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네의 일기’ 그후
‘안네의 일기’ 그후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10.19 13: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체포된 8명 중 아버지 오토만 살아남아…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

 

안네의 일기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한 소녀의 일기다. 독일 출신의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Anne Frank. 192945)는 독일 나치 점령하에 암스테르담의 한 은신처에 숨어 살면서 1942614일부터 194481일까지 일기를 썼다. 안네와 부모, 언니 마르고트 등 가족 4, 펜던씨 가족 3, 치과의사 뒤셀씨 8명이 2년 넘는 긴 시간 동안에 암스테르담의 한 집에서 숨어 살았다. 안네는 키티(Kitty)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일기장에 비정상적이고 절박한 상황을 참아 내는 과정을 적었다. 빨간색 체크 무늬의 일기장에는 사춘기 소녀의 성장 과정, 어른들 세계에 대한 통렬한 비판, 곤경에 처해서도 꺾이지 않는 마음 가짐 등을 꾸밈없이 고백했다.

안네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이렇게 썼다.

오늘은 우울한 뉴스를 알려야겠다. 많은 유태인 친구들이 한꺼번에 열명, 열다섯명이 끌려가고 있어. 이들은 게슈타포로부터 털끝만한 동정도 없이 구박을 받으며 가축용 트럭에 실려 드렌테에 있는 가장 큰 유태인 수용소 베스테르부르크로 실려가고 있어. 베스테르부르크라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쳐.” (1942109)

그렇게 숨어 살던 그들에게 19446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이후 희망이 보였다. 안네는 키티에게 이렇게 말했다.

멋진 뉴스야. 연합군은 프랑스 해안의 작은 마을 베이유를 점령하고, 지금 칸 공략을 서두르고 있어. 셀브르가 있는 반도를 차단하려는 연합군의 작전이 분명해. 은신처의 사람들은 흥분을 얼마쯤 가라앉았어. 그렇지만 우리는 연말까지는 전쟁이 끝날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 끝날 때도 되었쟎니?” (194469)

 

안네 프랑크(1942.5.) /위키피디아
안네 프랑크(1942.5.) /위키피디아

 

하지만 두달도 되지 않아 8인의 은신처가 나치에 발각되었다. 일기는 194481일자로 끝을 맺었다. 그로부터 사흘후인 84일 비밀은신처에 푸른 제복을 입은 독일 비밀경찰과 네명의 사복경찰이 들이닥쳤다. SS요원은 은신처 밖에서 도와주던 크라이렐씨에게 권총을 들이대며 여기에 유태인을 감추어 두었지하고 네덜란드어로 말했다. 나중에 밝혀지기를, 그는 카를 질버바우어(Karl Silberbauer)라는 오스트리아인이었다.

독일 SS요원과 네덜란드 부역자들은 숨어 있던 8명에게서 돈을 뜯고 귀중품을 빼앗았다. 그리고 2년 이상 숨어 있는 사람들을 뒷바라지해 준 크라이렐씨와 코프하이스씨까지 포함해 모두 10명을 끌고 갔다. (출간된 일기에는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의 요청에 의해 프랑크 가족 이외의 이름은 가명으로 처리되었다. 물론 이들의 실명도 공개되었지만)

체포 직전에 안네의 일기장은 아버지의 서류가방에 들어가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나치들은 그 가방을 뒤져 보았으나, 서류뭉치와 노트들만 들어 있었다. 그들은 돈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방을 어질러 놓은 상태로 10명을 호송차에 싣고 본부로 데려갔다.

나치가 나간 후 청소부가 방을 치우다가 신문지와 몇권의 노트를 발견하고 또다른 조력자인 미프와 엘리에게 가져다 주었다. 이렇게 해서 안네의 일기장 키티는 살아남았다.

 

안네 프랑크가 숨어 살던 은신처 /위키피디아
안네 프랑크가 숨어 살던 은신처 /위키피디아

 

10명 중 네덜란드인 조력자 크라이렐과 코프하이스씨는 간단한 조사를 받고 풀려났고, 은신해 있던 8명의 유태인들은 안네가 일기장에 무시무시한 곳으로 소개한 베스테르부르크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얼마 있지 않아 8인은 모두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8명중 7명은 죽고 아버지 오토 프랑크만 살아 남았다. 팬 던씨는 고된 생활로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부려먹을수 없게 되자 나치는 그를 가스실로 끌고 가고 말았다. 오토 프랑크도 고된 노동에 병이 들어 그해 12월 수용소 병원에 입원했다. 해가 바뀌어 19451월이 되자 소련군이 아우슈비츠로 밀려왔고, 11711,000명의 유태인들이 이송되었으나 오토 프랑크는 환자라는 이유로 남아 있었다. 그는 소련군에 의해 구출되었다. 함께 있던 팬 던씨의 아들 피터, 뒤셀씨는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으나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아우슈비츠에서 SS 병사가 마르고트를 겁탈하려 하자 어머니는 미친 듯이 들려들어 막았지만 매를 맞으며 끌려 나갔다. 그후 안네와 마르고트는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아우슈비츠의 여자들은 독일로 이송되었다. 독일 베르겐베르젠에서 안네와 마르고트는 티프스에 걸렸다. 19452월의 어느날, 언니 마르고트가 먼저 숨졌다. 안네는 아빠도 엄마도 이미 돌아가셨을 게 틀림없어. 이제 나는 집으로 돌아갈 목적이 없어졌어라고 절망하며 마음을 내려놓았다. 연합군이 프랑크푸르트로 전격하던 3월 어느날, 안네는 고요히 숨졌다. 나이 열여섯이었다.

 

아버지 오토는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그는 미프와 엘리에게서 안네의 일기장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얼마후 두 딸의 사망 소식도 들었다.

아버지는 딸 안네의 일기장을 1947년에 네덜란드어로 출판했다. ‘안네의 일기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각국어로 번역되었고,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연극·영화화되었다. 2009년 유네스코는 그 가치를 인정 받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안네의 일기장 키티 /안네프랑크 하우스
안네의 일기장 키티 /안네프랑크 하우스

 

안네의 일기가 유명해지면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일기가 허구이며 안네는 실존하지 않았거나 일기의 내용이 아버지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어느 극단론자는 안네 프랑크를 체포한 경찰을 찾아낸다면 마음을 바꾸겠다고도 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나치 전범 추적에 온 힘을 쏟고 있던 시몬 비젠탈이 안네를 체포한 비밀경찰 요원을 찾아 나섰다. 네덜란드 경찰이 1948년 안네의 아지트를 수색한 조사를 한 적이 있다. 당시 SS요원 이름이 질버나겔(Silvernagel)로 알려져 있었다. 은신처 저택을 지키던 미프는 SS요원이 오스트리아 방언을 사용했다는 얘기도 전했다. 네덜란드 경찰은 안네 가족을 체포한 사람이 가명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했지만 구체적인 이름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젠탈이 네덜란드 경찰의 수사 결과를 건네 받았다. 그는 안네의 아버지에도 협조를 요청했으나, 오토는 그 요원이 게슈타포가 시킨 대로 자신의 임무를 다했을 뿐이라며 용서와 화해를 주장했다.

오토의 비협조에도 불구하고 1963년 비젠탈은 빈 경찰에게서 2차 대전 당시 네덜란드 SS요원의 명단이 적힌 전화번호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전화번호책을 구해 거기서 질버바우어(Silberbauer)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비젠탈은 빈 경찰에 확인을 요청했다. 빈 경찰은 질버바우어의 직무를 정지시키면서도, 그런 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비젠탈에게 미적대며 알려주지 않았다. 그 사실이 공개될 때의 뒷감당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빈 경찰 내부에 공산주의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동료가 안네 프랑크를 체포한 사람이라고 당에 알려주어 당 기관지에 보도되었다. 비젠탈은 화가나 네덜란드 언론에 질버하우스의 주소를 공개해 버렸다. 기자들이 질버바우어에게 몰려갔다. 질버바우어는 안네와 은신자들을 체포하던 때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기자들이 물었다.

- “안네의 일기를 읽었나?”

사서 보았다. 나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알고 싶었다. 내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 “안네는 어떻게 생겼나?”

책에 소개된 사진과 같았다.”

오스트리아 경찰은 질버바우어를 불러 청문절차를 밟았다. 오토 프랑크가 청문회에 나가 그가 시키는대로 의무를 이행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더 할말 있느냐는 질문에 오토는 다시는 저 사람을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질버바우어는 기소되지 않았고, 직무유예와 무급조치도 해제되었다.

안네 일가족을 체포한 카를 질버바우어는 상급자에게서 수색 지시를 받았다고만 말했을뿐, 밀고자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에게 안네의 은신처 수색을 지시한 SS 상급자는 율리우스 데트만(Julius Dettmann)이라는 사람인데, 19457월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자살했다. 질버바우어는 197261세로 숨졌다. 밀고자가 누구인지는 미궁에 빠졌다.

 

그러던 중, 미국의 전직 FBI 요원이었던 빈센트 팬코크 등 조사팀이 2016년에 유대인 공증사인 아놀드 판 덴 베르그가 안네 프랑크 일가의 은신처를 알린 밀고자라고 주장했고, 20221월 미국 CBS 다큐멘터리 '60 minutes'에 이를 공개했다. 팬코트의 주장은 책으로도 출판되었다.

하지만 이 주장에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아놀드 판 덴 베르그도 안네의 집이 수색당하던 19448월에 은신해 있었고, 출처라는 네덜란드 유태인협회의 목록에 은신처가 적혀 있었다는 주장은 믿을수 없다는 것이다. 도망다니는 사람들이 협회에 은신처를 가르쳐 줄리 없다는 것이다.

판 덴 베르그의 가족들은 출판사를 상대로 법정 소송을 중비했고, 이에 출판사는 사과의 뜻을 밝히고, 출판된 책을 회수했다.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네덜란드로 돌아온 후 딸의 일기를 출간했다. 그후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와 재혼해 스위스 바젤로 이사를 했다. 그는 안네 프랑크 재단을 설립하고, 박물관으로 안네 프랑크 하우스를 개관했다. 1980년 스위스에서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The Diary of a Young Girl 

Wikipedia, Karl Silberbaue

Wikipedia, List of people associated with Anne Frank _Frank

BBC, Anne Frank betrayal suspect identified after 77 years 

Wikipedia, Arnold van den Bergh 

안네의 일기, 김재천 번역, 소담출판사, 1992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