못했다. 포로 광산은 19453월에 폐쇄되었고, 포로들은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다.

 

사련동 /박차영
사련동 /박차영

 

전쟁이 끝나고 광산은 중국정부 소유로 넘어갔으나, 광물은 모두 캐낸 후, 껍데기만 남았다. 2002년 호주의 광산회사가 이곳 지질을 평가해 보니, 여전히 광물 채굴가치가 있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하지만 환경운동가들이 더 이상 광산개발을 반대하는데다 인근 지우펀이 관광지 전환으로 성공하는 것을 보고 대만정부는 이곳을 관광지화했다.

대만 정부는 2004년부터 금광 박물관을 만들어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앞서 2002년에 진과스의 옛광산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황금박물관 입구 /박차영
황금박물관 입구 /박차영

 

황금박물관에서는 진과스일대의 황금개발의 역사를 한눈에 볼수 있다. 입구에 사련동(四連棟)은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가옥이다. 일본식 다다미방으로 꾸며져 있고, 일본인 경영자 가족들이 거주하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박물관에는 금광과 탄광에서 일하던 광부들의 여러 기구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순도 99.9%로 세계에서 가장 순도가 높고, 가장 크다는 금괴가 관광객을 사로잡는다. 무게가 무려 220kg에 이른다고 한다. 이 금괴를 만지기만 해도 부자가 된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한국 사람들이 즐겨하는 곳은 광부식당이다. TV 예능프로 꽃보다 할배에 소개되었다는데, 옛날 광부들이 먹던 음식을 광부의 도시락이라고 한다. 우리도 이 식당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황금박물관의 220kg 금괴 /위키피디아
황금박물관의 220kg 금괴 /위키피디아
광부들의 식당 /박차영
광부들의 식당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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